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재활용’해 경제 재건 메시지
▲ 11월 6일 재선에 성공한 오바마 대통령과 부인 미셸이 당선 연설을 하기 위해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색 수트와 푸른 넥타이는 그의 ‘정치 유니폼’이다. EPA/연합 |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51)이 재선에 성공하면서 ‘흑인 최초로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 선거 당일까지 승부를 점칠 수 없을 만큼 초박빙이었기에 이번 승리는 더욱 달콤할 수밖에 없다. 승리의 기쁨을 누리기에는 임기 4년 내내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무엇보다도 ‘앞으로(Forward)‘라는 선거캠페인 슬로건처럼 지난 4년 간 추진해왔던 정책을 2기에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원을 장악한 공화당과의 싸움이 만만치 않을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심지어 레임덕이 조기에 시작될 것이란 부정적인 전망을 내놓는 전문가들도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번 선거로 인해 미국에서 인종 갈등이 더욱 심화됐다는 비난과 우려가 섞인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오바마의 재선 성공 요인, 그리고 남은 과제는 무엇인지 살펴봤다.
지난 11월 6일, 당선 연설을 하기 위해 지지자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오바마는 머리는 희끗희끗했고 얼굴은 오랜 긴장 탓인지 다소 지쳐 보였다. 4년 전 처음 대통령에 당선됐을 때와는 사뭇 달라진 모습이긴 했지만 단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바로 그의 ‘정치 유니폼’처럼 돼버린 짙은 색 수트와 푸른색 넥타이, 그리고 흰색 와이셔츠였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더, 정치인들의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자 지도력의 상징이 된 옷깃의 성조기 배지도 마찬가지였다.
▲ 미셸은 2010년 입었던 원피스(사진)를 6일 당선 연설 때 다시 입고 나왔다. |
하지만 이날 미셸의 선택은 그 어느 때보다 탁월한 것이었다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선거 캠페인의 절정에서 보여준 절제되고 경제적인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원피스 한 벌에 ‘경제적인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담아냈다는 것이다. 이는 침체된 경기의 회복과 경제 재건에 영부인인 내가 먼저 앞장서겠다는 간접적인 뜻을 전달하는 아주 현명한 선택이었다.
미셸의 원피스에서도 알 수 있듯이 오바마 행정부에게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경제 문제다. 실업률을 간신히 8% 이하로 끌어내리긴 했지만 언제 다시 경기 침체가 가속화될지 모르는 일이다.
우선 가장 발등에 떨어진 불은 세금감면 문제다. 오는 12월 31일 종료될 세금감면 혜택을 연장할지 여부를 두고 의회와 협의해야 한다. 오바마는 대선 캠페인 내내 부시 행정부 시절부터 실시해온 연소득 25만 달러(약 2억 7500만 원) 이상 고소득층의 최고소득세율을 35%에서 39.6%로 올리겠다고 공약했지만 공화당은 경제 회복과 일자리 창출에 방해가 된다며 세금감면 조치를 연장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또한 정부지출 감축을 놓고도 의회와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 만일 재정적자 협상이 원만히 타결되지 않을 경우 새해부터 1조 2000억 달러(약 1300조 원)의 예산이 자동 감축되기 때문에 이른바 ‘재정절벽’에 직면하게 될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이밖에도 내년 봄 상한선에 도달하게 될 국가부채상한선 증액을 놓고도 의회와 담판을 벌여야 하며, ‘오바마케어’라고 불리는 건강보험개혁법과 관련해 정부지출을 확대하기 위해서도 머리를 짜내야 한다.
경제 문제 외에도 외교적으로는 제2의 강대국으로 부상하는 중국의 새로운 지도자 시진핑과 어떤 협력 관계를 맺어야 할지를 두고 새로운 고민에 빠져야 한다.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Pivot to Asia)’을 강조한 만큼 앞으로 중국과 벌일 패권 다툼 역시 숙제로 떠올랐다. 또한 지난 4년 간 조금씩 진행해왔던 이라크 및 아프간의 단계적 철군도 마무리지어야 한다.
