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 모으고 사람을 짜고 법도 뛰어넘고…
▲ 2010년 8월 16일 박영준 지식경제부 2차관(왼쪽)이 청와대에서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임명장을 받고 있다. 청와대 제공 |
박영준(朴永俊:1960년 7월 20일~). 경상북도 칠곡에서 태어난 그는 대구의 오성고를 나와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한다. 그의 학창 시절 이야기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누구도 묻지 않았고, 그 스스로 떠벌리지 않았다. 1994년 박영준은 당시 재선이던 이상득 의원(이명박 대통령의 친형)의 보좌관으로 정치권에 입문했다. 당시 박영준이 이 의원에게 발탁된 배경을 알고 있다는 한 지인은 “그는 정세를 똑바로 바라보고, 복잡한 것을 단순화시킬 줄 알았다. 당시 정국과 이 의원의 ‘정치 미래’를 A4 2장에 요약해 면접을 봤고, 이 의원은 그 내용이 ‘깔끔하다’라며 바로 채용했다. 그 쪽(정무 파트로 이해함)으로는 타고 난 재능이 있다”라고 했다. 무뚝뚝하고 저돌적인 스타일. ‘믿을 만한 사람’으로는 손색이 없었던 그는 11년 동안 이 의원을 모셨다. 많은 비밀을 알고 있고, 많은 부분을 공유했다는 의미다.
2005년 박영준은 서울시청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의 정무보좌역이 되고 이후 정무국장을 거친다. 이 시장이 대선을 준비 중이었고 이 의원은 동생에게 ‘정무통’을 ‘파견’해 준 것이다.
박영준은 2006년 8월 이명박의 대선캠프였던 ‘안국포럼’에서 일련번호 AF006이 새겨진 명함을 받는다. AF는 ‘안국포럼’의 이니셜이고, 006은 ‘여섯 번째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가 이 대통령으로부터 얼마나 신임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박영준은 당시 조직 분야를 맡았다. 안국포럼의 조직특보. 그리고 한나라당 대선 중앙선거대책위원회의 네트워크팀장. 소문을 모으고 사람을 짜는 데 특수한 재능이 있었던 박영준은 이미 전국 각 지역의 지식인 단체 170여 곳을 하나로 묶은 ‘선진국민연대’를 조직화해 놓은 터였다.
▲ 2009년 6월 15일 국회에서 열린 당·정·청 고위급 정책협의회(고위당정협의회)에 참석한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오른쪽). 이종현 기자 |
박영준은 이명박 정부의 ‘강부자(강남의 부동산 부자)’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출신)’ 내각과 인사, 한상률 전 국세청장의 그림 로비 의혹, 이상득 의원의 포스코 회장 선임 개입 의혹 등 각종 인사 파문과 권력형 비리 의혹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기 시작한다. 늘 배후로 지목당했고, 국정 농단의 핵심이란 비판을 받는다. 혹자는 ‘이상득을 능가하는 힘’으로까지 일컬었다.
박영준은 이명박 대통령직인수위원회의 당선인 비서실 총괄팀장을 거쳐 청와대 기획조정비서관을 맡아 실질적인 인사권을 쥐게 되는데 첫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 공공기관의 인선을 박영준이 주도하기 시작한다. ‘노무현의 이광재’와 같았다.
박영준은 실제로 선진국민연대 출신과 경북 포항 출신을 중용한다는 의혹을 받는다. 일례로 선진국민연대 이영희 상임의장과 정종환 충남연대 대표가 각각 노동부 장관과 국토해양부 장관에 오르고, 김성이 이봉화 중앙위원이 각각 보건복지부 장관과 차관에 임명된다. 박인제 중앙위원은 국민권익위원회 부위원장에, 장영철 공동의장은 서울시체육회 상임부회장에 취임한다. 영포회 출신(포항 출신 5급 이상 중앙부처 공무원의 모임) 등도 대거 기용되는데 정장식 전 포항시장이 중앙공무원교육원장으로 발탁된 것이 대표적이다.
