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모델? 라이벌? 주원 언닌 그냥 최고야
# 내 생애 최고의 경기
“아무래도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의 경기들이에요. 여자농구가 사상 최초로 4강 진출을 했던 경험이 대표팀 생활 내내 가장 짜릿했던 시간들 같아요. 당시 제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어요. 여자농구의 전설인 전주원, 정선민, 양정옥 선배 틈에서 백업 멤버로만 머물다가 처음으로 주전으로 뛸 수 있었고, 그런 큰 국제대회를 통해 제가 더욱 성장할 수 있었거든요. 지금도 그 당시를 떠올리면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의 떨림이 기억나요.”
# 내 생애 최고의 감독
“제가 중3 때 실업팀 삼성생명과 미리 계약을 맺었어요. 중1, 2학년 때 뛰는 걸 보고 당시 삼성생명 조승연 감독님이 절 스카우트하신 거였죠. 저한테 농구의 길을 열어주신 분이에요. 항상 자상한 큰아빠 같은 느낌을 주시죠. 그 분이 계셨기 때문에 박정은도 존재한다고 봐요. 그리고 또 한 분은 청소년대표팀과 시드니올림픽 때 인연을 맺은 유수종 감독님입니다. 시드니올림픽 때 쟁쟁한 선배들을 제치고 절 주전으로 발탁해주신 분이세요. 감독님의 믿음 덕분에 올림픽이란 큰 무대에서 마음껏 코트를 휘젓고 다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근 은퇴를 선언한 ‘국민포워드’ 박정은이 소속팀에서 지도자로 새 인생을 걷고 있다.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돌아보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모습.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아버지세요. 98년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고모인 박신자 씨의 영향을 받아 아버지도 농구 선수로 활약하셨거든요. 결국엔 딸이 대물림하게 됐는데 제가 삼성생명 입단할 때까지 제 매니저를 자처하시면서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으셨어요. 삼성생명 체육관에는 아버지가 항상 앉던 자리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안 계신 후로는 그 빈자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서 제대로 뛸 수가 없더라고요. 딸인 저보다 제가 농구하는 걸 더 좋아하셨던 것 같아요. 이젠 저도 아버지한테 큰소리 칠 수 있어요. 선수생활에 최선을 다했고, 앞으로 지도자 생활에서도 제 이름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열심히 살 것이라고요.”
# 내 생애 최고의 라이벌
“사실 ‘라이벌’이란 타이틀은 맞지 않고요, 제가 가장 좋아했던 선배 중 한 사람이에요. 바로 (전)주원 언니입니다. 우리은행 코치를 맡고 계시기 때문에 앞으로는 벤치에서 맞붙게 됐어요. 고등학교 시절 현대실업팀에서 뛰던 주원 언니와 함께 연습 게임을 한 적이 있었어요. 경기 후 언니 사인을 받고 싶은데,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께 부탁드렸더니 주원 언니가 사인 받으러 찾아간 아버지께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해요. ‘사인 받을 사람은 정은이가 아니라 나’라고. 주원 언니는 고등학생에 불과한 제 실력을 높이 평가해 주셨어요. 그때부터 언니의 넓은 마음 씀씀이에 푹 빠졌었죠. 아쉽게도 대표팀이나 올스타전 외에는 같은 팀에서 뛴 적이 없지만, 아마 같이 생활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좋아하고 존경할 수 있었다고 봐요. 언니는 선수 때보다 코치가 돼서 더 멋있어지신 것 같아요.”
박정은은 요즘 선수가 아닌 코치 신분으로 후배들과 체육관에서 생활하고 있다. 똑같은 생활인데도 신분에 따라 훈련을 받아들이는 부분이 극과 극의 차이를 갖게 한다고 말한다. 선수 때는 자상한 선배였는데 코치가 된 후 조금씩 ‘독사’의 면모를 내보이는 부분이 신기하기만 하다는 것. 아직은 초보 지도자지만 그는 크게 걱정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뒤에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빽’인 남편 한상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
‘최고의 빽’ 한상진 리더십 책 사주며 “지도자 해라” “요즘 같이 TV를 보고 있으면 갑자기 ‘성공시대’를 틀어 놓거나 홍명보 감독의 자서전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등 ‘리더’와 관련된 영상물과 책들을 실어 나르느라 바쁘다. 남편은 내가 은퇴 후 코트를 떠나는 것은 한국 농구 발전의 커다란 손실이라고 최면을 걸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내가 코치로 발탁됐다는 소식에 가장 기뻐했다.” 한상진은 드라마 <마의>에 이어 유준상 등과 함께 <출생의 비밀>에도 출연하고 있다. 남편의 빡빡한 스케줄로 인해 얼굴 보기도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박정은에게 한상진이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아내가 아닌 기자와의 통화를 원한다고 한다. 기자에게 살갑게 인사를 전하며 자신을 <일요신문> 애독자라고 밝힌 한상진은 기자의 글들을 열거하면서 자신의 아내 기사도 잘 좀 부탁드린다는 인사로 외조를 아끼지 않았다. 옆에서 남편의 목소리를 듣고 있던 박정은은 여자 농구계에서 자신처럼 결혼을 잘한 선수는 없을 것이라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77년생 동갑내기인 두 커플의 숙제는 2세 만들기. 박정은은 내년 이맘 때 쯤이면 두 사람을 닮은 예쁜 아기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