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속’ 빠져들자 ‘가속페달’ 멈칫
▲ 최고의 요지로 꼽히는 강남 테헤란로. 최근 이 지역에서까지 나대지가 경매에 나와 건설사들의 관심을 끌었다. | ||
연초 경매시장은 말 그대로 뜨거웠다. 노무현 정부 시절 박힌 ‘대못’을 뽑기 시작하면서 부동산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는 분위기가 돌며 경매시장도 후끈 달아오른 것. 수십 대 일의 입찰 경쟁률은 기본이고 낙찰가 역시 시세에 육박할 정도였다. “굳이 경매를 통해서가 아니라 급매물을 사는 게 더 낫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로 지난 2월 중순 서초구 잠원동 신반포아파트 56㎡형은 감정가 4억 5000만 원에 두 번 유찰된 뒤 2억 8800만 원에 입찰됐다. 이날 무려 85명의 응찰자가 몰려 감정가를 뛰어 넘는 4억 5500만 원에 낙찰됐다. 낙찰자는 무려 84명의 경쟁자를 물리치며 축배를 들었지만 시세가 최초 감정가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급매물로 사는 게 더 나을 정도였던 셈이다.
지난 1월 초에도 인천 연수구 동춘동 무지개아파트 106㎡형에 98명이 입찰에 참가했다. 최초 감정가 2억 8000만 원. 두 번 유찰돼 최초 감정가 대비 49%인 1억 3720만 원에 나오면서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됐다.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결국 직전 유찰가 1억 9600만 원보다 높은 2억 2110만 원에 낙찰됐다. 이처럼 지난 1∼2월 낙찰가가 높았던 것은 부동산 시장이 상승세로 돌아섰다는 섣부른 판단 때문이다. 현재 다소 높게 낙찰을 받더라도 향후 잔금을 지불하고 입주하는 시점에서는 기대만큼의 시세차익을 노릴 수 있다는 기대가 깔려 있었다.
통상 경매로 아파트를 낙찰받았다고 하더라도 잔금 납부까지 한 달 정도의 기간과 소유자와 세입자를 내보내는 한두 달의 기간을 합치면 낙찰자가 입주할 때까지 최소한 3개월 이상 걸린다. 때문에 경매 참가자는 당장의 시세차익보다는 향후 부동산 가격 동향을 미리 예측해 입찰에 참여한다. 더구나 최초 감정가는 첫 경매 3∼6개월 전에 평가했기 때문에 그 뒤 아파트값이 오름세를 타고 있다면 입찰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연초부터 3월 초까지가 딱 그런 기간이었다. 부동산 시장에 ‘규제 철폐’라는 훈풍이 불어 경매장에 사람들이 몰리고 경쟁률이 높아지면서 ‘일단 낙찰받고 보자’는 심정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하지만 3월에 접어들면서 상황이 변하기 시작했다. 부동산 규제 철폐라는 약발이 예상보다 오래가지 않으면서 부동산 시장이 또다시 진정국면에 접어들자 경매 법정이 한산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연초 고가에 낙찰을 받은 사람들. 부동산 시장 상승을 예상하고 무리해서 낙찰을 받았지만 정작 급매물을 사는 것보다 못하게 됐기 때문이다.
지난 2월 19일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선 대치동 은마(105㎡형) 한보미도(137㎡형) 우성아파트(95㎡형)가 각각 입찰에 부쳐졌다. 이 가운데 한보미도아파트는 최초 감정가 18억 5000만 원에서 두 번 유찰된 뒤 11억 8400만 원에 입찰됐다. 이날 27명이 들어와 17억 원에 낙찰됐다. 비록 최초 경매가보다는 낮았지만 직전 유찰가 14억 8000만 원보다 높은 가격이었다. 문제는 현재 이 아파트의 시세가 15억∼16억 원 선이라는 것. 입찰가의 10%인 입찰보증금을 납부한 낙찰자는 속이 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 3월 2일 경매에 나온 서울 송파구 문정동 올림픽훼밀리타운 105㎡형도 시세보다 높게 낙찰된 경우다. 최저 경매가는 5억 2480만 원. 16명이 입찰에 참가해 낙찰가는 예상대로 유찰가 6억 5600만 원을 뛰어넘어 6억 8277만 원에 낙찰됐다. 현재 이 아파트의 시세는 6억 5000만 원 내외다.
법무법인 산하 강은현 실장은 “3월 들어 부동산 시장이 잠잠해지면서 연초 분위기에 휩쓸려 고가로 낙찰을 받는 사람들이 불면의 밤을 보내고 있을 것”이라며 “낙찰받은 뒤 통상 한 달 뒤에 잔금을 납부하는 만큼 4월 부동산 시장이 현재와 비슷한 상황이면 잔금 납부를 포기해 재경매에 나오는 물건이 속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부동산 시장이 중심을 못 잡고 ‘갈지 자’로 움직이면서 부동산 시장이 과도기적일 때 나타나는 이색 경매 물건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지난 1월 중순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 있는 오피스텔 59채가 한꺼번에 경매에 부쳐졌다. 지난 2005년에 완공된 건물로 건설사가 채권을 회수하지 못하자 경매를 신청한 것. 경기침체로 제때 분양이 안 되자 지난해 138채가 경매에 나왔고 73채가 지난해 11월 주인을 찾았다. 나머지 중 경매가 취하된 6채를 제외하고 59채가 다시 경매되면서 서울 남부지방법원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이날 이 오피스텔 입찰에 참가한 사람만 1320명이었다.
외환위기 직후에도 통경매가 대거 등장했지만 2000년 초 부동산 시장 호황기에 사라진 바 있다. 최근 분양시장을 감안하면 향후 이 같은 통경매가 지속적으로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공장 경매 물건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공장 경매의 경우 임대수익을 노려볼 수 있는 공단 내에 있는 공장이나 김포 화성 등 수도권지역의 ‘나 홀로 공장’처럼 토지 시세차익을 기대할 수 있는 공장에 ‘선수’들이 몰리고 있다. 지난 2월 화성시 팔탄면에 위치한 대지 3194㎡, 연건평 3276㎡, 2층 규모의 공장이 입찰에 부쳐졌다. 최초 감정가는 23억 9738만 원. 이날 최저 경매가는 15억 3234만 원이었는데 5명이 입찰에 참가해 18억 1000만 원에 낙찰됐다.
또 지난 3월 4일 서울 중앙지법엔 대한민국 최고 요지로 꼽히는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 나대지 334㎡(주차장)가 경매에 나와 건설사들의 비상한 관심을 받았다. 강남 테헤란로는 외환위기 이후 매매 또는 경매를 통해 재편되고 난 이후 웬만해선 경매 물건이 나오지 않는 곳으로 유명하다. 대기 수요가 많아 경매 직전에 일반 매매로 해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나대지의 감정가는 58억 4500만 원. 선릉역 이면도로인 탓에 유찰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4명이 입찰에 참가해 무려 119억 6900만 원에 낙찰됐다. 최초 감정가 대비 204%다. 3.3㎡(1평)당 가격으로 따지면 1억 원 선. 예상을 뛰어넘는 낙찰가는 테헤란로 인근의 부동산이 그만큼 귀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닥터아파트 이영진 리서치연구소장은 “부동산 시장이 안개 속으로 빠져들고 있는 만큼 법원 경매시장도 연초 과열 양상에서 벗어나 당분간 ‘정중동’의 모습을 보여줄 것”이라면서 “다만 부동산 시장의 침체가 장기간 지속되고 있는 만큼 부동산 시장 호황기에는 볼 수 없었던 이색 경매물건은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고 말했다.
김명철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