깐깐한 ‘에프엠’ 군인으론 최곤데…
박근혜 정부 초대 국정원장에 지명된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 남 후보자는 군대 용어로 ‘에프엠’이라 불릴 만큼 원칙주의자로 알려졌다. 사진은 노무현 정부 시절 남재준 육군참모총장 모습. 사진제공=국민일보
군 출신이자 올해 69세인 그의 발탁을 두고 “예상됐던 일”이란 관측과 함께 “국정원장 자리는 뜻밖”이란 평가가 엇갈린다. 남 후보자가 원장 후보군에 거론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국정원 출신인 이병기·민병환 전 차장의 기용이 점쳐졌었다. 박근혜 정부 인수위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남재준 전 총장이 오랜 기간 박근혜 캠프에서 안보 관련 조언을 해온 군 출신 인사그룹의 맏형이란 점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가 마지막 남은 외교안보 라인의 요직을 차지한 건 당연하다고 여길 것”이라고 말했다.
남재준 전 총장의 국정원장 발탁 배경을 짚어보려면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를 그만둔 직후, 2007년 대선 경선을 앞두고 있던 시점으로 돌아가 봐야 한다. 그해 6월 5일 박근혜 대통령은 자신의 캠프 사무실에서 국방안보 특보단과 자문단을 발표했다. 현충일을 하루 앞두고 국방안보의 중요성을 가장 잘 부각시킬 수 있는 시점을 택한 것이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국방안보는 우리가 딛고 서 있는 땅과 같습니다. 안보가 튼튼하지 않다면 세계가 놀란 우리나라 발전도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자신의 캠프에 동참해준 예비역 장성들의 손을 일일이 잡았다. 그 자리에 단장 격으로 자리한 사람이 바로 남재준 후보자였다. 그런 그를 박 대통령은 잊지 않았다.
남재준 국정원장 후보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돌직구남’으로 통한다. 원칙주의자로서 규정과 규율을 중시한다. 여기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상대가 누구든지 그대로 직구를 날려 버린다. 노무현 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에 임명된 그는 청와대 핵심 참모들과 크고 작은 충돌을 벌였다.
노 전 대통령이 별장인 청남대를 국민들에게 돌려준 뒤 마땅한 휴식공간이 없자 청와대 참모들이 계룡대의 육군참모총장 공관을 쓰겠다면서 내놓으라는 요구를 했지만 그는 거절했다. 당연히 껄끄러운 관계가 됐고 그에 대한 나쁜 보고서들이 올라갔지만 버텼다. 노무현 정부 청와대와 정면으로 부딪친 건 군 검찰을 국방부 산하로 옮기려던 군 사법개혁안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면서다. 당시 그는 회의석상에서 “군 법무관(검찰)이 지휘관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발언했다. 이 언급이 “고려시대 무신 반란사건(정중부의 난)은 무인들을 무시하고 문인들을 우대한 결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지면서 ‘무신의 난’을 언급한 것으로 비쳐 엄청난 파장이 일었다.
장군 진급인사를 둘러싼 잡음으로도 청와대와 상당한 갈등을 빚었다는 게 군 관계자의 말이다. 한 관계자는 “당시 남 총장은 갈등의 원인이 정권 실세이던 386들의 군 흔들기로 인식했었던 것 같다”며 “임기 중 사표를 냈지만 반려돼 2년 임기를 다 마쳤어도 마음고생은 심했다”고 전했다. 청와대와의 갈등 사례들은 남 후보자가 타고난 ‘무골(武骨)’이란 점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원칙주의자로서의 그를 잘 보여주는 건 ‘애국가’에 얽힌 이야기다. 그는 부대 지휘관 시절 행사 때마다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르도록 하는 걸로 유명했다. 부하들과 회식 후 마무리로 애국가를 부르며 눈물을 흘린 일화도 있다. 군대에서 사용하는 표현을 빌리면 ‘에프엠(FM, 야전교범을 의미하는 Field Manual의 약자로 원칙이나 규정대로만 한다는 의미)’이었다. 그는 육사 시절 생도들이 지켜야 하는 직각보행을 야간에도 어기지 않았다고 한다. 일반인으로 말하면 심야시간 아무도 없는 길거리에서 신호를 지키는 유형이란 얘기다. 술을 잘 마시지 못했지만 꼭 마셔야 할 자리에선 반잔을 채워 한 번에 털어 넣곤 했다고 측근들은 기억한다.
