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선당시 한나라당은 ‘김심’ 의혹을 제기했지만, 그때 DJ에겐 정권 마무리가 더 급했다. 지난 2 월25일 퇴임축하행사에 참석한 김대중 전 대통 령. | ||
박 실장이 “밖에서 만나는 게 예의지만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는다”고 사정을 말하자 이 변호사는 즉각 청와대로 찾아왔다. 이 변호사는 자리에 앉자마자 전 전 대통령이 김대중 대통령(DJ)에게 전하는 메시지라며 이같이 설명했다.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 어제 저녁 편지를 보내왔다. 대선에 출마한다는 것이다. 그동안 많이 말렸는데 듣지 않는다. 나(전 전 대통령)는 장세동을 돕지 않는다. 그의 출마는 내 뜻이 아니다. 김 대통령은 이 사실을 아시고 혹시 5공세력이 다시 뭉친다는 식의 오해는 없으시기 바란다.”
전 전 대통령이 사람을 보내 황급하게 장 전 부장의 출마에 대해 해명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DJ가 16대 대선 지형을 나름대로 통제하고 있다는 게 전 전 대통령의 인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대선기간 중 한나라당은 DJ가 대선정국 막판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민주당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빠지고 무소속 정몽준 의원이 급부상하자 특히 ‘김심 논란’에 불을 질렀다. DJ가 원래 마음에 뒀던 여당 후보가 바로 정 의원이라고 수시로 공격했다. 한나라당 서청원 대표, 김영일 사무총장 등 수뇌부들은 공·사석에서 DJ의 대선 개입 의혹을 도마 위에 올렸다.
과연 DJ는 16대 대선에서 ‘큰 그림’을 주도했던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부정’쪽에 가깝다. 노무현 후보가 민주당 내 반노·친노파들과 치열한 권력 갈등을 벌였지만 ‘김심 의혹’을 제기한 적은 없다. 이 점에서 이인제 의원과 대조적이다.
2002년 3, 4월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노풍’이 소용돌이쳤을 때 이 의원측은 청와대를 ‘노풍 조작’의 진원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노 후보측은 달랐다. DJ의 측근 그룹인 동교동계 신·구파가 한결같이 껄끄러운 사이였지만 DJ를 배후로 보지는 않았다. 노 후보 자신이 그랬다.
민주당 소장파 리더였던 김민석 전 의원이 탈당해 정 의원이 창당한 국민통합21로 합류한 직후인 10월22일 노 후보는 시내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점심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노 후보는 자신이 제기했던 중도개혁포럼(중개포) 비판론의 배경에 대해 질문을 받고 이렇게 설명했다.
“중도개혁포럼 배후에 청와대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 대통령을 모시고 호가호위했던 사람들이 문제다. 호랑이가 이빨과 털이 다 빠져 마무리하려 하는데 (그를) 모시고 신임 받던 사람들이 ‘이 당이 누구 당이냐’고 방자한 소리를 하고 다녀서 그러지 말라고 한 것이다. 한화갑 대표도 뽑아놓고 흔들고. 나와 한 대표는 전대에서 선출됐으니 협력해야 한다. 중개포가 친노는 아니지만 그만하라는 뜻이다. 대통령을 모신 사람들이 조심하라고 한 얘기다.”
‘중개포’는 동교동계 리더인 정균환 원내총무가 이끌던 최대 반노·비노 그룹이었다. 정 총무가 DJ의 가신 출신이지만 중개포의 정치적 스탠스가 DJ와는 무관하다는 게 노 후보의 인식이었던 것이다.
10월 정국의 최대 충격파였던 김 전 의원의 탈당 및 정몽준 후보 캠프 합류만 해도 노 후보측은 DJ와는 무관하다고 판단했다. 김 전 의원은 탈당 회견 직후 민주당 386세대 핵심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임종석 의원, 우상호, 허인회 위원장 등이 그들이다. 김 전 의원은 이들 중 전화가 연결된 허인회 위원장에게 “혼자 결정한 게 아니고 당의 흐름, 즉 당심”이라며 “비난 성명 발표를 재고해달라”고 요청했다.
김 전 의원이 언급한 당의 흐름, 즉 ‘당심’은 무었이었을까. 당시 벼랑 끝에 몰렸던 노 후보를 ‘결사보위’했던 극소수 현역의원 중 한 명이었던 추미애 의원은 정 총무를 ‘배후’로 꼽았다.
추 의원은 “김 전 의원이 정 총무와 가까운 사이라는 것은 모두 안다. 또 H박사는 정 총무의 정치고문이나 다름없다. 세 사람이 동일하게 평화민주 개혁세력을 말하는 것도 공통분모다”라고 주장했다.