실제 이번 선거에서 오바마가 승리할 수 있었던 커다란 요인 가운데 하나는 여성 및 청년층의 표심을 잡은 것 외에도 자신의 확고한 지지층, 즉 유색인종(흑인, 히스패닉계, 아시아계) 유권자들을 성공적으로 결집시켰다는 데 있었다. 특히 히스패닉계와 아시아계의 투표율은 기록적이었다. 더욱이 이 두 집단이 미국 내 유권자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어 그 의미는 더 남다르다.
특히 히스패닉계 인구가 유권자 열 명 가운데 한 명으로 늘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히스패닉계 인구는 미국 내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으며, 현재 전체 인구의 17%가량인 약 53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로써 소수인종들이 전체 유권자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게 됐으며, 이 수치는 이번 선거에서 오바마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했다. 히스패닉계 유권자의 71%가 오바마를 뽑았으며, 흑인 유권자들의 경우에는 무려 93%가 오바마에게 몰표를 던졌다. 아시아계 역시 73%가 오바마에게 표를 던졌다. 이는 2008년 대선보다 늘어난 수치였다. 지난 대선에서는 히스패닉계의 67%가, 그리고 흑인의 95%가 오바마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오바마에게 이렇게 호의적인 이유는 뭘까. 물론 일차적으로는 오바마 역시 유색인종이란 점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니다. 이들은 공화당보다 민주당이 이민자들에게 더 신경을 쓴다고 여기고 있으며, 오바마가 내놓은 일자리 창출 및 경제 정책에 더욱 신뢰를 보내고 있다. 이런 점을 의식한 듯 오바마는 당선 연설에서 “여러분이 흑인이건 백인이건, 히스패닉이건 아시안이건, 또는 미국에서 태어났건, 나이가 어리거나 많거나,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비장애거나 장애거나, 동성애자거나 이성애자거나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기 미국에서는 누구나 노력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와 달리 백인들의 지지율이 4년 전에 비해 급락했다는 점은 문제다. 2008년 43%였던 지지율이 이번 선거에서는 39%로 뚝 떨어진 것이다. 이는 다시 말해 백인들 대다수가 공화당 쪽으로 기울었으며, 그만큼 인종 간 격차가 심화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이번 선거에서 공화당의 밋 롬니 후보는 오바마와 확연히 다른 인종별 지지율 분포도를 보였다. 백인 유권자의 59%가 지지했음에도 당선에 실패했으며, 이는 미 대선 역사상 당선에 실패했던 후보 가운데 최고치였다. 하지만 백인 유권자를 제외하고 롬니가 거둔 성적표는 초라했다. 히스패닉계의 표는 27%만 얻는 데 그쳤으며, 흑인과 아시아계의 표도 각각 6%와 26%에 머물렀다.
이에 공화당 내부에서도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쿠바 출신의 미보수주의연합 회장인 공화당의 알 카르데나스는 “공화당은 너무 노쇠했고, 너무 백인지향적이고, 또 너무 남성지향적이다. 너무 늦기 전에 어떻게 변해야 민심을 읽을 수 있을지 파악해야 한다”고 말했는가 하면, 쿠바 이민자 가정 출신인 마르코 루비오 상원의원도 “보수 활동은 특히 소수인종들과 이민자 사회에 어필할 수 있어야 한다. 공화당은 어느 때보다 더 그들에게 신뢰를 심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화당이 단순히 히스패닉계 후보를 내세우거나 이민정책을 수정한다고 해서 선거에서 이긴다고 장담할 수는 없다. 부시 행정부에서 일했던 중도파 공화당원인 데이비드 프럼은 “물론 히스패닉의 표도 중요하다. 하지만 공화당에게 필요한 건 중산층을 겨냥한 정책이다. 이를테면 건강보험이나 가계부채 등의 문제를 해결해줄 그런 정책 말이다”라고 말했다.
