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왕벌 ‘로열제리’ 노리는 개미대왕
얼마 전 증권선물거래소 집계에 따르면 특정 기업의 주식을 5% 이상 보유한 개인투자자들은 400여 건에 이른다. 특정 회사 주식을 5% 이상 사들이면 의무적으로 공시를 내도록 한 ‘5% 룰’에 의해 실체가 드러난 인물들. 증권업계에선 이처럼 공개적으로 활동하는 슈퍼개미 외에도 여러 사람의 명의로 주식을 분산 매입해 ‘5% 룰’을 피하고 있는 슈퍼개미들도 여럿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과거 슈퍼개미들은 ‘압구정 미꾸라지’나 ‘일산 가물치’ 등 주로 활동 지역의 이름을 딴 별명으로 통했다. 하지만 요즘은 아예 대놓고 자신의 이름 석 자를 밝히는 경우도 많다. 특히 일부 슈퍼개미들 중에서는 특정 회사의 지분을 5% 이상 사들인 뒤 인수·합병(M&A)을 시도한다면서 주가를 끌어올려 경영권 분쟁을 유발하는 사례도 종종 있다.
국내에서 슈퍼개미의 원조로 불리는 인물은 지난 2004년 일어난 서울식품 경영권 분쟁의 주인공인 경대현 씨 부자. 경 씨 부자는 2004년 2월 서울식품 주식 53만 7580주(10.87%)를 취득하면서 목적을 ‘경영 참여’라고 밝혀 경영권 분쟁을 촉발시켰다.
이로 인해 4000원대에 머물던 서울식품 주가는 경 씨 부자가 손을 댄 지 석 달 만에 무려 20배가량인 8만 원대로 뛰어올랐다. 당시 증권가에선 경 씨 부자가 단기 차익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이들은 각종 언론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서울식품의 경영을 정상화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순수한 의도’임을 강조했다.
그러던 경 씨는 그해 5월부터 9월 말까지 0.99%의 지분만을 남겨두고 보유 주식을 모두 팔아치우며 64억 원에 이르는 엄청난 시세차익을 거뒀다. 이들은 그 뒤에도 한국슈넬제약 등의 지분을 매입할 때도 M&A를 내세워 수억 원대의 시세차익을 올리며 증권가에 이름을 날렸다. 하지만 그들은 주식매매에만 열중해 잇단 소송에 시달렸고 이 과정에서 회사는 만신창이가 됐다. 결국 이들을 따라 주식을 사들인 ‘보통개미’들만 피해를 봤다는 비판을 받아야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런 현상은 극히 이례적인 일에 불과했지만, 요즘 주식시장에서는 특정 회사 주가를 들었다 놨다 하는 슈퍼개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지난해 현대약품 대원산업에 이어 최근 동아에스텍 지분까지 사들이며 ‘큰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는 박성득 씨. 박 씨는 현대약품의 경우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3년 이상 지분을 꾸준히 사들여 1대주주로 올라선 뒤 ‘경영 참여’를 선언해 화제를 뿌렸다. 그가 식당 주방보조를 하며 ‘내공’을 쌓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일약 ‘개미들의 우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최근 손을 댄 기업은 동아에스텍이라는 코스닥 상장업체. 동아에스텍은 지난 1월 22일 박성득 씨가 62만 5000주(5.10%)를 장내매수를 통해 확보했다고 공시했다. 이 공시에 따르면 박 씨는 주식취득 이유를 ‘단순 투자목적’이라고 밝혔으며 지난해 9월부터 이 회사 주식을 사들여왔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마자 동아에스텍 주가는 당연히(?) 상한가로 솟구쳐 올랐다. 이날은 코스피와 코스닥 지수가 동시에 급락했지만 동아에스텍은 전날보다 14.77% 오른 4080원으로 장을 마쳤다. 이처럼 슈퍼개미들은 수십 년간 주식시장을 연구하고 관찰해온 베테랑들이 대부분이다. 요즘은 겁 없는 ‘20대 슈퍼개미’도 잇달아 등장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지난 1월 25일 과거 대우그룹 계열사였던 대우전자부품은 개인투자자 최용건 씨가 52억여 원을 투자해 주식 75만 7400주(6.93%)를 사들였다고 공시했다. 공시의 주인공인 최 씨는 1980년생으로 올해 나이 28세. 아직 20대지만 그는 이미 주식투자를 통해 수십억 원의 현금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공시가 나온 후 “대우전자부품의 경영진 선임 및 해임 등에 대해 경영권을 행사할 예정이며 조만간 주주총회를 소집해 설비투자 목적으로 유상증자도 할 것”이라는 대담한 계획도 밝혔다. 또 “앞으로 지분을 15~20%까지 늘릴 의향이 있다”고도 했다. 이에 대해 대우전자부품 측은 다소 당황한 모습이다. 회사 관계자는 “이번 일에 대해 아직 회사 차원의 공식적인 입장은 없다”고 밝혔다.
최근 게임업체 액토즈소프트 경영참여를 선언한 채상묵 씨는 1981년생으로 앞의 최 씨보다 한 살 어리다. 액토즈소프트는 <미르의 전설>이라는 게임으로 중국 내 ‘게임 한류’의 물꼬를 터 유명해진 기업. 중국 나스닥 상장업체 샨다가 최대주주로 5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하고 있다. 14명의 주주들과 함께 이 회사 지분 6%를 매입한 채 씨는 학창 시절부터 주식투자를 해오다 졸업과 함께 경영컨설팅업체인 ㈜이아를 설립해 대표도 맡고 있다.
채 씨는 이미 2~3년 전부터 액토즈소프트 주식을 매입, 주주총회 때마다 경영에 대한 의견을 적극적으로 개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알려진 뒤 언론을 통해 “게임업체 중에서도 액토즈소프트는 주가가 너무 저평가돼 있다. 실적도 나쁘지 않고 이익잉여금도 많다”면서 “활발히 투자를 하든가, (배당 등) 주주에 대한 보상을 통해 주주 친화적 경영방침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밝히며 ‘공격’을 계속할 뜻을 비쳤다.
슈퍼개미들은 특히 발행 주식수가 적고 주가도 낮은 코스닥 IT업체들을 목표물로 삼는 경우가 많다. 유성철 씨가 137만 73주(8.06%)를 확보해 최대주주로 올라선 태화일렉트론, 홍재성 씨가 임시주총 개최 등을 요구하며 회사 측을 몰아세우고 있는 버추얼텍, 스포츠서울21에 이어 조명환 씨의 다음 ‘먹잇감’이 되고 있는 코스프 등이 이런 사례들이다.
‘홍길동식 행보’로 주목을 끈 슈퍼개미도 있다. 박 아무개 씨와 이 아무개 씨는 2004년 적대적 M&A를 내세워 남한제지 주식을 사들여 주가를 띄운 뒤 팔아넘기는 수법으로 약 54억 원의 시세차익을 거뒀다. 이들은 이듬해 7월 증권거래법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이들은 남한제지 주식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번 돈을 어려운 사람에게 빌려주겠다고 공시, 이메일과 팩스 등으로 사연을 접수받아 3억 6200만원을 송금해 증권가를 떠들썩하게 했다. 이들은 재판 과정에서도 “개인 주주들의 힘을 모아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취지였다”고 주장했지만 실형선고를 면하지는 못했다.
슈퍼개미란
수십억 원이 넘는 거액으로 특정 회사의 주식을 집중적으로 매입해 주가에 영향을 주는 개인을 이르는 은어.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