‘文-安 아름다운 담판’ 되면 박근혜 ‘위험’
▲ 박근혜 캠프 측에서는 문재인ㆍ안철수 후보가 충돌 없이 담판으로 단일화할 경우를 두려워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
교황 선출 방식을 ‘콘클라베(conclave)’라 칭한다. 가톨릭 교회에서 교황을 선출하는 추기경단의 선거방식이다. ‘열쇠로 잠근다’라는 뜻의 이 선출 방식은 교황을 뽑을 추기경들에게 빵과 포도주, 물만을 공급해 주고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차단하고 나서 투표를 진행토록 한다. 투표는 오전과 오후에 비밀투표로 진행되며 3분의 2 이상의 득표수가 나올 때까지 계속되는데 모든 투표는 무기명으로 한다. 시한은 3일. 최다 득표를 얻은 후보자 두 명의 결선은 만장일치가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투표가 끝나고 나서 투표용지를 태워 하얀 연기가 올라오면 선출된 것을, 검은 연기가 나오면 미결됐음을 알리게 된다.
지난 11월 6일 문재인-안철수 후보의 단일화 회동 다음날인 7일 문 후보 측 신계륜 특보단장은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단일화 룰과 관련해 이런 말을 한다.
“협상팀 없이 두 후보가 ‘단독’으로 만나서 실무협상까지도 전격적으로 처리하는 방식도 가능할 것이라는 생각이 점차 든다. 안 후보의 행보나 발언이 좀 독특하고, 주변의 의견을 듣지만, 자신이 결심하면 행동하는 양태를 보여 왔기 때문에 단일화 방식에 대한 논의도 협상팀 없이 두 후보의 ‘전격적 회동’으로 이뤄지는 방식도 염두에 둬야 할 것 같다.”
신 특보단장은 지난 2002년 16대 대선 정국에서 노무현-정몽준 단일화의 협상을 맡았던 당사자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 ‘담판’을 두고 새누리당이 지금까지 단 한마디 언급도 없는 것은 너무 뜨거워서 쉽게 손을 가져다 댈 수 없기 때문이란 해석이 나온다.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 과정의 안철수-박원순 담판은 30분 만에 끝났다. 안 후보가 대권을 염두에 뒀는지, 박 변호사와의 이념과 가치가 서울시장 자리를 내놓을 정도로 유사했는지, 안 후보에게 모종의 숨겨둔 뜻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안 교수는 서울시장을 꼭 해야겠다는 ‘권력 의지’보다 자신 말고도 잘할 사람을 밀어줌으로써 ‘더 나은 서울’을 약속했다. 권력욕을 보이지 않으니 모두가 손뼉을 쳤다.
지금 문-안 후보 측이 말하는 단일화 룰에 대해 여론조사냐, 국민경선이냐, TV토론 후 패널 조사냐 등 말이 많지만 룰 협상을 두고 치고받는 모습을 보인다면 쾌재를 부를 쪽은 새누리당이 된다. 지난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 직전, 방법론을 둘러싸고 벌어진 ‘경선 룰 논란’에서 얼마나 많은 표를 잃었는지 새누리당이 제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 문재인ㆍ안철수 후보. 최준필 기자 |
새누리당이 ‘콘클라베’를 겁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경선 룰 전쟁에서 발생할 문-안 후보의 ‘헛발질’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두 후보가 서로 유리한 쪽으로 경선 룰을 고집하면서 ‘대권욕’에 사로잡힌 모습을 보이면 국민 피로감이 높아지게 된다. 박 후보가 김문수 이재오 정몽준 후보의 경선 룰 개정에서 한 발짝도 물러나지 않으면서 ‘고집불통’ 이미지가 덧씌워져 표적이 된 것과 유사하다. 새누리당은 두 후보가 싸울수록 바깥에서 관전평을 내놓을 수 있다. 단일화 이슈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끌고 갈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쇼’가 아니라 ‘야합’임을 부각시킬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담판이 아니라 경선을 통해 한 후보가 승리하게 되면 나머지 한 쪽은 분명히 상처를 입는다. 패배한 후보가 백의종군을 선언하고 동반유세에 나서더라도, 패배한 후보를 지지했던 유권자층이 달갑게 승리한 쪽으로 이동할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룰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후유증이 크다. 조직표가 동원됐느니, 여론조사 표집과 크기가 잘못됐느니 하면서 공식 선거운동 기간 내내 ‘한지붕 두 가족 싸움’이 불가피해질 수 있다.
