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어도 먼지 안 나는 희한한 실세
▲ 2002년 서울시장 투표 당일 이재오 당시 선대본부장(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이 이명박 후보 (왼쪽), 당직자들과 함께 개표방송을 지켜보고 있다. 임준선 기자 |
이재오(李在五:1945년 1월 11일~). 운동권 출신이지만 현 새누리당 국회의원이다. 4선 중진이며 이명박 정부에서 특임장관을 역임했다. 강원도 강릉군 묵호읍에서 태어났지만 경상북도 영양군이 고향이라 알려져 있다. 2010년 한 포털 사이트에 고향을 다시 ‘동해’로 바꿨는데 그때부터 ‘탈 TK 이후 중부권 대표주자’로서의 출마설이 나왔다. 그때 기획됐든 아니든, 이재오는 새누리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섰다가 중도 퇴장한다. 어릴 때부터 웅변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면서 웅변대회를 휩쓸었다. 선동가적 자질이 충분했다는 것이다. 영양군청에서 근무한 적이 있고, 고교 국어교사로도 재직했다.
일단 이재오가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도울 수 없는 이유부터 보자. 그는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의 1등 주자였다. 아니, 이명박에게 “대통령이 돼라”고 가장 먼저 부추긴 이가 이재오다. 당시에는 박 후보는 정치권 밖에 있었으니 ‘박근혜 대항마’로서 이명박을 키운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재오는 중앙대 대학생 시절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투쟁을 주도(6·3항쟁)하다가 제적당한다(여기서 이명박을 처음 만난다). 이후 유신반대, 범민족대회 관련 등 군사독재정부 동안 긴급조치 9호 위반 등으로 30년간 다섯 번 투옥된다. 수배생활 7년, 감옥살이 10년이다. 광주교도소에서만 3년 살았다. 그가 중앙대 졸업장을 받은 것은 입학한 지 32년 만인 1996년. 그로선 박근혜가 ‘과거의 상처’이자 ‘고문’이다. ‘유신 공주’라고 부를 만도 하다.
2004년이다. 이재오는 한나라당(새누리당의 전신)이 안 되는 4가지 이유를 들어 ‘미스터 쓴소리’로 거듭난다. 수구, 냉전, 3·4·5·6공, 영남 이미지. 당시 한나라당이 재집권하려면 이 ‘네 가지’를 떨쳐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유신 치하에서 10여 년이나 옥살이를 한 내가 박(근혜) 대표를 떠받치는 것은 지조를 파는 일이나 다름없다.”
▲ 서울시장 선거에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후보, 당직자들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있다. 임준선 기자 |
▲ 지난 5월 10일 대선 출마선언을 하고 있는 이재오 의원. 이종현 기자 |
같은 해 8월 29일 열린 한나라당 의원 연찬회. 김문수 의원(현 경기지사)은 박 대표의 면전에서 “(정수장학회 문제를) 박 대표가 자신에게 맡기라고 하지만 언론에서 의혹을 제기하면 그냥 넘길 수 없는 문제가 된다”고 압박했다. 사회자가 박 대표를 겨누는 비판이 계속 나오자 오후 일정을 이유로 토론을 끝내려 한다. 이때 이재오가 등장한다.
“일정은 무슨 일정! 밤을 새워서라도 토론해야지! 연찬회에 놀러 온 줄 알아?”
토론이 길게 이어졌고 급기야 박 대표가 나선다.
“저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한 분은 박근혜가 대표가 되면 탈당하겠다고 여러 번 공언했다. 그러나 탈당 안 했다. 자기가 한 말은 정정당당하게 지키고 남을 비판해야 한다.”
토론 이후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재오는 김문수와 술잔을 나눈다. 동료 의원이 노래 한 곡 하라고 하자 “‘떠날 때는 말없이’를 불러야 하나?”라고 비아냥거린다. 이재오는 뼛속부터 박근혜와 맞지 않는 사람이다. 이재오는 싸움꾼으로 커왔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때에는 ‘싸움닭’이었다. 맺고 끊는 게 분명하고, 결심이 서면 주저하지 않는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내뱉어야 직성이 풀린다.