지난 2월 4일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인수위 외교 통일 국방분과 김장수 간사에게 북핵관련 특별보고를 받고 있다. 오른쪽은 지난해 10월 16일 박근혜 대통령 후보가 남재준 전 육군참모총장을 국방안보특보로 임명하는 모습. 일요신문 DB
국정원장 후보자 청문회를 위해 신고한 재산 내역을 두고 일부에서는 부동산 투기 의혹을 제기했다. 참모총장에 재직 중인 2004년 11월 경춘고속도로 설악인터체인지에서 20분가량 떨어진 강원도 홍천군에 밭 510㎡(약 155평)를 부인 명의로 매입한 것으로 나타난 때문이다. 실거래가 기준으로 3080만 원선이었던 이 땅은 8년 뒤인 지금 6200만 원선 정도 호가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남 전 총장의 국정원장 임명으로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을 진용이 모두 갖춰졌다. 크게 보면 군 출신의 약진과 견제·균형의 ‘투톱’ 시스템이란 특징이 드러난다. 국가안전보장회의 핵심멤버로서 이른바 ‘빅6(안보실장, 국정원장, 외교·국방·통일 장관, 외교안보수석)’로 불리는 외교안보 요직 중 절반인 세 자리가 군 출신이다. 김장수(육사 27기) 국가안보실장 내정자와 남재준(육사 25기) 국정원장 후보자, 김병관(육사 28기) 국방장관 후보자는 모두 육군사관학교 선후배 사이다.
세 사람 모두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을 지내 미국과의 군사동맹을 최일선에서 체험했한 점을 박 대통령이 눈여겨 본 흔적도 드러난다. ‘빅6’에 청와대 국가안보실과 외교안보수석실의 비서관급까지 포함한 12명의 멤버를 놓고 봐도 절반인 6명이 육사 출신 군 인사다. 청와대 박흥렬 경호실장도 군(육사 28기) 출신이다 보니 “군 인맥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이는 북한의 3차 핵 실험이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12월 장거리 로켓 발사와 지난달 12일의 3차 핵 실험 등 북한의 도발 국면에 박 대통령의 마음이 군 쪽으로 움직였다는 얘기다.
박 대통령이 막판에 남재준 국정원장 카드를 선택함으로써 외교안보 라인의 역학관계도 변동이 생겼다는 평가가 나온다. 인수위 간사를 맡아 일찌감치 박근혜 정부의 권력 지형도의 중원을 차지한 김장수 외교안보실장 내정자의 독주체제가 될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남재준 후보자의 등장으로 사정이 달라졌다. 김 실장으로선 육사 2년 선배인 데다 캠프 시절부터 박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온 남 원장 후보자를 무시할 수 없다는 점에서다. 청와대와 국정원이란 두 권력기관의 책임자를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유지하도록 투톱 시스템을 박 대통령이 갖춘 것이란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두 사람이 어떻게 호흡을 맞춰 나갈지다. 남재준 후보자의 경우 원리원칙을 중시하는 모습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평가가 대체적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지나치게 깐깐한 성격 때문에 대인관계에 문제가 노출되는 경우가 있다는 지적을 한다. 또 어떤 사안을 크게 보는 눈이 부족하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관계자는 “남 후보자에 대해 ‘육사 3학년생도’ 같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배경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군 출신으로서 대북정보는 물론 해외·경제 정보까지 챙겨야 하는 선진 정보기관의 수장으로서의 능력이 검증되지 않았다는 목소리도 있다.
경력이나 선후배 관계로 볼 때 남 후보자가 김장수 안보실장 내정자보다 한 수 위인 건 분명하다. 하지만 권력의 지근거리인 청와대에 근무하는 김장수 내정자가 더 큰 힘을 발휘할 공산이 크다. 한 관계자는 “국정원장이 아무리 막강한 권한과 대통령 독대 정보보고 같은 채널이 있다고 하지만 청와대에 상주하며 보좌하는 안보실장을 넘어서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의 ‘귀’를 잡고 있는 참모가 실세라는 얘기다.
취임 초부터 밀어 닥친 북핵 위기국면도 외교안보 라인의 조율과 호흡에 변수로 작용할 공산이 크다. 북한은 대선 1주일 전인 지난해 12월 12일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감행했다. 당선과 동시에 박 대통령은 한반도 상황의 안정적 관리라는 숙제를 떠안았다. 북핵 국면도 심상치 않다. 북한은 6일 <로동신문>을 통해 핵 타격으로 서울과 워싱턴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위협하는 등 긴장 수위를 한껏 끌어 올리고 있다.
