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몸으로 뛰어온 사람, 안철수에 꿀릴 게 없다”
김지선 예비후보가 3월 21일 노원구 마들주민회 자연터 개소식에 참석해 주민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오늘 오전, 출정식이 있었다.
▲그렇다. 내 인생에 이게 웬일인가 싶을 정도다. 사실 아직도 내가 선거판에 뛰어들었는지, 실감이 잘 안 난다. 내 사진이 저기(선거 사무실 벽면)에 걸린 것도 참 이상하다(웃음).
―이번 재보선은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나.
▲당연히 (남편 노회찬 진보정의당 대표의) X파일 판결로 인해 무너진 정의를 다시금 올바른 자리로 되찾게 하는 것이다. 지난 총선 당시 상계동 주민들 상당수는 노 대표가 유죄판결을 받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럼에도 노 대표에게 57%의 지지를 보내줬다. 또 현직 국회의원 159명이 노 대표 재상고심 판결 연기 탄원서까지 제출하지 않았나. 법원은 그 자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번 선거는 국민적 심판이다. 정의가 세워지느냐 마느냐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어찌됐건 정치에 뛰어든 건 큰 결심이다. 쉽지 않았을 텐데.
▲지난 2월 14일, 노 대표가 유죄판결을 받았을 때부터 불안했다. 40년 동안 노동·여성계에서 운동을 해온 나는 나름대로 정치적 판단이 빠른 사람이다. 백기완 전 대통령 후보 시절에는 직접 옆에서 선거 지원을 하기도 했다. 판결 직후 ‘보궐선거 들어가겠구나, 혹시 당이나 남편이 나보고 선거에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지?’ 같은 생각이 들더라. 사실 그 전에도 정치적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그 때마다 정치는 내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해 거절해 왔다. 이번에는 무엇보다 남편의 자리를 물려받아 나가는 것 자체가 부담이었다. 그런데 당 최고위원회에서 계속 제안이 오더라. 많은 시민사회 여성들, 노동자들과 의논했다. 주변에서도 ‘나가지 말라’고 붙잡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결국 어려운 결정을 했다.
―노 대표의 직접적인 권유는 없었나.
▲그 사람은 내게 그런 말 직접 못한다. 원래 생활 면에서는 서로 터치 안하고 따로따로 지냈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참 강한 사람이다.
―현실적으로 ‘노회찬 대리인, 지역구 세습’이라는 오명은 벗기 힘들 것 같다.
▲저 사진 봐도 알지 않나(그는 웃으며 사무실 벽면의 노 대표와 함께 찍은 사진을 가리켰다). 그런 이미지가 있긴 하지만, 뭐 거부할 생각도 없다. 어찌됐건 노회찬이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었고 나 역시 기본적으로 그것을 계승해야 한다는 생각이니까. 또 그의 삶이 내 삶과 무관하지도 않고. 하지만 결코 세습은 아니다.
―계승과 세습은 다르다?
▲그 이전에도 남편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정계에 진출하는 여성 의원들이 꽤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경우였다. 그것은 세습이었다. 난 분명 그들과는 다르다. 솔직히 우리 당에서 안철수 후보와 싸워 이기기가 말처럼 쉽나. 이런 부담스런 자리에 누가 나서고 싶겠나. 난 이런 어려운 싸움에 나선 것이다. 어찌 보면 희생이다. 이를 세습으로 바라보면 문제가 있다.
―노 대표와의 차별성도 중요할 것은 같은데.
▲기본적으로 노 대표가 내세웠던 정치를 계승하겠지만, 김지선만의 정치로 그것을 배가시킬 것이다. 내가 노회찬보다 더 잘할 수 있다. 내가 노동계에서는 노회찬, 심상정보다도 한참 선배다. 수배도 먼저 당했고, 감옥도 먼저 갔다 왔다. 단체를 조직하고 창립한 경험도 내가 훨씬 많다. 노 대표가 내놓은 정책 중에는 솔직히 내가 내놓은 것도 많다.
―노회찬보다 잘할 수 있다?
▲물론 노 대표도 서민 밀착형 정책을 지향했지만, 좀 더 큰 것을 바라봤다. 나는 그것보다 더 세세하게 생활 속에서 주민들과 같이 하면서 의제를 개발하고 풀어나가는 능력이 있다. 40년 동안 시민사회에서 그런 일만 해왔다. 그런 생활 정치 면에서는 내가 노 대표보다 낫지 않겠나. 예를 들어 내가 생각하는 공약 중에는 ‘아파트 내 지역공동체 현실화’가 있다.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증축해 노인과 아이들의 학습·놀이 공간을 확보하고 여기에 실업자들이 참여해 이들을 돌보게끔 하는 구상을 정책화시키는 것이다.
―안철수 후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사실 몇몇 비공개 여론조사에서 안 후보가 출마하지 않을 경우, 김 후보의 당선 가능성이 높게 나왔는데.
▲‘새정치’ 얘기하셨던 분이 설마 이곳에 출마할까, 생각했다. 물론 처음에는 섭섭했다. 하지만 내가 안 후보에게 나오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 이제 아름다운 경쟁을 해야 하지 않겠나. 솔직히 내가 출마를 결심하게 된 데에는 안 후보 영향이 컸다. 역으로 보자면 내 결단에 도움이 됐다. 그 분이 나온다고 하니까, 출마 쪽으로 마음이 움직였다.