1990년 민중당을 만들어 활동하다 1996년 15대 총선을 앞두고 김영삼 전 대통령의 권유로 신한국당에 입당한 이재오는 당시 주변에서 ‘변절자’라고 손가락질을 하자 솔직한 심정을 말한다. “14대 총선에 민중당 후보로 나가 실패했다. 선거하기 전에는 진보적 정당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이 많았는데 정당 지지율이 3%도 안 나왔다. 대중의 정치적 이해라는 게 몇 사람이 의도적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대중의 정치적 이해에 맞추는 것이 정치다. 정치를 하려면 제도권에 들어가야겠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는 해명도 이상하리만큼 당당하게 하는 편이다.
이재오와 이 대통령의 인연은 1964년 6·3사태 때 처음 맺게 된다. 이재오(64학번)는 중앙대 구국투쟁위원장이었고, 이 대통령(61학번)은 고려대 상대 학생회장이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운동권 사이에선 꽤 알려졌었다. 1992년 6·3동지회에서 둘이 다시 만난다. 하지만 본격적인 만남은 15대 국회 때부터다. 이 대통령이 이재오에게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처음 밝히면서다.
“15대 국회에서 다시 만난 이(명박) 의원이 운하에 대해 죽 설명하더라고요. 그때 제 머리에 스치는 영감이 ‘이거다. 나라는 다시 한 번 바꾸는 길은 운하 건설이다’. 그래서 제가 ‘형님 대통령 하소’ 그러니까 이 의원이 ‘어? 뭐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형님은 국회의원 해 가지고는 평생 그 일 못합니다. 내가 볼 때는 형님 체질이 국회의원 체질도 아니고 서울시장이나 대통령을 해서 예산을 집행할 수 있는 자리에 올라가야 합니다. 국회의원은 내가 뒤를 받쳐 줄 테니 형님은 대통령 하소’ 그랬지요.”
▲ 2010년 7월 서울 은평을 재보궐 선거에 출마, 시민들에게 90도로 절을 하며 한표를 호소하고 있다.일요신문DB |
▲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특임장관 임명장을 수여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
2007년 8월 20일이다.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 전당대회. 이재오는 측근으로부터 “2000표로 지고 있다”는 소릴 듣고 ‘졌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행사장을 나와 여의도로 가면서 차 안에서 정계 은퇴 성명서를 썼다. 눈물이 났다고 한다. 12년을 이명박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자신을 바쳤는데… 정치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여기까지구나. 사람이 능력을 알았을 때 물러가는 것이라면 국민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정계를 떠나자. 그는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는 “800표 차로 줄었다”는 이야길 듣는다. 여론조사에서는 이길 것이란 확신이 있었으니 그 길로 차를 돌렸다. 그는 지금도 당시 경선이 본선보다 힘들었다고 회고한다.
“이명박은 참을 줄 아는 사람이다. 나는 참지 못한다. 참는 게 얻는 건데 나는 싸워서 얻는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민주화를 이루는 데는 기여했다고 하지만 나는 싸워서 얻은 게 없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참아서 얻는 길을 걸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 직후 한 인터뷰에서 이재오가 스스로 밝힌 차이점이다.
▲ 이종현 기자 |
한 일간지는 이재오가 “당에 이명박 후보를 대표선수로 인정하지 않는 세력이 있다. 이제 이들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박 전 대표는 “오만의 극치”라며 이재오를 겨눴고, 친박계가 이재오 퇴진을 압박한다.