DJ의 장남 김홍일 의원측도 비슷한 입장을 보였다. 김 의원의 한 측근은 “김민석이 당심이라고 한 것은 변명 아닌가. 우리 의원은 정 의원이 지금은 지지율이 높지만 거품이 빠질 것으로 본다. 호남 민심은 반반이다. 노 후보를 찍자니 당선가능성이 희박하고 정 후보를 찍자니 의리가 우는 것이다. 탈당도 대선 후에 하면 된다.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마찬가지다”라고 토로했다.
권노갑 전 고문측이 정 후보측에 파견했던 인사들을 10월 말께 철수시킨 이유만 봐도 청와대가 정 후보를 조직적으로 지원했다고 보기 어렵다. 권 전 고문측이 사전에 치밀하게 조율된 상태에서 정 후보를 지원한 게 아니었다. 일단 투입했다가 반응이 시원치 않아 철수하는 식이었다.
권 전 고문측 관계자는 당시 “권 전 고문이 민주당 부위원장급 12명을 정 후보측에 파견했으나 최근 돌아왔다. 가보니 정 후보측이 아무런 준비도 안돼 있고 측근들이 너무 고압적이었다”고 불평을 털어놓기도 했다.
▲ DJ가 ‘정풍’의 배후라는 의혹을 품었다면 노무현 후보 성격상 침묵했을 리가 없다. 단일화에 합 의할 당시 노무현과 정몽준. | ||
권 전 고문 측근인 박양수 의원의 경우 자신이 정몽준 영입을 위한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었다. 그런 권 전 고문측이 낭패를 보고 돌아왔다는 점은 중요한 대목이다. 동교동계와 정 후보 간에 노 후보를 배제하고 정권재창출을 도모하기 위한 시나리오가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동교동계가 노 후보와 갈등을 거듭한 까닭은 무엇일까. 오히려 민주당의 핵심세력인 동교동계가 정교한 집권플랜을 마련하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을 수도 있다. 정균환 총무는 일부 기자들과 폭탄주를 마시던 사석에서 노 후보와의 관계를 이렇게 토로한 적이 있다.
“노 후보는 경선에서부터 쌓인 게 있는 것 같다. 경선 당시 각 주자들과 한 번씩 만났는데 다들 ‘도와달라’고 했다. 나는 ‘어느 한 사람을 도와 줄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서울 경선 직전 노 후보가 전화를 걸어왔다. ‘누가 이인제 후보를 데려왔어요’라고 소리치더라. ‘내가 데려왔다. 정권 초에 의석수가 부족해서 당이 결정했고, 내가 사무총장이었다’고 설명했다. 또 한번은 8월 지방선거 직전인가 지방에 가 있는데 김원기 고문이 전화해서 노 후보가 만나자고 한다고 했다. 부랴부랴 서울에 올라와서 나갔더니 10여 명이 나와 있었다. 내가 빠져도 티가 안 나는 자리였다.”
노 후보는 동교동계가 경선 초에 이인제 후보를 밀었다는 불만을 털어내지 못했던 셈이다. 역으로 동교동계는 노 후보가 ‘당의 본류’인 자신들에 대해 소홀히 대접한다고 본 것이다. 동교동계가 ‘김심’과는 무관하게 노 후보와 불편해진 데는 노 후보측 강경파들의 영향도 컸다. 동교동계 중 온건파였던 한화갑 대표가 노 후보와 충돌한 과정도 예외가 아니다.
한 대표가 11월 초 최고위원회의에서 노 후보 지지선언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노 후보 진영이던 이해찬 의원이 이날 한 대표의 사퇴를 요구하는 바람에 한 대표와 노 후보가 심하게 다투기도 했다. 다음은 노 후보의 측근이 전했던 해프닝.
당시 한 대표는 노 후보에게 전화를 걸어 “이해찬 의원을 해임하라”고 요구했다. 내친 김에 한 대표는 “부산 선대위가 부산시지부 집기를 쓰고 있는 것도 문제”라고 꼬집었다. 한 대표의 지지 발언에 고마움을 느끼고 있었던 노 후보는 순간 발끈했다.
“11명이 탈당하는데 대표가 한 일이 뭐냐. 선대위가 당 사무실을 쓰는 게 문제가 되느냐. 대표가 할 말이냐.” 노 후보와 정 후보 간에 어정쩡한 입장을 취하던 한 대표가 ‘노 후보 지지’라는 중대 결정을 내린 날에 예기치 못했던 돌발변수로 인해 불화가 심화된 셈이다.
