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귀공자’ 성공 짧고 실패 길었다
쌍용건설이 9년 만에 또 다시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가면서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이 주목받고 있다. 쌍용건설경영평가위원회는 김석준 회장에게 부실경영 책임을 물어 해임안을 의결, 이를 쌍용건설 측에 전달했다. 고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의 차남인 김석준 회장은 1982년 쌍용건설과 인연을 맺은 이래 30년간 오너로서, 또 전문경영인으로서 쌍용건설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회사가 다시 워크아웃 절차를 밟게 되면서 대한민국 재계에 전무후무한 두 번의 워크아웃을 모두 초래한 오너·전문경영인이 됐다. 재계 6위 그룹 총수에서 두 번의 워크아웃까지, 김석준 회장의 영욕의 세월을 되짚어봤다.
# 김회장 거취 채권단에 일임
쌍용건설이 워크아웃에서 졸업한 지 9년 만에 다시 워크아웃에 돌입했다. 김석준 회장은 거취는 채권단의 손에 맡겨졌다. 연합뉴스
김석준 쌍용건설 회장이 자신에 대한 해임안이 의결되고 회사가 다시 워크아웃 절차에 들어가자 임직원에게 밝힌 소회다. 쌍용건설은 1999년 3월 워크아웃에 돌입, 4년 7개월 만인 2004년 10월 졸업했지만 다시 워크아웃에 들어가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쌍용건설의 워크아웃 재돌입을 지켜보는 건설업계에서는 “그나마 부도를 막은 것이 불행 중 다행”이라는 평가가 적지 않다. 쌍용건설은 완전자본잠식 상태에 빠지면서 상장폐지는 물론 회사의 존속마저 위태로운 지경이었다. 최고경영자(CEO)인 김석준 회장은 쌍용건설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위기의 요인은 여러 가지겠지만 CEO로서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쌍용건설경영평가위원회가 김석준 회장의 해임안을 의결한 이유 중 하나다.
그렇지만 김 회장이 자리를 지킬 것이라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 측이 회장 해임 문제를 채권단에 일임한 상태인 데다 쌍용건설 임직원들의 김석준 회장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 3월 말 있을 정기주주총회에서 해임안이 통과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에서다.
이와 관련해 연이은 매각 실패로 쌍용건설이 위기를 맞은 데 결정적 작용을 한 캠코가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비난을 사고 있기도 하다. 김 회장의 해임안을 의결한 쌍용건설경영평가위원회의 위원장직도 캠코 측 인사가 맡고 있다. 캠코 관계자는 “경영평가에 따른 의결 결과를 전달했을 뿐 김 회장 해임을 주도한 적이 없다”며 “이제는 사실상 쌍용건설에 대해 왈가왈부할 권한도, 근거도 없으며 그럴 입장도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캠코는 김 회장의 거취 문제를 채권단에 일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채권단 측은 일단 김 회장에게 계속 회장직을 수행토록 할 것임을 시사했다. 채권단 고위 관계자는 “워크아웃이 결정 난 마당에 이제 와서 새로운 사람이 온다 한들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며 “김석준 회장의 책임이나 잘잘못을 떠나 대안이 없다”고 말했다.
쌍용건설이 시공한 싱가포르의 랜드마크 마리나 베이 샌즈 호텔. 쌍용건설은 또 다시 워크아웃에 들어가며 ‘해외건설의 명가’라는 명성을 무색케 했다.
고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주의 둘째아들인 김석준 회장은 1953년 4월 9일 대구에서 출생, 서울 대광고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 김성곤 회장과 형 김석원 전 쌍용그룹 회장에 이어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김 회장은 대학을 졸업하기도 전인 1977년 5월 (주)쌍용(현 GS글로벌) 기획조정실에 입사해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1978년 9월 대학을 졸업, 이듬해인 1979년 (주)쌍용 LA·뉴욕지사에서 근무했다.
김 회장이 쌍용건설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것은 1982년 쌍용건설 이사로 국내에 복귀하면서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30년간 김석준 회장은 쌍용건설을 이끌어왔으며 그동안 신분은 오너에서 전문경영인으로 바뀌었다.
고 김성곤 회장의 세 아들인 김석원 전 회장, 김석준 회장, 김석동 전 굿모닝증권(전 쌍용투자증권) 회장은 각자 맡은 분야에서 경영에 힘써왔다. 장남 김석원 전 회장은 그룹의 전반을 책임졌으며 김석준 회장은 건설 쪽을, 김석동 회장은 증권 쪽을 담당했다. 재계 관계자는 “당시 김석원 회장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돼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면서 “두 동생(김석준 회장, 김석동 전 회장)이 김석원 회장의 말에 꼼짝 못했다”고 회고했다. 1945년생인 김석원 전 회장과 두 동생의 나이 차이가 많았던 데다 김 전 회장이 부친의 타계로 만 30세 나이에 그룹 회장에 오른 것도 권한 집중의 큰 요인이었다.
