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하산 불발 후 칼바람 쌩쌩
▲ 지난 5월 14일 압수수색 진행 중인 서울 증권선물거래소 출입문. 오른쪽은 이정환 이사장. 연합뉴스 | ||
지난 14일 오전 9시 10분, 서울 여의도 한국증권선물거래소(KRX) 서울 사옥에 5명가량의 검찰 직원들이 들어섰다. 이들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시킨 뒤 곧바로 20층으로 올라갔다. 20층은 이정환 KRX 이사장 집무실과 각 본부장 사무실 등 임원실이 있는 곳. 검찰 직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 이정환 이사장이 굳은 표정으로 수사관들을 맞았다. 이 이사장은 압수수색이 있기 사흘 전인 11일 런던 등에서 글로벌 IR행사에 참석해 한국주식시장을 알리는 일정을 진행하기 위해 외국에 나갔다가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는 소식을 듣고 출국 이틀 만에 급거 귀국한 상태였다.
수사관들은 잠을 제대로 못 잔 듯 충혈된 눈으로 자신들을 맞는 이 이사장에게 영장을 제시한 뒤 별다른 대화 없이 곧바로 이 이사장 방에 놓여 있는 컴퓨터를 장악하고는 각종 파일들을 복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20층에 위치한 각 본부장들의 방에서도 같은 방식의 압수수색을 진행해 나갔다.
같은 시각 부산 KRX 본사. 주식시장이 문을 연 지 10여 분이 지난 즈음 갑자기 검찰 직원들이 들이닥쳤다. 20여 명에 이르는 검찰 직원들은 영장을 제시한 뒤 곧바로 경영지원본부로 향했다. 이들은 기획·인사·총무·IT·홍보 관련 부서 등의 자료를 압수한 뒤 대기하고 있던 차량에 옮겨 싣기 시작했다.
한국 주식시장의 심장부이자 상징인 KRX가 검찰의 압수수색 대상이 된 것은 1956년 KRX가 설립된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사관들은 2시간여 뒤인 오전 11시가 돼서야 압수수색을 마쳤다. 그사이 서울과 부산의 KRX 사옥에는 소식을 접하고 몰려든 언론들로 인해 아수라장이 연출되고 있는 상태였다. 도대체 KRX는 무슨 ‘대형 비리’를 저질렀기에 이처럼 전격적이고 광범위한 초유의 압수수색을 당하게 된 것일까.
우선 공식적인 검찰의 발표는 이렇다.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세조사1부는 “증권선물거래소는 전산시스템을 납품하는 자회사와 수의계약을 맺고 이를 납품받는 과정에 특혜를 주고 리베이트를 받았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며 “정보기술(IT) 설비를 납품받는 과정에 납품가격을 부풀리는 수법으로 리베이트를 받는 관행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검찰은 또 KRX 전·현직 임원들이 기업의 상장 및 퇴출업체 심사 과정에 금품을 받았는지도 조사할 방침이며 KRX가 관련 규정을 어긴 채 1조 원대의 기금 중 수백억 원을 불법으로 관련 금융상품에 투자한 경위도 파악 중이다. 여기에 거래소가 2006년 초부터 1년 9개월간 10억 5000만 원의 경비를 골프장 및 유흥주점에서 사용한 혐의에 대한 구체적인 내역도 수사하고 있다.
검찰 발표대로라면 KRX는 가히 ‘비리백화점’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다양한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 특히 과다한 접대비에 관해서는 이미 얼마 전 금융감독원이 “2006∼2007년 2년간 업무추진비와 정보수집비가 다른 항목에 비해 지나치게 많았으며 특히 2006년 초부터 지난해 9월까지 1년 9개월간 10억 5000만 원을 골프접대비로 지출했다”고 밝힌 바 있어 혐의를 벗기가 쉽지 않을 전망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에는 KRX 임직원들의 평균 연봉이 지난해 1억 1000만 원을 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국민정서법’에도 걸려 있는 상황.
흥미로운 대목은 이처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을 법한 상황임에도 당사자인 KRX 측은 물론 증권가와 일부 시민단체에서조차 이번 압수수색을 놓고 ‘표적수사’라는 의혹을 제기하며 검찰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이 의문을 제기하는 배경은 이렇다. 지난 3월 KRX는 이영탁 전임 이사장 후임자를 공모 방식으로 선임했다. 당시 이사장 후보에는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가 출사표를 내 유력한 후보로 하마평에 오르고 있던 상황이었다. 증권가에는 청와대가 이 인사를 신임 이사장에 앉히기로 작심했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그런데 ‘눈치 없는’ 이사장 후보추천위원회는 예상을 뒤엎고 이 인사를 서류심사에서 탈락시키고 당시 경영본부장이었던 이정환 이사장을 선출했다. 이때부터 KRX는 물론 이정환 이사장도 정부에 ‘찍혔다’는 것이 증권가의 정설이다.
실제로 검찰은 KRX 압수수색 관련 브리핑에서 “예산집행 및 자산운용과 관련된 배임 부분이 있는지 확인키 위해 압수수색했다”고 밝혔다. 예산집행과 자산운용은 상당부분 경영지원본부에서 업무를 관장하는 분야로, 이정환 이사장이 본부장을 맡았던 부서. 다분히 의혹을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정황인 셈이다.
당사자인 이 이사장 역시 불편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그는 압수수색이 있던 날 사내게시판에 ‘단단하고 저력 있는 거래소’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수사 결과에 따라 잘못된 점이 있었다면 겸허히 수용하면 되지만 지금의 여러 움직임들이 단지 거래소를 흔들기 위한 것이라면, 이를 통해 다른 무언가를 얻으려는 숨겨진 의도가 있다면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며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검찰의 압수수색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반발도 쏟아지고 있다. 지난 15일 KRX 본사가 있는 부산지역 시민단체들은 성명서를 내고 “이번 검찰 수사가 낙하산 인사에 실패한 것에 대한 표적수사라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며 철회를 요구했다.
이쯤 되자 증권가의 관심은 이제 ‘이정환 이사장이 얼마나 버틸까’ 쪽으로 모아지고 있다. 일단 그는 스스로 물러날 마음이 별로 없는 듯하다. 이 이사장이 “(자신은) 공모를 통해, 그것도 현 정부 들어 공정하고 투명하게, 정상적인 절차를 통해 주주총회에서 선임됐다”며 “새롭게 구성된 제2기 경영진도 최상이라고 자부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황이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갈지는 미지수다. 일각에서는 이미 ‘2차 압수수색’에 관한 소문이 구체적으로 떠돌고 있다. 과연 이 이사장이 향후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주목된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