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꾀 부리다 대마 함몰…사상 초유 하극상
여기저기서 천 원짜리 내밀듯 사표가 난무했고, 검사들 사이에선 직책과 기수를 넘나드는 계략이 오고 갔다. 총장은 직속부하인 중수부장을 감찰하고, 중수부장은 직속상관 퇴진을 면전에서 요구하는 흔치 않는 파국으로 이어졌다. 결국 총장이 사퇴했다. 흔히 볼 수 없는 ‘역 단죄’로 마무리된 ‘검난(檢亂)’, 그 뒷이야기를 정리해봤다. [관련기사 최재경 인물탐구]
대검 중수부 폐지 내용이 담긴 검찰 개혁안 발표를 놓고 검찰총장과 대검 중수부장의 충돌(총장의 중수부장 감찰 지시), 중수부장을 필두로 한 대검 간부들과 서울중앙지검 부장급 검사들의 ‘항명’으로 이어진 초유의 사태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한상대 총장은 평소 기자들과 모인 자리에서 자주 최재경 중수부장의 수사 실력과 인품을 높게 평가해왔다. 선후배 검사들에게 두루 깊은 신망을 받는 최 중수부장에 대한 감정은 한 총장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검찰 출입 기자들이 대검 중수부 사건 수사 상황을 물을 때마다 “중수부장에게 일임한 부분”이라고 배려한 한 총장이었다.
최 중수부장도 “총장께서 중수부 수사는 결론만 보고를 받는다. 기다려 주신다”고 말할 만큼 두 사람은 서로를 충분히 신뢰하는 관계였다. 대검 중수부장 출신인 안대희 새누리당 정치쇄신특위 위원장(전 대법관)이 검찰 개혁 방안의 하나로 상설특검제 도입 필요성을 제기하자 최 중수부장은 즉각 반박 기자회견을 가졌는데, 이는 한 총장의 배려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 충돌로 두 사람이 보여준 최근까지의 소통과 ‘직무적’ 관계는 진정성을 담보할 수 없게 됐다. 이런 면에서 두 사람의 갈등은 순간적으로 촉발됐다.
김광준 부장검사 뇌물 수수, 전 모 검사의 여성 피의자 성관계 파문이 연이어 드러나자 한 총장은 11월 22일부터 각 지역 고검장, 검사장 등과 릴레이 회의를 열고 사태 수습과 검찰 개혁 방안을 논의했다. 이 과정에서 대검 중수부 폐지를 적극 검토한 게 최 중수부장을 자극하고 말았다.
검찰 내에서 중수부에 대한 애착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는 최 중수부장은 한 총장에게 사퇴를 요구하는 ‘직격탄’을 날렸다.
11월 28일 오후 6시20분 두 사람의 갈등은 전격적으로 외부에 알려졌다. 대검 대변인실발로 대검 감찰본부가 출입기자들에게 브리핑 통보 문자를 보냈다. 보통 최소 한 시간 전에 통보를 하지만, 브리핑 몇 분 전에 온 일방적인 문자였다. 감찰본부장의 입에서 ‘최재경 중수부장을 감찰 중’이란 말이 나오자 출입 기자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사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곧바로 최 중수부장이 오후 7시30분까지 입장을 정리하겠다는 문자가 도착했고, 최 중수부장은 “부당한 조치엔 굴하지 않겠다”는 글을 기자들에게 전했다. 중수부장 역시 총장과는 타협할 생각이 없고, 대신 이 상황을 전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였다.
#중수부의 반란
보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 총장의 중수부 폐지 검토 분위기가 검찰 내에 전해진 직후, 대검 중수부 내에선 이미 총장의 용퇴 시나리오가 논의됐던 것으로 전해진다.
일부 검사들이 자세한 ‘팩트’ 확인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관망적인 입장을 보였지만, 사실상 총장 사퇴를 위한 ‘배수진’에 동의했다는 후문이다. 중수부의 직속상관인 검찰총장이 스스로 중수부를 검찰 개혁 테이블에 올려놓은 데 대한 실망감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한 검찰 관계자는 “과거 대검 중수부 폐지가 논의가 있을 때마다 검찰총장이 직을 걸고 사수했던 전례와는 너무 대비됐기 때문에, 한 총장에 대한 반발 의지가 더 강경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더구나 ‘기획수사통’으로 불리는 한 총장이 특수수사 부서인 중수부 폐지에 나선 점 역시 반발 심리를 자극한 면이 컸다.