1983년, 형과 마찬가지로 만 30세에 쌍용건설 대표이사 사장에 오른 김석준 회장은 1992년 쌍용건설 회장에 오르며 쌍용건설을 대표하는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개인적으로 쌍용건설 지분도 20%가 넘게 보유하고 있었다. 1994년 쌍용자동차 대표이사 회장, 1995년 쌍용양회공업(주) 대표이사 회장을 거쳐 1995년에는 쌍용그룹 회장 자리에 앉았다.
김석준 회장이 그룹 총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데는 형인 김석원 전 회장이 정계에 진출한 탓이 크다. 당시 김석원 회장의 자녀들은 모두 어렸던 데다 경영수업을 받는 중이었다. 김석원 회장의 자리는 자연스레 총괄부회장이었던 김석준 회장이 이어받았다. 공교롭게도 김석준 회장이 그룹 회장에 오른 후부터 쌍용그룹에 어둠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옛 쌍용그룹 핵심부서 출신 한 인사는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부터 이미 조짐이 보였다”면서 “1997년 9월 쌍용양회 미국공장을 미국 리버사이드시멘트사에 1000억 원에 매각하면서 위기가 본격화했다”고 회고했다. 이후 1997년 10월 쌍용제지 매각, 1998년 9월 쌍용투자증권 매각 등 주요 계열사들이 하나씩 팔렸으며 1999년 11월 쌍용정유 지분이 아람코에 9000억 원에 매각되면서 쌍용그룹은 사실상 해체 수순에 돌입했다.
앞의 쌍용 출신 인사는 “이때부터 직원들은 그룹이 유지되고 있다는 생각을 버리기 시작했다”고 털어놨다. 2000년 쌍용양회가 태평양시멘트에 매각되면서 김석원 전 회장이 잠깐 공동경영을 했으나 채무재조정 과정에서 김 전 회장의 지분이 떨어졌다. 이를 끝으로 재계를 호령하던 쌍용그룹에서 옛 오너 일가의 지분은 거의 없어졌다.
흥미로운 점은 공정거래위원회 자료에 따르면 쌍용그룹은 2001년까지 대기업집단지정현황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2001년 쌍용그룹의 재계순위는 12위(공기업 포함)다. 1997년 6위, 1998년과 99년 연속 7위, 2000년 10위에서 순위가 차츰 내려갔다. 그룹을 정리하는 작업을 진행한 사람은 김석원 전 회장.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김 전 회장은 회사가 급격히 어려워지자 1997년 회장으로 복귀해 그룹을 살리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해체 작업을 진행한 셈이다.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김석준 회장이 쌍용그룹을 위기에 몰아넣은 장본인으로 기억되고 있다.
# 백의종군도 허사…퇴진 압박
쌍용건설 전경.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자동차사업에 대한 김석원 전 회장의 애정은 대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쌍용자동차가 위기를 몰고 오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김석원 전 회장은 자동차의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쌍용그룹 출신 또 다른 인사는 “김석준 회장이 형인 김석원 회장에게 자동차가 그룹 전체에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며 매각을 조언했지만 김석원 회장 뜻이 워낙 완강했다”며 “매각 성사 단계까지 갔지만 무산됐다”고 말했다.
김석원 전 회장의 복귀와 함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김석준 회장은 1999년 3월 쌍용건설이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대표이사로 복귀했다. 본인 지분 24%는 이미 모두 사재출연 형식으로 회사에 털어 넣은 상태였다. 2003년에는 서울 이태원동 자택을 담보로 유상증자에도 참여했다. 현재 김 회장의 자택은 대한주택보증주식회사를 채권자로 59억 6472만 9765원의 가압류가 설정돼 있다.
이 같은 노력에도 쌍용건설은 자금난을 견디지 못해 워크아웃에서 졸업한 지 9년 만에 또 다시 워크아웃에 돌입하는 신세가 됐다. 두 번의 워크아웃이 모두 김석준 회장 때 일인 탓에 누구보다 김 회장 본인이 심란할 듯하다.
쌍용건설의 부실 요인을 외부 환경에서 찾는 사람이 적지 않다. 매각 작업이 5차례나 실패하면서 대외신인도가 떨어졌고 이로 인해 선수금을 받지 못하면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는 것. 매각 시기를 놓친 캠코에 그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형 프로젝트파이낸싱(PF) 사업 추진과 아파트 할인 매각에 따른 손실 탓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캠코 측 의견도 이와 비슷하다.
