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색깔 캐릭터 ‘마초’ 안에 동거중
<7번방의 선물>에서 6세 지능의 딸바보 용구 역을 열연한 배우 류승룡. 연합뉴스
서른다섯의 나이에 처음 영화에 출연한 늦깎이 배우 류승룡. 하지만 연극 무대에서 비옥한 토양을 다지며 ‘천생 배우’로 살아온 그가 만개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크린 속에서 류승룡의 존재감을 처음 보여준 영화 <거룩한 계보>의 명대사 “넌 밀어붙여, 난 퍼부어 불랑게”를 빌리자면 요즘 류승룡은 그동안 축적한 내공이 밴 밀어붙이고 퍼붓는 연기로 관객을 녹다운시키고 있다.
# “용구는 바보가 아닙니다.”
류승룡은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 자신이 연기한 용구를 ‘바보’라 부르는 것을 거부한다. 용구는 이 세상 모든 아버지와 똑같이 딸에 대한 지극한 부성애를 간직한 인물이다. 정신적 성장이 남들보다 조금 일찍 멈춘 대신 남들보다 동심이 깊고 길 뿐이다.
용구가 바보가 아니라 어린아이처럼 보이길 원했다는 류승룡은 자신의 삶의 패턴도 용구에 맞췄다. 6세 지능을 가진 용구처럼 생각하려 노력했고 카메라 밖에서도 용구의 행동과 말투를 유지했다. 촬영 현장에 자기 이름 석 자가 새겨진 전용 의자가 비치된 주연 배우지만 류승룡은 등받이도 없는 조그만 낚시 의자에 앉아 류승룡을 이용구로 다듬고 또 매만졌다. 주어진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 캐릭터가 돼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 그가 바로 류승룡이다.
“용구는 누구보다 순수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누가 바보라 부를 수 있을까? 평소에는 류승룡처럼 이야기하다가 촬영이 시작되면 갑자기 용구가 된다는 것이 가증스럽게 보일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7번방의 선물>의 촬영장에서는 항상 용구처럼 행동했다. 용구의 동심이 어색하게 보이지 않게 하려는 노력이었다.”
<7번방의 선물>에서 첫 주연을 맡은 류승룡과 그의 딸 역할을 한 갈소원이 카메라를 통해 연기를 모니터링하고 있다.
관객은 류승룡의 연기에 반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류승룡과 부딪치는 동료들은 그의 사려 깊은 모습에 반한다. 영화 개봉을 앞두고 인터뷰를 위해 만나는 기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자신에 대한 어떤 기사를 썼고,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정확히 기억하고 대화를 건네는 류승룡에게서 사람 냄새가 물씬 난다. 영화 홍보라는 목적을 갖고 만난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대화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진솔한 감정교류가 가능한 이유다. 지난해 <내 아내의 모든 것>이 개봉된 후 돋보이는 연기를 펼친 배우에게 붙이는 ‘신 스틸러(scene stealer)’ 대신 흠잡을 데 없는 메소드 연기로 관객들의 마음을 빼앗는다는 의미에서 ‘심(心) 스틸러’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이를 잊지 않고 있던 류승룡은 <7번방의 선물>의 인터뷰 자리에서 먼저 이야기를 꺼내며 “과분한 표현”이라 자신을 낮췄다.
함께 일하는 스태프를 챙길 줄 알고 동료 배우들의 생일까지 일일이 체크하는 류승룡에겐 사람이 재산이다. 때문에 그는 진심으로 상대방에게 다가가려 노력한다. 류승룡이 한솥밥을 먹고 있는 후배 배우 조은지의 생일을 기억했다가 평소 갖고 싶던 운동화를 선물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많은데 ‘신 스틸러’나 ‘당신만 보인다’ 등의 표현은 사실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좋은 평가를 해주시는 분들께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연기한다. 하지만 이기적이거나 욕심꾸러기가 되고 싶진 않다. 영화를 산에 비유한다면 도드라진 아름드리나무가 되기보다는 산에 어울리는 나무 한 그루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거면 족하다.”
# “고정관념을 깨고 싶었습니다.”
류승룡은 <7번방의 선물>의 크랭크인 전 실제 지적장애인을 만나 많은 시간을 보내며 이야기를 나눴다. 빵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20대 후반의 지적장애인을 만난 후 류승룡은 용구의 밑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류승룡은 허투루 연기하는 법이 없다. 직접 보고 듣고 만지며 체득한 경험을 연기에 싣는다. <최종병기 활> 때는 청나라 정예부대의 수장 쥬신타가 되기 위해 4개월 동안 무려 15번이나 변발했고, 고어가 돼버린 만주어를 완벽히 구사하기 위해 언어뿐만 아니라 만주의 역사까지 공부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장성기를 연기할 때도 몇 줄 되지 않는 외국어 연기를 위해 스페인어와 불어 선생님을 만나 수업을 받았다. 그는 스스로를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의 준비를 마쳤을 때 비로소 카메라 앞에 서는 배우다.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싶었다. 그동안 지능이 어린 나이에 멈춘 사람들을 표현할 때 전형화, 희화화되곤 했다. 코미디 프로그램 등에서 과장되게 표현하는 걸 봤는데 당사자나 가족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실제 지적장애인을 만나 그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단순한 캐릭터가 아닌 진심이 담긴 인물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왼쪽부터 <최종병기 활>, <내 아내의 모든 것>,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
류승룡은 평범함을 비범하게 포장하는 재주가 있다. 같은 캐릭터여도 그가 연기하면 다르다. <7번방의 선물>이 개봉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아이 엠 샘>’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지만 개봉 후 이런 이야기는 쏙 들어갔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장성기도 과거 남성성의 상징처럼 여겨지던 변강쇠나 가루지기 등과는 궤를 달리한다. 지극히 마초적인 이름을 가졌지만 그는 외모를 내세우거나 정력을 과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감성을 자극해 여성의 마음을 정복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성기는 남성보다 여성 관객들이 더욱 환호할 만한 인물이다.
