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가 ‘약쟁이’로 만들었다
월러스 레이드는 양성애자였다는 얘기도 있었고, 1922년에 베티 앤이라는 아이를 입양했는데 다른 여성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1891년에 태어난 레이드는 연극 연출가였던 아버지 할 레이드를 따라 네 살 때부터 무대에 섰고, 학창 시절엔 그림과 음악(색소폰과 바이올린)에 재능을 나타냈으며, 학업 성적은 물론 스포츠에도 뛰어났던 전도유망한 소년이었다. 연극계와 사교계를 넘나드는 거물급 인사였던 어머니는 아들을 의사로 만들려고 했지만, 영화 분야로 진출한 아버지를 따라 결국 월러스 레이드는 할리우드 땅을 밟게 된다. 스턴트맨으로 시작한 레이드는 배우, 작가, 촬영감독 등 다양한 경력을 거쳤고 결국엔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꿈을 품었다. 1912년에 <그의 외아들 (His Only son)>에 출연했을 때 만난 도로시 데이븐포트라는 여배우 만나 1913년에 결혼했다. 그녀의 나이는 18세였다.
1914년에 파라마운트 소속 배우가 된 그는 결국 감독의 꿈을 접고 스타의 길을 가게 된다. 각진 턱에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푸른 눈의 미남 스타에 여성 팬들은 무한한 애정을 보냈고, 저널은 ‘가장 완벽한 은막의 연인’이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그는 전형적인 ‘마티니 아이돌’(matinee idol), 즉 잘생긴 얼굴을 내세워 여성 팬들의 사랑을 받는 남성 스타였다. 외모를 내세운 로맨스 영화로 스타덤에 올랐지만 그의 진짜 관심사는 액션과 어드벤처였다. <거인의 계곡>(1919)도 그런 영화였는데, 하이 시에라의 벌목장에서 펼쳐지는 액션을 찍던 도중 기차 탈선 사고가 발생했고 그는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스튜디오는 촬영을 강행했고, 이때 레이드는 처음으로 모르핀을 경험한다.
당시 모르핀의 중독성에 대해선 의사들도 무지한 상태. 즉각적이면서도 오래 지속되는 효과 덕에 촬영을 마친 레이드는 휴식 없이 곧 다음 작품 촬영장으로 향한다. 당시 ‘돈 덩어리’였던 레이드를 최대한 굴리기 위해(1년에 6~7편의 영화에 주인공으로 출연시켰다) 스튜디오는 계속 모르핀을 공급했고 그는 자신도 모르게 중독 상태가 되었다.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던 사생활도 그를 점점 모르핀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억압적인 어머니와 고집불통인 아내의 고부 갈등 사이에서 레이드는 힘들었다.
결국 그는 클리닉에 들어갔다. 할리우드에 있는 뱅크시아 플레이스 요양소였다. “약물 중독을 치료하지 않으면 그곳에서 나오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곳에서 레이드는 좋게 말해 스파르타식, 실상은 인권을 유린하는 치료를 받았다. 그는 독방에 감금되었다. 개수대 하나, 양변기도 없는 화장실 하나, 바닥에 매트리스 하나가 있는 방이었다. 가끔 의사가 들렀지만 별 다른 진료는 없었고 간호사는 끼니때 알 수 없는 음식을 던져주고 갈 뿐이었다. 모르핀 중독을 치료했을지는 모르지만, 그곳에서 185센티미터였던 레이드의 체중은 82킬로그램에서 54킬로그램으로 줄었다.
심각한 상황이라 느낀 레이드의 아내는 남편의 중독 사실을 언론에 알려 여론을 환기시켰고 미국 전역에서 스튜디오로 위로와 연민의 편지가 날아왔지만, 레이드는 그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계속 요양소 안에서 ‘치료’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23년 1월 인플루엔자에 감염된 그는 코마 상태로 들어갔고 1월 18일에 사망했다. 할리우드의 모든 스튜디오는 하루 동안 촬영을 멈추고 조의를 표했으며, 저널은 할리우드의 약물 중독 상황을 비판하는 기사를 쏟아내며 레이드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다.
월러스 레이드의 죽음은 할리우드 역사에서 커다란 의미를 지녔다. 공공연했던 스타들의 약물 중독 문제가 수면 위로 올라왔고, 그러면서 MPPDA(영화 제작 및 배급자 연합)의 윤리적 공세는 더욱 심해졌다. 스타를 사육하듯 착취하는 스튜디오의 행태도 지적되었으며, 요양소의 비인간적 치료법에 대한 비난도 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단 하나도 개선되지 못했고, 지금도 수많은 배우들이 스타덤의 압박을 이기지 못해 마약의 유혹에 빠지고 있다.
김형석 영화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