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자꾸 빠지는데 구멍은 안 보이고…
▲ 지난 25일 유가족 공대위 회원들이 한국타이어 대전공장 앞에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 ||
최근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의 사돈기업으로 주목받으며 이 후보의 경선 승리 전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는 한국타이어의 이면에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최근 1년 동안 한국타이어 중앙연구소 대전공장 금산공장 소속 직원 8명이 죽어나간 것. 안전사고와 자살 2건을 제외하면 모두 돌연사. 유가족들은 대책위를 만들어 진상조사 등을 촉구하며 회사 측과 대립하고 있다. 이 와중에 <대전일보> 보도로 외부에 알려지면서 파문은 커지고만 있다. 한국타이어에선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지난해 12월 말 대전 유성구 대덕연구단지에 위치한 한국타이어 중앙연구소. 이 연구소 TB개발팀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조 아무개 씨(사망당시 28세)는 회사 회식을 마치고 사택(社宅·유족은 기숙사라고 표현)으로 돌아와 잠자던 중 다음날 새벽 급성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청주에 거주하던 부친 조호영 씨 등 유족들은 급히 대전으로 가서 경황없이 장례를 치른 뒤 정신을 수습하고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이 과정에서 조 씨는 이상한 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지난해 5월부터 1년간 한국타이어 대전·충남지역 공장과 연구소에서 사망자가 8명이나 나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 조 씨는 “산재 자료를 수집할 때 회사에서는 ‘적극 협조해준다’고 해놓고 실제는 비협조적이었다”면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조 씨가 확인한 일련의 사망사건은 지난해 5월 대전공장에서 시작됐다. 대전공장 생산관리팀에서 근무하던 임 아무개 씨(52)가 개인 일을 본 뒤 집 근처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 2개월 뒤인 7월엔 금산공장 설비보전팀의 박 아무개 씨(49)가 공장 내 탈의실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해 11월 금산공장에선 또 한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PCR서브팀 이 아무개 씨(42)가 행사 참석 후 대전의 한 식당에서 쓰러져 역시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것. 12월 초엔 자살사건도 있었다. 대전공장 설비보전팀 김 아무개 씨(42)가 인사이동에 불만을 품고 자택 뒤 야산에서 목을 매 숨진 것. 12월 말엔 앞서 언급한 조 씨가 숨졌다.
올해 들어서도 사망사고는 계속 일어났다. 지난 4월 대전공장 PCR서브팀 박 아무개 씨(37)가 전날 숙직 후 아침에 집에 와서 자다가 오전에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다. 그리고 5월엔 중앙연구소 소속의 조 씨 입사 동기로 RE개발팀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하던 최 아무개 씨(28)가 조 씨와 비슷하게 사택에서 심근경색으로 사망했다. 지난 5월엔 중앙연구소 제품시험팀의 김 아무개 씨(45)가 금산공장을 둘러보던 중 안전사고로 숨졌다.
유족들은 자포자기 상태가 됐다. 지난해 12월과 지난 4월 신랑을 잃은 두 젊은 미망인은 조호영 씨에게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다”고 말했다. 조 씨 아들과 동기로 비슷하게 사망한 최 씨의 부친은 외아들을 잃은 슬픔에 “세상이 허망해 술로 세월을 보내고 있다”고 한탄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한둘이 아닌 것을 알자 ‘한국타이어 유가족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를 만들어 뭉쳤고 조호영 씨를 대표로 활동을 시작했다.
일련의 사망사건에 대해 한국타이어 측은 “돌연사 부분은 국과수 부검 등을 통해 회사 업무와 인과관계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도 원인규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유족들이 필요로 할 경우 최대한 협조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또 건강검진프로그램을 다양화해 직원들 건강을 챙겨나가겠다”고 공식입장을 밝혔다. 한국타이어의 한 관계자는 “사망시기와 장소 등 각 사망사건의 연관성은 전혀 없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아 우리도 안타깝고 답답한 심정이다”라고 보탰다.
이런 회사의 입장에 대해 조호영 씨는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데 과연 누구 건을 어떻게 적극적으로 도왔는지 묻고 싶다. 회사는 말과 행동이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우릴 더욱 화나게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에 대해 회사 측은 “우리가 노력을 하고 있는데 유족들이 보기엔 부족해서 그런 것 같다”고 해명했다.
조 씨는 “회사 측에서는 언론에 보도되고 유가족들이 대전공장 앞에서 시위를 준비하는 등 파문이 커지자 나를 찾아와 ‘노무사 비용을 보전하고 변호사를 선임해줄 수 있다. 가족 중에 한국타이어 입사를 희망하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등의 조건을 내밀었는데 유족 중에 거기 갈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진상규명과 도의적 책임에 따른 적절한 보상, 재발방지 대책 마련 등이다. 말이 아닌 행동을 먼저 보여라”고 촉구하고 있다.
조 씨는 또 “한국타이어의 경쟁업체인 모 회사는 같은 기간 직원이 1명 사망했는데 산재신청도 하지 않고 회사에서 산재 이상의 보상을 해줬다는 얘기를 들었다”면서 한국타이어를 비난하기도 했다.
한편 대전지방노동청은 한국타이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망사건에 대해 “업무와 질병 여부를 떠나 직무스트레스에 따른 심혈관계질환 예방대책에 대해 지도점검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공장 분위기가 침울하고 착잡하다”는 대전공장 관계자의 말처럼 한국타이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하다.
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