현재 선배 배우 최민식과 영화 <명량:회오리 바다>를 촬영 중인 류승룡. 최민식이 연기하는 이순신에 대항하는 해적 역을 맡았다. <최종병기 활>의 쥬신타와 이미지가 겹칠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었지만 류승룡은 출연을 고집했다. 분명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지점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변신은 배우의 숙명이다. 항상 새로운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의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도 내 안의 다른 모습을 보일 기회라고 생각했다. 연기에 임할 때 한국 영화에서 ‘전무(前無)’한 캐릭터이자 앞으로도 나오지 않을 ‘후무(後無)’한 캐릭터를 만들겠다고 마음먹고 시작한다. 결국은 모두 내 안에 있는 모습 중 일부가 영화 속 캐릭터를 통해 더욱 극대화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 “오래 연기하고 싶습니다.”
류승룡은 불과 3년 사이 ‘3000만 배우’가 됐다. <최종병기 활> <내 아내의 모든 것> <광해, 왕이 된 남자> <7번방의 선물>이 연속으로 ‘대박’이 난 덕이다. 하지만 그는 결코 웃자란 배우가 아니다. 지금의 위치에 서기까지 고단한 삶을 버티며 인고의 시간을 가졌다.
류승룡은 서울예대 졸업 후 충무로 대신 대학로로 향했다. 1998년부터 5년간 <난타>의 1기 멤버로 활동했다. <내 아내의 모든 것>에서 장성기가 보여줬던 현란한 도마질은 이때 류승룡이 갈고 닦은 솜씨다. 뮤지컬과 연극 무대를 전전하던 류승룡의 가능성을 처음 엿본 이는 대학 선배 장진 감독이었다. 장진 감독의 <아는 여자>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이후에도 장진 감독 연출작 <박수칠 때 떠나라>와 <거룩한 계보>에 출연하며 얼굴을 알렸다. 2007년 작 <황진이>에서 비중 있는 조연을 맡아 가능성을 보여준 류승룡은 2011년 <아이들>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충무로를 접수하기 시작해 지금에 이르렀다.
“영화판에서 나는 시작이 늦었다. 나름 만족스러운 배우 인생을 살고 있지만 20대와 30대 초반 나의 필모그래프를 채우는 작품이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때문에 그런 후회가 없도록 쉬지 않고 연기하고 있다. 시작이 늦은 만큼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나? 오랫동안 배우로 사는 거, 그게 나의 꿈이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
<7번방의 선물>로 제목 바뀐 사연 태풍 볼라벤이 ‘원제목’ 날렸다 <7번방의 선물> 포스터. 하지만 지난해 여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볼라벤이 모든 상황으로 바뀌어 놓았다. 당시 전라도 익산에 있는 <7번방의 선물>의 세트장이 두 번이나 무너져 촬영이 지연됐다. 영화 제목에 맞춰 지난해 12월 23일 개봉하려던 계획 역시 수포로 돌아갔다. 12월 23일은 극중 다양한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제목을 고수하려 했지만 자연재해의 힘 앞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연출을 맡은 이환경 감독은 “후반 작업을 서둘러 마치고 예정됐던 시기에 개봉을 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영화의 완성도를 보다 높이기 위해 개봉시기를 연기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제목 변경과 함께 또 하나 궁금해지는 것은 주연 배우로 참여한 박신혜와 정진영의 존재가 개봉 전까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7번방의 선물>의 포스터에도 두 사람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출연진 명단을 통해서만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다. 박신혜의 경우 영화 시사회 후 열리는 기자간담회에도 참석하려 했으나 제작사의 만류도 VIP 시사회에만 참석했다. 이환경 감독은 “이 영화의 핵심은 어린 예승이다. 때문에 성장 전과 성장 후를 미리 밝히면 재미가 덜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며 “영화를 본 후 두 사람의 등장이 관객들에게 또 다른 선물로 다가갔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 |
<7번방 선물> 속 딸 끔찍이 챙기는 아빠 세일러문 가방 선물한 까닭은? <7번방의 선물>을 본 사람들끼리만 통하는 우스갯소리다. 극중 용구가 끔찍이 아끼는 딸 예승에게 세일러문 캐릭터 가방을 사주려 하는 과정에서 모든 사건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촬영 내내 예승 역을 맡은 갈소원을 친딸처럼 보살피며 아낀 류승룡은 영화 촬영을 마친 후 현실에서도 갈소원을 살뜰히 챙기고 있다. 류승룡은 14일 오후 서울 종로구의 한 식당에서 열린 <7번방의 선물> 흥행 기념 식사 자리에서 오는 3월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갈소원을 축하해줬다. 갈소원을 위해 류승룡이 준비한 깜짝 선물은 다름 아닌 세일러문 가방. 세일러문 가방을 받고 좋아하는 갈소원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취재진을 향해 류승룡은 극중 용구 특유의 말투로 “이 가방 때문에 용구 죽었어”라고 너스레를 떨며 분위기를 돋웠다. 게다가 류승룡은 3월 4일 열리는 갈소원의 입학식에도 직접 참석할 예정이다. 지방에서 <명량:회오리 바다>를 촬영하느라 일정이 빡빡하지만 <7번방의 선물>을 통해 가슴으로 낳은 딸의 입학식을 지켜보기 위해 스케줄을 조율 중이다. 류승룡은 “우리 예승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다. 3월 4일 입학식에 시간을 내서 같이 가려고 한다”고 말했다. 안진용 스포츠한국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