당시 이명박 후보는 이재오를 조용히 불러 “당신은 아흔아홉 가지가 다 좋은데 한 가지가 나쁘다. 그 한 가지가 참지 못하는 거다. 왜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나? 실속도 없이 소리만 지르면 다냐?”라고 충고한다. 이재오는 후보 앞에서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한마디도 대꾸하지 않는다. 12년 만에 이명박에게서 듣는 최초의 핀잔이자 충고였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직후 치러진 2008년 4월 18대 총선에서 그는 한나라당의 압승을 구경해야 했다. ‘친박계 공천 학살’ 주범으로 항시 거론됐고, ‘명계남’(이명박계만 살아남았다)이라는 소리가 나왔다. ‘이재오 살생부’라는 것이 공공연히 나돌기도 했다. ‘오만한 실세’로 완전히 찍혔다. 전국적으로 ‘박풍’이 일었다. 그래서 그는 서울 은평을에서 문국현 창조한국당 대표에게 1만 표 차이로 낙선한다. 이후 미국으로 떠났다. 일종의 유배였다. ‘향수병’을 심하게 앓고 있다는 보도가 쏟아진다.
이재오가 다시 정치권으로 돌아온 것은 2010년 7·28 재보궐선거에서다. 한나라당 후보로 서울 은평을에 출마해 범야권 단일후보였던 전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이자 민주당 최고의원 장상 후보를 꺾는다. 그는 ‘나 홀로 선거’의 진수를 보여주면서 당 소속 의원들에게 “한강을 건너오지 마라”고 선언했다. 90도 인사, 자전거 유세가 제대로 먹혔다. 이후 2010년 8월 8일 이명박 정부 집권 3기 개각에서 특임장관으로 내정되고 그달 30일 취임한다.
사실 이재오와 관련한 비리나 부패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일 처리가 깨끗한 것인지 그 자체로 깨끗한 정치인인지는 역사가 판단할 것이다. 다만 2010년 이재오 조카가 콘텐츠진흥원에 채용되는 과정에서 특혜를 입었다는 의혹이 인 적은 있다. 민주당 최문순 의원이 국정감사에서 당시 이재오 특임장관 조카가 2009년 콘텐츠진흥원 과장으로 채용됐는데 이 과정에서 진흥원 고위 간부들이 이 씨가 이 장관의 조카임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최 의원은 질의에서 “이 씨가 지원한 이력서에 연필로 ‘이재오 조카’라고 써 있었다. 이 씨의 이력서에 누군가가 연필로 이재오 조카라고 써놓았다면 과연 심사위원들이 사심 없이 점수를 줄 수 있었겠는가”라고 의혹을 제기한다. 당시 한국콘텐츠진흥원은 해명자료를 내고 “이 씨가 제출하고 심사받은 이력서에는 ‘이재오 조카’라고 표기된 사실이 없으며, 콘텐츠진흥원 입사지원양식에도 친인척 관계를 기입하는 란이 없다. 심사과정에서도 본인 또는 누군가 서류에 연필로 이재오 조카라고 표기한 적은 더더구나 없다”고 밝힌다.
2010년 8월 31일 당시 이재오 특임장관이 인사차 민주당을 방문한 자리에서 박지원 원내대표는 이런 말을 건넨다.
“뭘 찾아보려고 해도 찾을 수가 있어야죠. 왜 이렇게 시원찮게 자랐어요? 부동산 투기도, 위장 전입도 못 하고….”
특별한 시빗거리가 없으니 인사청문회를 일사천리로 통과시켰다는 덕담이었다.
이재오가 살아남는 것에는 그의 ‘청빈함’이 있다. 그는 골프도 술도 못한다. 그러니 실속 없는 구설에 오를 일이 별로 없다. 그는 돈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인이다. 재야 운동가 시절 그는 서울 은평구 대조동, 역촌동, 불광동 단칸방을 전전하며 세를 살다 1990년 가진 돈 850만 원에 2000만 원을 대출받아 구산동에 23평짜리 단독주택을 산다. 그는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그의 집을 방문했던 한 신문 기자는 “그 형님… 저렇게 사니 이 바닥에 살아남아 있지…”라고 혀를 내둘렀다. 그만큼 누추한 곳이다.
그는 지금 ‘개헌 전도사’로 헌법을 바꾸자며 군불을 지피고 있다. 18대 대선이 끝나지 않은 이 시점, 정치인으로서의 그는 돌파구를 ‘개헌’으로 잡았다. 이재오가 살아남는 법이다.
최기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