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15일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의 빙모 빈소에 최 병렬 한나라당 대표(오른쪽)가 조문하고 있다. 국회사진 기자단 | ||
한나라당 한 재선 의원이 최근 빙모상을 당해 급히 귀국한 이회창 전 총재에 대한 최 대표의 발언을 두고 한 말이다.
지난 15일 이 전 총재 빙모의 장례식장을 찾은 최 대표는 ‘이 전 총재 차후 역할론’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이 전 총재가) 당 직함을 갖는 것이나 전국구 1번 배정을 받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이날 최 대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계은퇴 번복 사례까지 들며 이 전 총재에 정계복귀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정가에선 “최 대표가 이 전 총재 복귀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힌 것”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하지만 대표 경선 당시 최 대표는 이 전 총재에 대한 ‘삼고초려’까지 거론하면서 결국 ‘창심’효과를 톡톡히 얻었던 바 있다. 이 때문에 당내 일각에선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 하는 말이 다르다”는 얘기까지 나오는 상태다. 이 전 총재 정계복귀설을 재점화시켰던 장본인인 최 대표가 서둘러 자신이 키운 불씨를 꺼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최 대표가 경선 당시 “총선에 도움이 된다면 ‘삼고초려’라도 할 것”이라며 이 전 총재를 거론했을 때 정가의 여러 인사들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 대표가 못 지킬 약속을 하고 있다”란 비아냥까지 흘러나왔을 정도다.
민정당 시절부터 한나라당 시대에 이르기까지 당내 고위직을 두루 거친 중진 의원들은 최 대표에 대해 “무서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사람”이라 입을 모은다. “독선적이며 지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 사람”이란 평가도 나온다.
그런 탓에 이번 이 전 총재에 대한 발언 배경 역시 최 대표의 ‘자존심’이 작용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한나라당의 한 재선 의원은 “최 대표측이 경선 당시 ‘삼고초려’ 발언 이후 ‘총선 유세장에 이 전 총재가 서 있기만 해도 큰 도움이 될 것’이라 말했지만 실제로 이런 상황을 최 대표가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이 의원은 “유권자들이 최 대표가 아닌 이 전 총재를 보러 유세장에 나와 환호를 보낼 것이라 생각해 보라. 한나라당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도는 올라갈지 몰라도 최 대표의 입지는 줄어들 것이다. 언론도 앞다퉈 ‘이회창 효과’란 식의 제목을 내걸 것이며 결국 최 대표의 그림자는 엷어지게 될 것”이라 덧붙였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도 “이번에 최 대표의 당 운영보다 이 전 총재 복귀 여부에 언론과 민심이 더 크게 쏠리는 것을 보면서 최 대표의 자존심이 많이 상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 같은 정서가 곧 이 전 총재의 복귀 차단 의도를 섞은 발언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이 전 총재의 일시 귀국에 맞물려 번지고 있는 ‘조기귀국설’도 최 대표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개혁파 의원들 5명의 탈당과 대북송금 특검 추진 과정에서 홍사덕 원내총무와의 불협화음이 알려진 탓에 최 대표는 아직 당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는 평을 듣는다.
이런 상황에서 이 전 총재의 출국이 늦어지거나 미국으로 떠났다 조기 귀국할 경우 최 대표로서는 당내 위상 정립에 타격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한 당내 인사는 “이 전 총재가 국내에 계속 머무른다면 이 전 총재 본인의 뜻에 관계없이 반 ‘최틀러’(최 대표의 별명) 세력의 중심에 이 전 총재가 놓일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했다.
현재 이 전 총재의 출국 일정은 따로 잡히지 않은 상태다. 이 전 총재의 한 핵심측근은 “지난 대선 이후 이 전 총재가 서둘러 미국행을 택한 것은 노무현 정부 출범식과 당권 경쟁 속의 ‘창심’ 논란에 대한 불편함 때문이었다”고 밝혔다. 이 측근인사는 “하지만 그때와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면서 이 전 총재의 조기귀국 가능성을 내비쳤다. 이 전 총재 모친 김사순 여사가 92세의 고령으로 최근 노환중이라는 점 역시 이 전 총재 조기귀국설을 부채질하는 요소다.