김미영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
▲ 밋 롬니의 최측근 가렛 잭슨의 트위터에 오른 사진. 선거 다음날 롬니 가족의 훈훈한 모습이다. |
마지막 기회 날려…‘그저 시간이 약’
“정말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패자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패배를 인정하기란 사실 누구나 힘들다. 더욱이 다 이겼다고 생각한 경기를 졌을 때는 더욱 그러하다. 공화당의 밋 롬니 후보에게 이번 패배는 지난 5년 간 달려왔던 대권 도전의 종지부를 찍는 마침표와 같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더욱 뼈아픈 순간이었다.
사실 선거 당일까지만 해도 롬니는 자신만만했다. 거의 승리를 확신하는 듯 시종일관 여유를 부렸다. 선거 당일이었던 화요일 워싱턴의 <MMAL> 라디오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도 그는 “오늘 밤 나는 승리할 것입니다. 나를 끝까지 벼랑 끝으로 몰고 갈 주가 어디일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1118단어로 된 당선 연설도 준비해 두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이 연설문을 낭독하지 못했다. 대신 그날 밤 부랴부랴 작성한 패배인정 연설을 읽어야 했다. 그만큼 승리를 확신했기에 그는 패배인정 연설문을 미리 작성해두지 않았다.
패배를 인정하던 순간의 롬니의 모습은 냉정하고 침착하기 이를 데 없었다. 오하이오, 플로리다, 버지니아 등 3개 경합주의 표결 결과가 근소한 차이기 때문에 아직 패배를 인정하기에는 이르다며 포기하지 말 것을 촉구한 보좌관들에게 그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이때 롬니의 아내 앤은 남편 곁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 그의 최측근인 가렛 잭슨이 오바마의 최측근인 마빈 니콜슨에게 전화를 걸어 “당신 보스 지금 전화 통화 가능한가요?”라고 물었고, 그렇게 롬니는 자신의 패배를 깨끗이 인정했다.
선거가 끝난 다음 날 아침 잭슨의 트위터에 올라온 사진 역시 지지자들의 마음을 뭉클하게 했다. 가족들과 둘러 앉아 초콜릿 우유를 마시면서 미소를 띠고 있는 롬니의 모습은 다소 지친 듯 보였지만 편안한 모습이었다. 가렛은 사진과 함께 “얼마나 멋진 가족인지, 이들과 이렇게 가까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라고 설명을 달았다.
롬니의 다음 행보는 아직 정해진 바 없다. 지난 2008년 공화당 경선에서 존 매케인에게 패한 후 4년 만에 대권 도전의 기회를 잡았던 만큼 롬니에게는 이번 기회가 사실 마지막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다시 정치 무대로 돌아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대신 공화당의 정치 원로로 활동하거나 캐피탈회사 중역으로 일한 경력을 바탕으로 다시 민간 기업으로 돌아가 사업가로서 경력을 이어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은 세라 페일린 전 부통령 후보처럼 방송 쪽으로 진출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만일 정치 평론가로 활동한다 하더라도 방송보다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는 쪽이 될 것이라는 것이다. 실제 롬니는 말보다는 글을 쓰는 것을 더 선호하며, 유세 중에도 종종 아이패드나 블랙베리로 글을 써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선거가 끝난 후에도 롬니는 자신의 선거캠프에서 일했던 400여 명의 직원들이 이번 달 말까지 모두 퇴직수당을 받을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두었으며, 곧 다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신경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낙선한 선배(?)들이 롬니에게 하는 조언은 하나같이 ‘시간이 약’이라는 것이다. 1996년 빌 클린턴에 맞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다 패한 밥 돌은 “일상으로 빨리 돌아온다는 건 쉽지 않았다. 머리 속에는 계속 그 생각이 맴돌았다. 무엇을 잘못했는지, 정말 클린턴을 이길 기회는 없었는지 등등 선거 전략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에 한밤중에 벌떡 깨기도 했다. 시간이 걸린다.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계속해서 바쁘게 생활하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1988년 조지 부시에게 패했던 민주당의 마이클 듀카키스 후보는 “3주 간격으로 대륙을 횡단하다 보니 체내 시계가 완전히 엉망이 되버렸다. 편안하게 숙면을 취하기까지 3개월 정도가 걸렸다”고 말했다.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