총장이 중수부장에 대한 감찰을 언론에 공개하라는 지시가 있자 대검 중수부에선 먼저 검찰지휘부의 동향까지 흘러나왔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를 두고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총장에 대한 반격 카드로 여론전을 선택한 것”이라고 전했다. 더불어 대검 중수부 검사들을 중심으로 특수부 검사들까지 릴레이로 사표를 제출한다는 얘기도 흘러 나왔다.
11월 29일, ‘코너’에 몰리던 한 총장이 최 중수부장과 김광준 부장검사의 문자메시지 내역을 공개하면서 분위기 전환을 꾀했다.
그러나 곧바로 한 방송사 뉴스에선 김광준 부장검사가 자신의 뇌물수수 비리 의혹이 알려진 후 작성한 언론 보도 자료를 한 총장이 미리 ‘첨삭’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사실 여하를 떠나 이 정황의 ‘진원지’가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 배경에 중수부가 있다는 설이 설득력 있게 퍼졌다.
결국 이처럼 ‘총장 용퇴론’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한 다양한 방법이 모색됐고, 실제 실행에 옮겨지면서 결과론적으로 총장을 압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는 풀이가 가능한 셈이다.
#고려대 vs 서울대
이번 사태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또 한 가지 특징은 검찰 내에 잠재해 있던 출신 학교별, 기수별 막후 경쟁 구도가 여실히 드러났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총장의 결정을 반대하고, 용퇴를 요구하는 과정에서 특정 학교와 기수의 목소리가 상당히 강경하게 나왔다는 얘기다. 결국 한 총장의 인사 스타일과 주요 수사 처리 방식에 상당한 불만이 잠재돼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을 넓힐 수 있다.
고려대 출신인 한상대 총장이 부임한 후 고려대 출신 검사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는 경우가 적잖았다. 현재도 대검 대변인, 범죄정보기획관 등이 해당 학교 출신이고, 중수부장의 감찰을 맡은 것으로 알려진 대검 감찰2과장도 고려대 출신이다. 올해 정기 인사가 있기 전에도 서울중앙지검 주요 노른자위 형사부와 특수부장, 대검 수사기획관 자리를 고려대 출신들이 차지했었다.
때문에 항상 주요 사건 수사와 관련해서 총장의 개입 문제가 논란에 오르내렸다. 능력을 떠나 안배 차원에서의 불만, 여기에 사건 혐의 적용의 판단 수위를 놓고 명확하지 않은 총장의 행보에 대한 불만도 ‘총장 용퇴론’을 불붙이는 데 일조했다는 것이다.
서울대 출신의 최 중수부장이 총장과 맞서면서 서울대 출신 검사들의 반발도 거셌다. 전 아무개 검사 파문으로 사직한 석동현 전 서울동부지검장은 ‘대놓고’ 한 총장의 행태를 비난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총장이 중수부장에 대한 감찰 지시를 내리고, 김광준 부장검사와의 문자메시지를 공개한 대목에선 기수별 갈등 구조도 여실히 나타났다. 문자메시지 공개 과정에서 한 총장과 갈등을 벌인 이준호 감찰본부장은 김광준 부장검사와 최 중수부장과 서울대 동문이면서 같은 사법연수원 17기다. 이 본부장은 한 총장의 공개 지시를 거부했다. 한 총장은 ‘대로’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서울대 출신은 아니지만 김광준 부장검사 비위를 수사하면서, 김 부장과 최 중수부장의 문자메시지를 감찰본부에 보고한 김수창 특임검사도 한 총장이 문자를 공개적으로 문제 삼자 사표를 냈다가 주변에 만류로 철회했다.
전직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검사 출신의 C 변호사는 “이번 갈등은 서울대와 고려대, 그리고 기수 간의 갈등이 개입됐다고 해도 무방하다”며 “새로운 것이 아니라 잠재돼 있던 ‘뇌관’이 폭발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진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