문 후보가 조금씩 지지율을 끌어올려 안 후보와 박빙이 될수록 담판의 극적 효과는 커진다. 담판으로 결정하면 문 후보의 용광로 선대위에 안 후보 측이 녹아드는 것도, 반대로 안 후보의 중도·진보를 아우른 블랙홀 선대위에 문 후보 지지층이 흘러들어 가는 것 등 어떤 쪽도 이상하지 않다는 해석이 나온다. 담판이 아닌 어떤 방식도 단일화 이후 불협화음을 토해낼 수밖에 없다. 지난 4·11총선 당시 통합진보당의 후보 선출 과정은 총선 결과가 나오고 나서 불거졌고, 전 국민에게 실망감을 안겨줬다. 그 당은 해체됐다. 문-안 두 후보가 이를 목격했고, 그 전철을 밟지 않으리란 것이 이들 지지층의 기대다.
‘담판’의 가능성은 벌써 안 후보의 ‘발언’에 녹아 있다고 해석하는 측도 있다. 안 후보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대선 예비 후보’ 등록을 하면서 직업란에 ‘정치인’이라고 쓴 것으로 알려졌다. 안 후보는 지난 9월 19일 출마 선언 때 이번 대선 결과에 상관없이 남은 생을 “정치인으로 살아가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 스스로 “강을 건넜고 다리를 불살랐다”라고도 했다. 사석에서 “앞으로 20년은 정치인으로 살아갈 것”이라는 취지의 말도 했다고 한다. 안 후보가 또 한 번 ‘통 큰 양보’를 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미 문 후보는 ‘공동정부론’을 설파한 바 있고, 안 후보의 최대 약점으로 ‘국정경험이 없다’라는 것이 꼽힌다. 18대 대선을 마지노선으로 정권교체에 생명을 건 문 후보, 앞으로 기회가 얼마든지 많기 때문에 꽃놀이패를 쥔 안 후보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05년 KT 사장 선임에서 이 ‘콘클라베’ 방식이 도입된 바 있다. 이때 KT는 공모→헤드헌팅 회사에 의한 추천→사장추천위원회(사추위) 구성→서류심사(사추위)→면접→사추위 최종 후보 추천→주총 승인의 절차를 거친다.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웠던 우수 경력자가 서류심사에 떨어졌을 만큼 엄격했다고 한다. 어떤 후유증도 없었다.
그렇다고 박 후보에게 단일화 빅 이슈를 덮을 만한 카드가 없을까. 박 후보를 지지하는 층에서는 “있다”고 말한다. 바로 대통령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두고서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시행 가능성이 컸던 결선투표제를 대선에 적용한다면 대선 국면이 달라진다.
대선 후보 전체를 두고 예선을 시행하고 최종 결선에 오른 두 후보 중 한 명을 투표로 뽑는 것이다. 쉽게 말해 대선을 두 번 치르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후보 단일화라는 절차가 필요치 않다. 새누리당 입장에서는 단독 후보가 허허벌판에 홀로 서 온갖 네거티브와 검증 공세에 시달리는 것을 방어할 수 있고, 단일화 이슈에 인물ㆍ정책 검증이 모두 묻혀 정국 주도권을 잃게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3자 대결에서 아직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다면 결선 후보는 기정사실이다. 도입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입장이다. 혹자는 “쉽게 말해 공직선거법을 개정해 결선투표제 조항을 넣기만 하면 된다”라고 말한다.
박 후보는 최근 야권 단일화에 대해 “그럴수록 우리는 국민 삶을 세세하게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 쇼는 필요 없다”고 했다. 그날 박 후보는 서울 노원구 공릉동 서울여대 캠퍼스 내 소극장에서 열린 여대생과의 대화에 개그콘서트 ‘정여사’에 등장하는 인기캐릭터 강아지인형 ‘브라우니’를 끌고 등장했다. “브라우니가 저를 닮아서 과묵하다”는 썰렁 유머까지 던졌다. 미국에서는 프로 레슬링이 ‘쇼’인 줄 알면서도 열광한다. 단일화를 쇼라고 깎아내리기에는 국민적 관심이 온통 거기에 가 있다. 다른 수를 들고 나와야 할 때다.