재계 또 다른 관계자는 “IMF 때 한 번 경험해봤으면서 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했는지 모르겠다”며 “열심히 한 것으로 보이지만, 욕심이 화근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즉 2004년 워크아웃 졸업 후 계속 흑자를 내자 김 회장이 국내 사업을 무리하게 추진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에 쌍용건설 측은 “국내 사업은 김 회장이 벌인 일이 아니라 각자대표 시절 국내 사업 대표가 한 일”이라며 “김 회장에게 책임을 모두 돌리는 것은 억울하다”고 해명했다. 또 “오히려 1조 9000억 원에 달하는 PF 보증사업을 5000억 원대로 줄이고 3100가구에 달하던 미분양을 180가구로 줄이는 등 성과를 냈다”고 덧붙였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그룹 차원이 아닌 단일 건설사로 시공능력 13위에 올라 있다는 것은 평가할 만한 일”이라며 “쌍용건설과 김석준 회장에는 상징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석준 회장의 거취 문제와 함께 쌍용건설의 앞날도 순탄하지만은 않을 듯하다. 비록 워크아웃으로 한숨은 돌렸지만 위기는 여전하다. 무엇보다 워크아웃 기간 동안 추가 지원이 불가피하지만 채권단이 이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의 채권단 고위 관계자는 “추가로 자금을 지원했을 경우 다 회수할 수 있느냐가 문제”라며 “현재로서는 채권단 내에서 회의적인 분위기”라고 전했다. 건설경기가 나아질 조짐이 보이지 않고 쌍용건설의 상황이 최악이라는 증거다. 워크아웃 기간이라도 채권단이 추가 지원을 하지 않을 경우 쌍용건설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이 관계자는 “채권 회수가 어렵다고 판단될 경우 여기서 끝내는 게 낫다는 생각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옛 쌍용그룹의 수많은 계열사 중 옛 오너의 입김과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쌍용건설이 유일하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쌍용그룹 출신 인사들이 쌍용건설과 김석준 회장을 바라보는 시선은 남다르다. 하지만 쌍용건설과 김 회장의 처지는 현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지경이다. 김석준 회장은 회사만 살릴 수 있다면 자신의 거취에 대해서는 어떤 결정도 상관없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김 회장이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그 많던 우량 계열사는 어디로? 한·중·인도 회사로 ‘쌍용차’ 운전자 교체 1997년 말 IMF 외환위기 당시 3조 4000억 원의 부채를 안고 있던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려는 곳은 없었다. 우리나라 대부분 기업이 몸을 잔뜩 움츠리던 때였다. 우여곡절 끝에 1998년 1월 대우자동차가 부채의 절반인 1조 7000억 원을 떠안는 조건으로 인수했고 나머지 반은 쌍용그룹 각 계열사가 떠안았다. 쌍용자동차, 쌍용정유, 쌍용양회, 쌍용제지, 쌍용투자증권, 쌍용건설, 쌍용중공업, 쌍용정보통신, 용평리조트 등 굵직한 회사를 포함해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6~7위에 올라 있던 쌍용그룹은 엄청난 부채와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한순간에 무너져버렸다. 계열사 중 가장 험난한 길을 걸어온 회사는 쌍용자동차다. 김석원 전 회장이 큰 애착을 갖고 있었으며 쌍용그룹이 해체되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된 쌍용자동차는 대우자동차와 중국 상하이차를 거쳐 인도 마인드라그룹이 인수하는 등 ‘요란한’ 세월을 보냈다. 쌍용정유는 당초 주주로 있던 사우디아라비아 국영 석유생산기업 아람코(ARAMCO)가 1999년 11월 나머지 지분을 인수해 S-Oil(에쓰오일)로 이름을 바꾸었다. 쌍용투자증권은 1998년 5월 굿모닝신한증권(현 신한금융투자)에 인수됐다. 쌍용제지는 1997년 한국피앤지가 인수한 후 2006년 3월 소프트뱅크밴처스가 다시 인수했다. 쌍용양회는 일본의 태평양시멘트가 최대주주로 올라 있다. 또 쌍용중공업은 현재 STX그룹의 모태다. 쌍용건설만 아직 주인을 찾지 못한 상태인 데다 옛 오너가 경영하고 있는 유일한 회사다. 쌍용그룹의 옛 계열사들은 지금도 재계에서 내로라하는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비록 그룹은 해체됐지만 지금까지도 ‘쌍용’이라는 이름이 남아 있다는 것에 대해 옛 쌍용그룹 출신 인사들은 뿌듯해하기도 한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