▲ 자원외교와 SLS그룹 관련 비리 의혹을 받고 있던 박영준 전 지식경제부 차관이 2011년 10월 6일 국회 국정감사에 참석해 의원들의 질타에 대해 해명하고 있다. 일요신문DB |
▲ 지난 5월 2일엔 파이시티 비리 혐의로 대검찰청에 출두했다. 박은숙 기자 |
정 의원은 2008년 언론 인터뷰에서 “청와대엔 전리품 챙기기에 골몰한 사람이 있다. 장·차관 자리, 공기업 임원 자리에 자기 사람을 심는 게 전리품이요, 이권이 되는 것이다” “B 비서관은 이간질과 음해, 모략의 명수다” “청와대 박영준 기획조정비서관이 제일 문제다. 보좌관 한 명이 나라를 망치고 있다. 그가 대통령을 감싸고 있으면서 모든 인사와 국정을 장악하고 있다” 등등을 공식적으로 폭로했다. ‘정두언의 난’으로 회자된 사건이다. 당시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권에 타격을 줄 만한 큰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 박영준의 행보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는 의견이 적잖았는데 정 의원이 총대를 멘 것이다.
그 해 6월 9일 밤이다. 박영준은 이 대통령과 1시간 독대 끝에 청와대에서 짐을 쌌다. 억울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하지만 박영준은 쉽게 죽는 사람이 아니었다. 수염을 길러 야인 생활을 하면서도 ‘정보 라인’은 계속 가동시킨다. 서울 시내 모처에 낸 박영준 사무실에 인사비서관실 담당자들이 드나들며 관련 서류를 전달하고 결재(?)를 받았다는 의혹도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여권 누구도 의혹을 털고 가자는 말을 못했다. 박영준이 무서웠던 것이다. 그러면서 박영준은 2009년 1월 국무총리실 국무차장으로 임명되면서 화려하게 컴백한다. 아프리카 자원외교를 도맡았고, 정부 내 15개 태스크포스를 거느리게 된다. 조직 장악력은 그의 탁월한 능력이었다.
2010년이었다. 개인 블로그에 이명박 대통령 비판 동영상을 퍼다가 올린 인력공급회사 전 대표 김 아무개 씨(당시 56세)가 국무총리실 소속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불법 사찰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민간인 사찰’ 파문이다. 그리고 사건이 확대되면서 국무총리실 ‘박영준 라인’이 주도했다는 의혹이 인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박영준 당시 국무차장의 ‘사조직’이라는 말이 회자됐을 때였다. 사건과 관련된 이인규 공직윤리지원관, 김충곤 팀장, 원충연 행정사무관 등이 모두 박영준 인맥이었다. 당시 공직윤리지원관실은 1국1과7팀으로 40명이 근무했는데 인적 구성이 정확히 공개되지는 않았다.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청와대 민정수석실과 별도로 각종 동향보고서를 작성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보고했다는 의혹도 샀다. 정부 각 조직에 별도의 라인을 가동해 정보를 취합해 박영준이 직보할 때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 권재진 민정수석과 박영준이 갈등을 빚었던 것도 이 ‘사조직’ 문제였다. 직속 책임자인 권태신 국무총리실장에게도 지원관실 업무 관련 내용이 제대로 보고되지 않았다고 하니 ‘수렴청정’한 이가 박영준이라는 설이 사실화된다.
수사권도 없는 공직윤리지원관실이 민간인 김 아무개 씨가 일했던 회사의 회계 자료를 압수수색한 사실만 봐도 ‘초법적인 활동’이 얼마나 자행되었는지 보여준다. 2008년 12월 말 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 소속 감찰반은 한밤중에 외교통상부 4개 부서의 책장과 책상을 뒤져 30분 만에 양주 101병을 찾아내기도 한다. 그런 배경에 꼭 박영준이 등장한 것이다.