선우완 언론인
▲ 김태호 선대위 공동의장과 이재오 의원. |
어시스트 하랬더니 ‘팀킬’
최근 친이재오계 최측근 인사가 오랜만에 여의도에 나타나 몇몇 기자들과 만났다고 한다. 이 자리에서 그는 현재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가 야권 단일화 정국에서 ‘갑’이 아닌 ‘을’이 될 수밖에 없으며, 독립변수가 아닌 종속변수로 추락할 것이라 경고했다. 그러면서 박의 출구전략은 “새누리당은 지지하지만 박근혜를 지지하지 않는 여론조사 9~15%의 보수 우호 유동층을 잡는 것 뿐”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이재오 의원 최측근의 말이다.
“우리도 박 캠프에서 이재오를 안아 와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는 것을 안다. 과일 바구니 들고 영감(이재오) 자택을 찾든, 영감이 만나주지 않으면 사모님이라도 붙들고 울든, 뭔가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의견이 많이 제출됐다고 한다. 영감만 한 전략가도 없잖은가? 그런데 가만 보면 메신저가 없다. 하루는 H가 전화해서 만나자 하고, 하루는 S가 전화해서, 하루는 K가 연락해 온다. 답을 하고 싶어도 누가 진짜 박의 메신저인지 알 길이 없으니 분통만 터진다. 사람 쉽게 보고 있다.”
이재오 의원은 박 후보가 내놓은 정치쇄신안을 두고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은 옛날부터 하자는 소리가 나온 것인데, 나온 얘기를 (자꾸) 하는 것은 쇄신이 아니다”고 비판했다. 곡소리 나는 정치쇄신도 아니고, 명쾌한 개헌도 아니라는 뜻으로 읽힌다. 그는 “‘분권’을 언급하면 누구의 말을 따라서 하는 것 같으니까 적당히 ‘중임제 개헌을 하겠다’는 것인데 이는 국민을 속이는 것이고 옳지 않은 것”이라고도 했다. 2008년 총선 공천 정국에서 친박계 학살을 두고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던 박 후보의 발언을 묘하게 풍자했다.
정치권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 중에 최근 친이명박계 인사 서른 명 가까이가 만찬 회동을 했다고 한다. 누가 주최했는지에 대해서는 말들이 많은데 분명한 것은 그 자리에서 “경거망동하지 말자”는 뜻이 모아졌다는 것. 경거망동이란 것은 박 후보가 아무리 화해 제스처를 보내도 쉽게 엉덩이를 들지 말자는 뜻이라는 것이다.
가만 보면 현재 박 캠프에서는 정몽준 의원을 빼면 친박 울타리 밖에서 영입한 인사 중 도움 되는 인물이 별로 없다. 오히려 교묘하게 재 뿌리는 인사들이 모두 ‘비박 진영’이다. 9일 오전 여의도 한나라당사에서 열린 중앙선대본부 회의에서 지난 경선 경쟁자였던 김태호 선대위 공동의장이 느닷없이 ‘홍어 X’ 이야기를 꺼냈다. 문재인-안철수 후보 단일화를 비판하면서 “대선이 불과 며칠 남지 않은 상황에서 단일화를 하는 것은 국민을 현혹시키는 일이다. 마치 국민을 ‘홍어 X’ 정도로만 보는 이런 대국민 사기 쇼는 중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옆에 앉아 있던 이정현 선대위 공보단장이 얼굴을 감싸 쥐면서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단일화가 어제 오늘 일도 아닌데 너무 나갔다는 것이다. 김 공동의장이 박 후보 ‘어시스트’를 가장한 ‘팀킬’을 했다는 의혹이 나오는 부분이다.
이재오 의원은 최근 새누리당 중앙선대위 참여 여부에 대해 “지금 새누리당 의원으로 있는 것만 해도, 가만히 있는 것만 해도 크게 도와주는 것 아니냐? 공동선대위원장 대여섯 명이 있는데 내 이름 걸친다고 더 잘 돌아간다는 보장이 있냐?”고 했다. 섭섭함의 발로임과 동시에 ‘마이웨이’를 선언한 셈이다. 이렇듯 비박진영의 재뿌리기와 외면으로 박 후보의 보수 진영 우호 유동층 잡기는 걸렀다는 말이 나온다. [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