북한은 지난 1994년 3월 특사교환을 위한 판문점 접촉 때도 박영수 북측 단장이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당시 북한은 재래식 무기로만 무장된 상태였다. 그렇지만 이번엔 핵 공격까지 시사하면서 ‘서울 불바다’를 언급했다. 북핵 위협이 실체로 다가온 것이다. 이에 대응해 우리 군도 도발해오는 북한의 사단 또는 군단 지휘부까지 군사적으로 응징하겠다고 밝히는 등 남북 간 치열한 대치국면이 형성되고 있다.
북한의 3차 핵 실험으로 북핵이 우리 안보에 대한 실체적 위협으로 다가오자 북한 비핵화 전략이 실패한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특히 지난 20년간 역대 대통령들의 북핵에 대한 인식이 안이했거나 전략적 대응이 부재했다는 비판도 쏟아진다. 새로운 전략과 해법이 박 대통령에게 숙제로 떨어졌다. 박근혜 정부의 외교안보 라인이 출범과 동시에 만만치 않은 난제를 만난 것이다. ‘돌직구남’ 남재준 후보자가 이끌 국정원이 어떤 변화를 겪게 될지 내곡동 쪽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영종 중앙일보 기자 yjlee@joongang.co.kr
국정원장의 위상은? 의전은 ‘총리급’ 카드는 ‘무한도’ 국가정보원은 보통 ‘내곡동’이란 은어로 불린다. 국정원 요원들은 물론 정부 당국자나 전문가, 대북정보 관계자들도 이렇게 언급하는 경우가 많다. 국정원이란 약칭이 있지만 왠지 입에 올리기 부담스러운 까닭에서다. 대신 서울 헌인릉 옆에 자리한 국정원의 행정지명을 따 대명사처럼 일컫고 있는 것이다. 과거 중앙정보부 시절 ‘남산’이나 ‘이문동’으로 불리던 것과 비교하면 한결 부드러워진 이미지가 느껴진다.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선글라스 낀 요원과 고문이나 인권침해 같은 부정적 요소가 사라진 때문이기도 하다. 국정원의 총책임자인 국정원장도 마찬가지다. 원장이란 딱딱한 호칭 대신 ‘회장’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원장이란 직함을 직접적으로 거론하는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요원들은 회장이란 표현을 애용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 새로운 표현이 등장했다. ‘내곡동장’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 새 국정원장 하마평이 오르내릴 때마다 정부 안팎에서는 ‘내곡동장은 누가 되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동장’으로까지 불리게 된 걸 두고는 권위주의 시대와 달리 국가정보기관으로서의 절대 위상이 상당히 약화된 상황이 반영된 것이란 분석도 있다. 하지만 국민의 정보기관으로서 친밀도가 그만큼 높아진 때문이란 반론도 만만치 않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과거와는 상황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국정원장이란 자리는 한마디로 ‘끝내주는’ 관직이다. 우선 대통령의 절대 신임이 있어야 하는 자리다. 또 대통령과의 독대 보고 등 정보를 통해 교감해야 하는 기회가 주기적으로 마련된다. 원장을 절대적으로 받드는 조직문화에 경호·의전 등이 장관은 물론 총리에 견줘도 부럽지 않을 정도다. 그의 행차 때는 경호를 위해 동일한 모델의 에쿠스 승용차 3대가 운행된다. 어디에 원장이 탔는지는 알 수 없다. 사실상 한도가 없는 신용카드를 쓸 수 있고, 엄청난 금액의 정보비를 현금으로 쓸 수 있다. 한때 논란이 됐던 국정원 수표도 쓴다. 정·관계 고위 인사들이 정보기관장과의 만남을 위해 줄을 선다. 자신에 대한 온갖 정보를 꿰고 있을 국정원장에 대해서는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은밀한 국정원의 파일이나 정보보고서에 특정 인사의 약점과 행적이 낱낱이 기록돼 있을 것이란 점에서다. 국내 정치정보는 물론 대북·해외 정보와 경제동향 자료를 한손에 쥐고 있는 건 물론이다. 그야말로 대한민국 국가정보를 장악한 파워맨이다. 이영종 중앙일보 기자 yjlee@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