박영준은 이후 지식경제부 차관이 된다. 그래서 터진 사건이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업체 CNK인터내셔널의 주가조작 사건이다. 요약하면 이 업체가 카메룬 다이아몬드 매장량을 부풀렸고 이를 박영준이 홍보했으며 업체가 주가를 올려 큰 이익을 남겨 팔았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박영준은 국무총리실 직원들에게 카메룬 다이아몬드 광산 개발업체 CNK인터내셔널의 주식을 사도록 권유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2011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야당 의원들은 CNK가 다이아몬드 개발권 획득 과정에서 박영준의 지원을 받았고, 외교통상부 등 출신 고위 공무원이 주가조작에 연루됐다고 의혹을 제기한다. 민간이 선도하고 정부가 뒷받침한 자원 개발이 아니라, 민간이 기획하고 정부가 홍보한 주가조작의 성공모델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박영준은 ‘왕(王) 차관’으로 불릴 때다. 박영준은 CNK 주식 불공정 거래 연루 의혹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내사를 받은 사실을 스스로 털어놓는다.
하지만 박영준은 당당했다. 국감장에서 이국철 SLS 회장으로부터 일본에서 향응을 제공받았다는 추궁을 받자 “에너지자원 증인으로 나왔다. 이 사건(향응)은 명예훼손 혐의로 민형사상 고소를 한 상태다. 답변하지 않겠다. 입증된 사실이 있느냐? 확인된 사실이 있느냐?”며 오히려 큰소리를 친다. 한나라당 의원 등도 국회법에 따라 보낸 질문 요지는 해외 자원개발 관련 의혹이라며 해외 자원개발 관련 질문만 하라고 박영준을 보호해준다. 박영준이 그만큼 센 사람이었다.
하지만 박영준도 정권 말기가 되니 힘이 빠진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대구 중·남구 새누리당 공천을 신청했지만 낙천하고 무소속으로 출마해 떨어진다. 그로부터 한 달 뒤 박영준은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대규모 복합유통센터 ‘파이시티’ 개발사업 인허가 비리를 수사 중인 대검 중앙수사부로부터 인허가 청탁 명목으로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다. 정권 실세가 부동산 개발에 연루돼 토건족으로부터 돈을 받은 ‘막장 드라마’가 재연되는 순간이었다.
2005년 11월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에 ‘대규모 점포 등 허용’ 자문 안건이 올라왔는데 화물 터미널을 유지하면서 대규모 점포를 지을 수 있도록 도시계획을 변경하는 내용이었다.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퇴임 50일을 앞둔 2006년 5월 이 안건이 결재되고, 5월 11일 도시계획 세부시설 변경 결정이 고시된다. 총사업규모 2조 4000억원 규모로 추정되는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이정배 전 파이시티 대표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2005년 1월 당시 서울시 정무국장이던 박 전 차관을 처음 만난 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들어간 뒤에도 만났다. (브로커) 이동율 씨를 통해 박 전 차관에게 전달해달라며 한 번에 2000만 원, 3000만 원씩 서너 차례 현금을 줬다.
박 전 차관이 공무원들과 만날 때 중간에서 어레인지(조정) 역할을 했다. 누구를 만나야 할 상황이 됐을 때 연결해줬고, 교통 정리하는 역할을 했다”라고 주장한다. 파이시티 사건을 두고 당시 민주당 김진표 원내대표는 “이명박 정권의 핵심 인사들이 자신들이 좋아하는 부패 요리를 놓고 뷔페를 벌인 것”이라고 비판했다. 2011년 9월 한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박영준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명박 대통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언제든 검찰 조사를 받을 수도 있는데, 잘못하면 감방 가는데 이권에 개입하거나 처신을 함부로 했겠느냐? 나는 감방 갈 일은 안 했다.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듯이 내 이마에는 ‘이명박’ 석 자가 딱 적혀 있지 않으냐.”
그의 주장은 거짓으로 밝혀졌다. 감방 갈 일을 한 것이다.
최기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