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통에 따낸 돌 안 넣어 2·3국 연속 규정 위반…커제 폭발 중국 반발 속 변상일 LG배 첫 우승
1월 22일과 23일 서울 성동구 마장로 한국기원에서 열린 변상일 9단과 중국 커제 9단의 제29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 결승3번기 2국과 3국에서 커제 9단이 두 대국 연속 ‘사석’(死石·따낸 돌) 관련 규정을 위반해 반칙패와 기권패를 당했다. 이로써 LG배 우승은 종합전적 2-1로 변상일 9단의 우승이 결정됐다.
#세계대회 결승 초유의 일
프로 대국에서, 그것도 정상급 기사들의 대국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반칙패와 기권패가 세계대회 결승에서 연속으로 발생하며 한국기원은 이틀 내내 뒤숭숭했다. 상황은 이랬다.
이틀 전 열린 1국에서 승리했던 커제는 22일 이어진 2국에서 백번으로 초반 18수 만에 우상귀에서 흑 한 점을 따냈으나, 사석 통에 제대로 넣지 않았다. 그러자 이 상황을 인지한 유재성 심판이 커제에게 경고와 함께 벌점 2집 공제를 선언했다. 이에 커제와 위빈 중국 국가대표팀 감독이 “세계대회에서 이런 사례는 없던 것으로 안다”며 항의했으나, 대국 중단 33분 만에 중국 측이 수긍해 대국이 재개됐다.
그러나 불과 몇 십 수 뒤 커제가 다시 사석 규정을 위반했다. 커제는 백 80수로 다시 우상귀에서 흑 한 점을 따냈지만, 따낸 돌을 또 사석 통에 넣지 않은 채 백 82수를 착점하자 이번에는 변상일이 이의를 제기했다. 상황을 확인한 심판은 커제에게 경고 2회 누적으로 인한 반칙패를 선언했다.
중국은 즉각 다시 이의를 제기했으나 주최 측은 사전에 한국 경기규정을 설명한 점과 영상 판독으로 커제의 사석관리 위반을 확인한 점 등을 들어 결정을 바꾸지 않았다. 메이저 세계기전 결승에서 첫 반칙패가 발생한 것이다.
한국기원은 지난해 11월 규칙 개정을 통해 제4장 벌칙 조항 18조에 따낸 돌을 사석 통에 넣지 않으면 경고와 함께 벌점으로 2집 공제를 결정했고, 조항 19조에는 경고 2회가 누적되면 반칙패가 선언된다고 명시한 바 있다. 이날 판정도 위의 규정을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사석 하나가 1집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선수들은 대국 도중 수시로 상대 사석 수를 확인하고 형세 판단을 한다. 그러나 중국의 바둑 규칙은 우리와 달리 반상의 살아 있는 돌만으로 집수를 계산하기 때문에 사석이 의미가 없다.
따라서 중국 선수들은 평소 사석을 손에 쥐고 대국하거나, 바둑판 근처 아무 곳에 던져 놓는 경우도 있어 경기에 혼돈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이번 경기 규정 개정을 통해 이를 바로 잡으려 했다는 것이 한국기원의 설명이다. 실제 바뀐 규칙에 따라 KB바둑리그에 용병으로 참가 중인 중국의 진위청 8단이 최근 대국에서 사석 규칙 위반으로 벌점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한국기원은 이런 개정 내용을 대회 시작 전 중국 측에 명확하게 알렸으며, 지난해 열린 삼성화재배부터 적용했다고 밝혔다.
#반칙패에 이어 기권패
하지만 일단락된 줄 알았던 사석을 둘러싼 시비는 23일 열린 최종 3국에서 다시 재연돼 2차 충격을 안겼다.
중반까지 이번에는 변상일이 압도적으로 우세한 상황에서 대국이 중단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커제가 149수째에 따낸 돌을 이번에도 사석 통에 넣지 않은 것이다. 뒤늦게 알아차리고 제자리로 옮겼으나 심판이 경고 1회와 함께 벌점 2집 공제를 선언하자 이번에는 커제가 고성과 함께 강력하게 반발했다.
커제는 “제재가 즉각 주어지지 않고 상대가 생각하고 있는 시점에서 심판이 뒤늦게 개입한 것은 상대에게 생각할 시간을 벌어주는 불공정한 처사”라고 항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한 위빈 중국 국가대표 감독은 공정한 경기 진행을 위해 재대국을 제안했지만 한국기원 측에서 거절한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1시 45분경 159수째에서 멈춰진 대국은 2시간 넘게 아무런 상황 설명 없이 중단이 이어졌고, 결국 커제가 4시경 대국장에 나타나 자신의 옷을 챙기며 대국장을 벗어나 상황이 종료됐다.
이후 4시 10분 손근기 심판이 “커제 9단에게 경기 규정에 따른 벌점 사유를 설명했으나, 커제 9단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대국을 포기해 변상일 9단의 기권승을 선언한다”고 밝혀 사석을 둘러싼 두 차례의 얼룩진 해프닝이 마무리됐다.
커제의 기권패로 마무리되긴 했지만 이번 사태는 국내는 물론 세계 바둑계 사상 초유의 일로서 향후 큰 논란이 예상된다.
커제가 판정에 불복해 대국장을 벗어난 것도 문제지만, 한국기원이 세계바둑계를 함께 이끌어가는 파트너인 중국 측에 사전에 충분히 적응할 시간을 제공했는지도 논란이 될 전망이다. 실제 중국 현지에서는 이번 판정을 두고 바둑 커뮤니티와 유튜브 등에서 크게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또 중국바둑협회는 대국이 끝나자 즉각 성명을 내고 중국은 이번 제29회 LG배 결과를 인정할 수 없으며, 3국 다음날로 예정돼 있는 시상식에도 커제 9단은 참석하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특히 커제는 2월 5일 개막 예정인 제1회 쏘팔코사놀 세계최고기사결정전에 주최 측 와일드카드에 지명돼 있어, 이번 결과가 그의 대회 출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
한편 국내랭킹 3위 변상일은 결승시리즈 종합전적 2-1로 LG배 첫 우승과 함께 메이저 세계대회 2회 우승을 기록했다. 변상일은 2023년 7월 14회 춘란배에서 우승하며 메이저 세계대회 첫 우승컵을 들어 올린 바 있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하고 (주)LG가 후원하는 제29회 LG배 조선일보 기왕전의 우승 상금은 3억 원, 준우승 상금은 1억 원이다. 제한 시간은 각자 3시간에 40초 초읽기 5회가 주어졌다.
유경춘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