최근 정대철 민주당 대표가 지난 대선 전에 굿모닝시티 윤창렬 대표로부터 4억여원을 받았다는 검찰측 발표와 맞물려 정치권에서는 대선자금 조성과정에 대한 여야간 공방이 오가는 중이다. 이런 와중에 이 전 총재 빙모 장례식장을 찾은 최 대표는 대선자금 공개 논란에 대해 “검찰이 제대로 규명하지 못하면 대선자금에 대한 국정조사나 특검을 추진할 수도 있다”는 발언을 했다. 이 경우 여론의 압박에 따라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역시 ‘성역’으로 남아 있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전 총재 측근들은 “(이 전 총재는) 돈 문제에 대해 깨끗한 분”이라며 “선거자금은 선대위에서 총괄했을 뿐 이 전 총재와는 무관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대선자금에 대한 철저한 조사가 진행될 경우 유력 대선후보였던 이 전 총재로선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 정치권 인사는 “대선자금 논란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이 전 총재가 국내에 눌러앉으면 한나라당으로서는 상당한 정치적 부담을 떠맡게 되고 이 점은 최 대표측도 잘 알고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이회창-최병렬 ‘갈등설’에 대해 최 대표측은 “그냥 언론에서 그러는 것”이라며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어수선한 장례식장에서 나온 말 몇 마디를 가지고 언론이 부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갈등설이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자 최 대표는 최근 “이 전 총재가 미국에 가기 전에 한 번 만날 것”이라고 밝혔다.
한나라당의 한 중진 의원은 최 대표의 장례식장 발언에 대해 “문상을 갔던 날 최 대표 심기가 불편한 상태여서 말이 좀 심하게 나온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최 대표가 빈소를 찾은 15일 국회 본회의에 상정된 ‘외국인근로자 고용법’이 한나라당 내 이견으로 처리되지 못한 탓에 심기가 어지러웠다는 것이다.
최 대표가 빈소에서 홍사덕 총무의 원내운영을 탓하며 기자들에게 “나 오늘 열 받았어”라고 말할 정도였다는 것. 이날 빈소를 찾기 전 최 대표는 한 일간지 간부들과 저녁식사를 하면서 폭탄주를 몇 잔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이래저래 좋은 말만 하기엔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이날 최 대표는 조문을 마치고 접견실에서 한나라당 인사들과 기자들에 둘러싸여 가볍게 음식을 들었다. 당시 빈소를 찾았던 한 인사는 “최 대표가 내심 이 전 총재가 접견실로 와주길 바란 것 같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은 날이었는데 40분간 기다려도 이 전 총재가 나오지 않자 최 대표 얼굴이 점점 더 붉어졌다”며 “이를 본 한 의원이 조문실로 들어가 ‘중재’를 시도했지만 이 전 총재는 끝내 나오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그런 상황에서 기자들이 이 전 총재 역할론을 물으니 좋은 소리가 나왔겠는가”라고 덧붙였다.
한편 장례식 이후 이 전 총재의 옥인동 자택에는 방문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 전 총재의 특보와 보좌진을 지낸 인사들은 물론이고 양정규 최돈웅 김기배 신경식 하순봉 김영일 김진재 등 상당수 한나라당 의원들이 이미 옥인동을 방문했거나 방문할 예정이다. 경선에서 최 대표에게 석패한 서청원 전 대표 역시 곧 이 전 총재를 찾아갈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경선 이후 최 대표의 회동 제의에도 응답하지 않고 있는 터라 옥인동 방문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장례식장 발언 논란과 관련, 최 대표측은 “경선 당시 총선에서 지원유세 부탁을 할 수도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고 ‘원칙론’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많은 정치권 인사들은 “이 전 총재가 국내에 머물면 머물수록 최 대표가 이 전 총재에 대한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라 전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