끈질기게 살아나는 ‘좀비바둑’에 당했다
박정환 9단
우승 상금 40만 달러, 준우승은 10만 달러. 제한시간 각 3시간30분 타임아웃제. 초읽기는 없고 35분씩 3회 연장이 가능한데, 1회 연장마다 벌점으로 2집을 내야 한다. 3회 초과면 시간패. 계가 방식은 잉창치 선생이 고안한, ‘전만법(塡滿法)’이라고 부르는 대만 룰. 덤은 8점. 우리 식으로 하면 7집반인 셈.
10대끼리의 대결이라 해서 세계가 주목했던 시리즈였다. 박정환은 1993년생이지만 생일이 8월이니 만으로는 아직 19세. 판팅위는 1996년생이다. 사람들은 “주연이 청소년들이라 패기와 박력은 넘치겠지만, 원숙미는 아무래도 덜할 것, 따라서 내용의 격조는 역대 시리즈에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네 판 모두 충실한 내용이었고, 특히 결승국이 된 4국은 근래 보기 드문 명국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백을 든 박정환은 신축자재, 탄력적이고 폭넓은 안목의 국면운영 솜씨를 보여주었다. 빠르고 대범했으며 화려하고 우아했다. 변의 돌들은 가볍게 버리며 중원을 장악했고, 비틀거리는 흑 대마를 칠종칠금으로 요리하면서 종반까지 필승을 구가했다.
판팅위는 끈기(관전자들은 끈기 정도가 아니라 ‘끈끈이 주걱’이라고 혀를 내둘렀다)와 침착, 타개의 수읽기는 경탄 그 이상이었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하면서도 무너지지 않았고, 처절하게 버티며 활로를 열었으며 마지막 순간에는 묘수 일발로 대역전 드라마를 연출했다. 17세, 만 16세7개월에 불과한 소년의 모습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평소 애늙은이처럼 무심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어기적어기적 팔자걸음을 걷는 것으로 사람들을 웃게 만든다는 판팅위는 이번에 세계대회 첫 출전, 첫 우승으로 중국 최연소 세계대회 우승과 중국 최연소 9단 승단, 두 가지 신기록을 세웠다. 중국기원은 세계대회 우승자에게는 곧장 9단을 인허한다.
<2도> 흑2 때 백이 6의 곳을 잇는 것은 위험하다고 한다. 흑은 A로 단수치고 B의 곳을 끊는다. 백이 걸려드는 그림이란다. 그런데 또 우상귀 백도 흑C로 붙이면 백D, 흑E, 백F로 패. 흑G로 밑바닥에 갖다붙여도 패. 백H로 나갈 때 흑I로 끊고, 백C로 몰 때 흑D로 되모는 것. 같은 패라도 흑으로선 후자가 깨끗하고 실전에서도 판팅위는 <2도> 백7 다음 곧바로 흑G를 결행했다. <2도> 백3에 대해 흑이 <3도> 1로 잡는 것은 과욕이다. 백2-4로 수를 늘인 후 백6 먹여치고 백8로 모는 수가 있다. 다음 흑이 A에 끊으면 백이 6에 되따내 패인데, 백은 B부터가 자체팻감이다. 흑이 덤빌 수 없다.
<4도> 흑은 우상귀 백도 패로 잡았다. 백은 이번에도 우상 일단을 선선히 포기하면서, 흑이 팻감으로 써온 우하 흑를 백들로 잡은 것과 좌상귀 백 를 ◎로 살려오는 것에 만족했다. 이래도 여전히 백 우세.
흑1은 시급한 삭감이고 흑3은 처절한 저항이다. 죽든 살든 나와 봐야 한다. 이 흑돌들이 그냥 백의 수중에 들어가면 지니까. 백6에 백8, 두 개의 눈목자가 학의 날갯짓처럼 우아하다. 검토실이 웃었다. “야아~~ 이건 대가풍이야!!” 게다가 우하쪽에서 백A로 가르고 나가기만 해도 흑은 금방 궤멸할 것처럼 보인다.
<5도> 아래쪽 흑은 일단 대부분 살아갔다. 문제는 중앙이었는데, 함몰할 것 같았지만 고심의 몸부림, 무서운 수읽기로 패를 만들었다. 백1로 패를 따내고 흑2로 팻감을 썼다. 백은 이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판단해 3으로 따내고 흑4를 허락했다. 백5가 일견 정밀한 수 같았다. 백들을 당장 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일단 흑A로 굴복시킨 후 이제 바둑을 마무리한다는 것 같았는데….
<6도> 흑1로 잇게 하고 백2, 4로 잡혔던 돌들을 살리면 중앙 흑 대마는 다시 흑5로 이어가야 한다. 거기서 백6 정도로 지키면 반면으로도 백이 좋다. 이게 박정환과 검토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흑3으로 4에 이을 수는 없다. 백3으로 아래 흑돌들이 크게 들어간다. 백가 정교해 보였던 것은, 이것과 흑1의 교환이 없이 그냥 백2, 4면 흑은 5로 공배를 이어가지 않고 A로 집을 내며 버틸 수도 있다는 것. 백5로 끊어도 흑B부터 죄면 여기서 한 집이 생긴다. 그런데 바로 이 절체절명의 순간, 대국장 안팎의 모두를 경악시킨 흑의 묘수가 작렬한다.
<7도> 흑1도 기민한 선수활용. 여기서부터 백의 그림이 조금 틀려졌거니와 백2-4-6 다음 흑7이 묘수였던 것. 이걸로 중앙 흑 대마는 후수로 이어갈 필요가 없어졌다. 흑은 역모션의 돌팔매 하나로 선수를 잡았고, 우하 쪽 흑9와 좌변 쪽 흑13을 선수하면서 마침내 역전에 성공했던 것.
<8도> 언제든 흑와 백를 교환할 수 있는 한 백1로 끊는 수가 없다. 흑2에서 4가 기다리고 있다. 흑의 역할이 기막히다. 그렇다면 백이 선수로 하변에서 이득을 취하고 좌변을 지키는 수순은 만들기 어려웠다는 것이니, 백은 그 전에 흑 대마를 잡는 것이 총력을 쏟아야 했다는 얘기가 된다.
바둑은 무려 299수에서 끝났다. 판팅위가 반면 11집을 남겼다. 거기에다가 박정환은 벌점 4점, 판팅위는 2점.
이광구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