―본인이 안 후보와 비교해 경쟁력이 있다고 하는 부분은?
▲내가 뭐가 꿀리나. 물론 안 후보는 혁신 기업도 운영하시고, 대권 문턱까지 갔던 사람이다. 하지만 난 그 분과 전혀 다른 길을 걸어왔다. 열아홉에 노동 현실 극복을 위해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20년 동안 노동계에서 두 차례 구속, 수배를 당했다. 그렇게 노동자의 권리 찾기, 탄압문제 해결을 위해 뛰었다. 그 후 20년은 여성운동에 뛰어들었다. 안 후보도 훌륭하지만, 난 온몸으로 뛰어온 사람이다. 또 무엇보다 난 노원에서 7년 살았다. 지역 파악도 안 후보보다 훨씬 낫다.
―민주통합당에서는 결국 서울 노원병 공천을 포기했는데.
▲민주통합당에서는 얼마나 고민을 많이 했겠나. 특히 이동섭 예비후보는 20년 넘게 지역에 살면서 열심히 뛰어온 분이다. 내가 잘 안다. 그 분께는 정말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무겁게 받아들이겠다. 원래 이 지역구에서 민주당과는 정책적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민주당이 이루고자 했던 뜻도 받아 안고 가겠다.
―야권 단일화 문제는.
▲개인적으로는 완주 의지가 강하다. 그 부분은 상황에 따라 당이 판단할 것이다. 당의 결정에 따르겠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김지선은 누구 여의도광장서 “노동3권 보장” 외쳐 옥살이 인터뷰를 하는 모습. 최준필 기자 1970년대 중반, 열아홉 되던 해 김 후보는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전태일 열사의 분신 이후다. 다소나마 노동 환경이 개선되기 시작한 시점이었지만, 지방의 상황은 그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삼원섬유, 동일방직 등에서 노조 간부를 지낸 김 후보는 1978년 ‘부활절새벽예배사건’으로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당시 이 사건은 김 후보를 포함한 여성운동가 5명이 사전에 모의·계획하에 여의도 광장 예배 설교 강단에 올라가 CBS 마이크를 잡고 “동일방직 문제 해결하라”, “노동3권 보장하라”고 외쳤던 사건이었다. 김 후보는 그 일로 처음 구속돼 6개월 동안 옥살이를 했다. 노 대표와 결혼 후 서울로 둥지를 옮긴 김 후보는 1990년대 들어 여성인권운동을 시작했다. ‘인천 여성의 전화’ 설립을 주도했던 그는 서울 강서·양천 지역에서도 여성의 전화를 개설하고 이 지역 가정폭력상담소장을 역임했다. 남편의 지역구를 따라 2008년 서울 상계동으로 옮긴 김 후보는 최근까지 마들주민회 등 지역 풀뿌리 조직에 참여하며 지역운동을 펼쳐왔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
김-노 연상연하 러브스토리 옥바라지 하느라 ‘무자식’ 노회찬 대표는 두 살 위인 김 예비후보에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구애했다고 한다. 이종현 기자 그들이 처음 만난 건 1987년 겨울, 인천에서였다. 김 후보는 당시만 해도 인천 노동운동의 대모로 통할 만큼 노동계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이었다. 노 대표는 선배를 통해 소개 받은 김 후보를 보고 첫눈에 반해 적극적으로 구애, 시쳇말로 ‘대시’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 후보는 노 대표의 고백에 “결혼할 생각이 없다”며 퇴짜를 놨다. 그 뒤 두 사람은 길이 엇갈렸다고 한다. 그렇게 1년이 흐른 뒤, 1년 전 두 사람을 이어줬던 선배가 총선에 출마하게 됐는데, 두 사람은 바로 그 사무실에서 재회한다. 어느 날, 두 사람은 선거운동이 끝나고 밤늦게 가로등 아래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노 대표의 작전(?)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날 두 사람은 막차를 놓치게 된다. 노 대표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 날 김 후보가 노 대표에게로 ‘귀순’하게 된 것. 첫차가 다닐 때까지 서로를 알아간 두 사람은 동인천역에서 무작정 15번 시내버스 첫차를 탔고, 만수동 종점까지 함께했다, 그리고 그해 바로 결혼에 골인하며 신접살림을 차리게 된다. 두 사람의 인연은 결국 그날 놓쳐 버린 ‘막차’에서 시작된 셈이다. 당시 김 후보는 서른다섯. 무척 늦은 결혼인 데다 노 대표는 수배상태였다. 결국 결혼 10개월 만에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사건으로 노 대표는 구속됐고, 3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한다. 김 후보는 초창기 신혼 생활 대부분을 남편 옥바라지로 보내게 된 것이다. 출소 후 김 후보의 나이는 어느 덧 마흔을 바라보게 됐다. 이후 두 사람은 아이를 바랐지만, 워낙 늦은 나이인 터라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현재 김 후보 부부는 슬하에 자식이 없다. 한병관 기자 wlimodu@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