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검 스트레스 ‘쇼핑’으로 풀었나
지난 5일 국토해양부가 발표한 공시가격에 따르면 아파트 연립주택 다세대주택을 망라한 최고가 공동주택은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에 위치한 트라움하우스5차 273.6㎡형으로 49억 3600만 원이다. 2008년 공시가격 50억 4000만 원보다 2.1% 하락했지만 트라움하우스5차는 수년째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아파트부문 최고가는 서울 삼성동 아이파크로 269.4㎡형이 42억 8800만 원에 이른다. 급속한 부동산경기 침체로 공시가격은 2008년 48억 2400만 원보다 11.1% 떨어졌다.
세대 전용 엘리베이터와 내진설계, 지하 방공호 설치로도 유명한 트라움하우스5차는 일반인으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성’이다. 거래도 거의 없어 시세도 없다. ‘부르는 게 값’인 셈이다. 이렇게 명성이 자자한 최고가 공동주택을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본인 명의로 매입한 것은 지난해 7월 11일(등기부상). 이 전 회장은 트라움하우스5차 A동 ×××호(273.83㎡)를 95억 원에 매입했다. 이 호의 올해 공시가격은 42억 9200만 원. 같은 날 이 전 회장이 매입한 삼성동 아이파크는 웨스트윙동 3×××호(145.046㎡)로 신고한 거래가는 32억 원이었다. 이 호의 공시가격은 올해 기준 20억 3200만 원이다.
국토해양부 아파트 실거래가 공개 사이트를 보면 삼성동 아이파크의 경우 지난해 이 전 회장의 매입을 포함해 총 다섯 차례의 거래가 있었다. 이 전 회장 건을 제외한 나머지 실거래가를 살펴보면 2008년 1월 초 146㎡형(30층)이 31억 7000만 원에, 4월 초 146㎡형(25층)이 32억 원에, 역시 4월 초 157㎡(37층)형이 34억 원에, 4월 중순 196㎡형(33층)이 57억 원에 거래됐다. 146㎡형 30층대를 매입한 이 전 회장은 시세와 비슷한 가격에 거래를 한 셈이다.
이렇게 같은 날 이뤄진 이 전 회장의 127억 원대 부동산 매입대금 출처에 의문을 품을 필요는 없을 듯하다. 지난해 4·22 삼성쇄신안을 통해 이 전 회장 등 삼성전자 사내 등기이사에서 물러난 다섯 명에 대한 퇴직금이 총 300억 원에 이른다. 올 초 이 전 회장이 수령한 그룹 계열사 주주 배당액만 해도 148억 원이다. 국내에서 제일 비싼 집 두 채 정도 사들일 능력은 되고도 남는다.
그렇다면 이 전 회장이 국내 최고급 빌라와 아파트를 동시에 구매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삼성그룹 측은 “이 전 회장이 대주주지만 그룹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에 확인할 길이 없다”고만 밝혔다. 그렇다면 상식에 견주어 추정하는 수밖에. 보통 사람들이 집을 사는 이유는 크게 실거주 목적과 재테크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저택을 보유한 이 전 회장이 새 거처 마련을 위해 고가의 공동주택을 구매한 것은 아닐 듯하다.
▲ 서초동 트라움하우스5차(왼쪽), 삼성동 아이파크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거처 마련과 재테크 외에 다른 목적을 위한 장소를 마련한 것은 아닐까. 이 전 회장이 지난해 11월 삼성 서초타운 시대 개막에 맞춰 그룹 경영을 배후 컨트롤하기 위한 장소를 서초동 일대에 마련했다는 상상력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미 퇴진한 이 전 회장이 세간의 이목을 피해 그룹 경영에 관여한다고 치면 첨단보안시설이 구비된 고급 빌라나 아파트가 필요할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이는 이태원동에 있는 이 전 회장 개인 집무실 승지원에서도 가능하다. 삼성 서초타운과 가까운 장소를 고려했다면 삼성 주요 임원들 주거지가 밀집돼 있는 도곡동 타워팰리스가 더 적합하진 않았을까. 삼성전자 임원들 거처가 몰려 있는 데다 별도 회합공간까지 마련돼 있는 분당 타임브릿지 오피스텔도 제격이다.
이건희 전 회장이 빌라와 아파트를 매입한 지난해 7월은 이 회장의 스트레스가 극심했을 것으로 보이는 때다. 지난해 4·22 삼성쇄신안을 통해 삼성은 그룹 컨트롤타워인 전략기획실 해체와 이 전 회장의 완전퇴진을 선언했다. 6일 후인 4월 28일 삼성전자 대표이사 사장 및 등기이사직을 사임한 이 전 회장은 그해 7월 1일에는 사원증마저 반납하게 됐다. 1987년 이후 21년간 삼성그룹을 이끌었던 이 전 회장이 어떤 심경이었을지는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7월 1일 오후 이 전 회장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열린 삼성 비자금 사건 여섯 번째 공판에 출석, 증인 신분으로 나온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와 조우를 했다. 이날 그는 “세계 1위가 되는 것은 정말 어렵다”면서 “10~20년이 걸려도 삼성전자와 같은 회사를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이 전 회장의 빌라·아파트 거래 하루 전날인 7월 10일, 삼성특검은 이건희 회장에게 징역 7년, 벌금 3500억 원을 구형했다. 이후 이 전 회장은 같은 달 16일 1심에 이어 10월 10일 항소심 공판에서도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 원을 선고받고 현재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는 중이다.
당시 이건희 전 회장은 일련의 스트레스를 풀려는 듯 자신의 취미인 자동차 수집 쇼핑에 나서 세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삼성 측은 역시 “사실 확인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수입차업계와 일부 언론 보도에 따르면 이 전 회장은 지난해 하반기 외제 스포츠카 구입에 재미를 붙였다고 전해진다. 서울 강남 대치동과 양재동 일대 수입차 매장들을 돌아보면서 직접 차종을 골랐다고 한다. 당시 이 전 회장이 수억 원을 들여 포르셰와 BMW 아우디 재규어 등 여러 차종을 사들였다는 것이다. 지나친 비약일 수 있으나 이 전 회장의 빌라·아파트 매입을 고급 외제 스포츠카 쇼핑처럼 ‘분위기 전환용’ 소비활동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 전 회장이 최고가 빌라·아파트를 함께 매입한 정확한 이유는 결국 본인이나 최측근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일. 이 전 회장을 둘러싼 ‘부동산 쇼핑’ 미스터리는 당분간 쉽게 풀리지 않을 듯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