노 후보 캠프의 핵심이었던 한 동교동계 출신 인사는 노 후보와 조율되지 않은 강경파들의 목소리가 당내 갈등을 부추긴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노 후보 캠프 내에서도 S의원이 사고를 치는 게 문제다. 한 대표는 끌어안고 가야 한다. 그런데 한 대표를 비판해 자극한다.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 사퇴요구 등도 노 후보와 조율 없이 마음대로 한 것이다. 여당의 대선 후보는 약자가 아니다. 약자일 때는 센 쪽과 한판 붙어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강자는 끌어안아야 한다. 정균환 총무도 끌어안아야 한다. 그는 단순하지만 논리가 일관성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동교동계와 권력투쟁을 벌여 승리하겠다는 게 노 후보측 전략이었음은 부인하기 어렵다. 노 후보측 핵심관계자는 동교동계의 반노 세력 결집이 절정을 이뤘던 11월 초쯤 ‘2단계 전략’을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동교동계와 관련해서 우리는 1단계로 경선 승리를 목표로 잡았다. 그 다음 2단계로 당내 권력투쟁을 전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강·온파 간 의견이 맞서서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그래서 정몽준 후보와의 후보단일화를 2단계 목표로 수정했다”고 밝혔다.
사실 DJ가 ‘정풍’의 배후라는 의혹을 품었다면 노 후보 성격상 침묵했을 리가 없다. DJ를 정풍의 배후로 지목할 경우 ‘호남표’의 이탈이 예상돼서 노 후보가 자제했을 것이라는 일각의 분석도 제기됐지만 설득력은 떨어진다.
한나라당 수뇌부가 ‘김심 논란’을 부추긴 것은 무조건 남는 장사였기 때문이라고 보인다. 노 후보와 정 후보 중 누가 단일후보가 돼도 정당성 논란으로 인해 득표력에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DJ는 대선정국의 와중에서 정권재창출에 관해 극도로 입조심을 했다. ‘국민의 정부’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겠다는 이외의 언급을 하지 않았다. 정확하게 따지면 정권 재창출에 신경 쓸 형편도 아니었다. 차남인 홍업씨, 막내아들 홍걸씨, 최측근 권 전 고문 등이 각종 비리사건에 연루돼 재판을 받던 상태였다. 당시 홍걸씨가 청와대에 들어와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DJ는 만나주지 않았던 것을 알려졌다. 그 정도로 정신적 충격이 컸다.
당시 청와대 관계자는 “이희호 여사는 막내아들을 생각하며 눈물이 마르지 않고 있다. 성경책을 읽는 게 유일한 위안인 것 같다. 홍걸씨에게도 성경책을 갖다줬다”고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홍걸씨는 1심 재판에서 성경 구절을 인용,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다”라고 깊이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DJ의 영원한 정치적 라이벌인 김영삼 전 대통령(YS)은 5년 전 차남 현철씨가 공직인사 개입 및 비리의혹 등의 타깃으로 찍혀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았다. DJ가 바로 그 처지로 전락한 셈이었다. 5년 전 YS가 퇴임 후 거주할 호화사택 신축문제로 공격을 받았듯이 DJ도 동교동 호화사택문제로 언론의 화살을 맞았다.
이희호 여사와 청와대 경호실장이 공동 건축주로 된 동교동 사택이 건평 2백여 평 규모로 신축중이라는 한나라당의 폭로 공세는 말년의 DJ에게 아픈 상처가 됐다.
YS는 그래도 “내가 이회창 후보를 밀지 않아서 DJ가 대통령이 됐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DJ는 YS처럼 주장하기도 힘들다. 자신의 측근 그룹인 동교동계가 노 후보와 갈등으로 점철했고 그 과정에서 DJ가 정리작업을 해준 적이 없다. 역설적으로 정권교체기에 가장 권력을 사용하지 않았던 대통령을 DJ라고 기록해도 무방하다.
DJ의 최측근인 박지원 청와대 비서실장은 대선기간 중 정권 재창출과 관련된 우회적 농담을 종종 즐겼다. 박 실장은 “권불십년이라는 말이 있다. 권력은 오래 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은 뒤집어 보면 권력이 십 년은 간다는 뜻이다. 민주당이 정권재창출을 하면 정확히 십 년을 집권하게 된다. 바로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라고 즐거워했다. 민주당은 정권재창출을 했다. 하지만 권력의 시계는 박 전 실장의 기대와는 달리 정확하게 오 년에서 멈춰섰다.
이진설 언론인
‘DJ정권 비사’가 이번호를 끝으로 막을 내립니다. 그간 성원을 보내주신 애독자 여러분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