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 ‘아버지 그늘’ 밖으로 성큼
▲ 최근 롯데그룹의 경영권 승계작업이 빨라지고 있는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사진은 왼쪽부터 신격호 회장, 신동빈 부회장, 신영자 사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지난 7월 1일 일본롯데는 의미 있는 인사를 단행했다. 1948년 창립 이후 61년간 신격호 그룹 회장이 맡아왔던 사장직에 쓰쿠다 다카유키(佃孝之) 전 일본 로열호텔 회장을 임명한 것이다. 사장 자리를 내놓은 신 회장은 일본롯데 회장으로 승진했다. 통상 일본에서는 사장이 경영 전면에 나서고 회장은 일선에서 물러나 대외적 업무만 관장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번 인사가 경영권 승계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란 게 재계의 지배적인 견해다.
롯데그룹 측은 “일본롯데가 전문경영인을 영입한 데 따른 단순한 직급 조정일 뿐”이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재계 인사들은 그다지 많지 않아 보인다. 특히 신 회장 장남인 신동주 부사장의 부회장 승진은 이번 인사를 후계구도의 연장선상에서 바라보는 견해에 더욱 힘을 실어주고 있다. 신동주 부회장은 쓰쿠다 사장 영입에도 깊숙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진 터라 앞으로 일본롯데에서의 입지는 더욱 확대될 전망이다.
그동안 신동주 부회장은 한국롯데 ‘후계자’인 동생 신동빈 부회장에 비해 경영 참여도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만큼 대권 승계 작업도 한국롯데보다는 더디게 진행됐던 것이 사실. 그러나 신 회장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난 지금 신동주 부회장의 행보엔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롯데그룹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신 회장이 이제 와서 굳이 사장직을 내놓을 필요가 없었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본롯데의 이번 인사는 2세 시대를 예고하는 상징적인 것으로, 아들인 신동주 부회장에게 날개를 달아주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전히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현해탄 경영’을 하고 있는 신 회장도 최대한 신동빈 부회장의 의사를 수용해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때 제2롯데월드 건립과 두산주류 M&A 참여 등을 두고 신 부회장과 마찰(<일요신문> 872호 보도)을 빚기도 했지만 지금은 전폭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고 한다. 재계에서도 올해 87세인 신 회장이 점차 대외 활동을 줄이고 가까운 시일에 신동빈 부회장에게 전권을 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고 있다. 신 회장이 일본롯데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것도 한국롯데에서의 승계 작업이 어느 정도 궤도에 올랐다고 판단해 이제는 신동주 부회장 체제 구축에 전력을 기울이기 위한 포석으로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신동빈 부회장이 여러 잡음에도 불구하고 연착륙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선 그의 사업 수완이 뒤늦게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많은 임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동빈 부회장이 밀어붙였던 슈퍼부문이 단기간에 업계 1위에 오를 만큼 큰 성공을 거뒀고, 역점사업인 롯데백화점의 해외시장 공략 역시 초반의 어려움을 딛고 실적이 개선되는 중이다. 특히 우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두산주류 인수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는 것도 신동빈 부회장의 짐을 덜어준 셈이다. 그룹 일각에서는 지난 2년간의 인사를 통해 신동빈 부회장이 ‘자기 사람 심기’에 성공했다는 부분도 대권으로 가는 길을 앞당겼을 것이란 말도 나온다.
롯데가 지난 4월 사훈을 교체한 것은 이러한 그룹 내 분위기를 여실히 반영한다. 신 회장이 30년여 전 직접 고안한 ‘사랑 자유 풍요를 지향하는 롯데’에서 신동빈 부회장이 슬로건으로 내건 ‘2018년 아시아 톱10 글로벌 그룹’으로 사훈을 바꾼 것이다. 이를 두고 재계에서는 신동빈 체제의 시작을 알리는 공식 선언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아들들에 대한 짐을 덜어낸 신 회장에게 이제 남은 고민은 ‘딸들의 재산 정리’일 것으로 보인다. 많은 재벌들이 후계자로 간택 받지 못한 나머지 형제·자매들에게 일정 지분을 떼어주며 향후 있을 분쟁의 싹을 잘라내곤 한다. 그런 점에서 최근 롯데가 추진 중인 롯데삼강 중심의 비상장 계열사 흡수•합병 소식은 예사롭게 들리지 않는다.
신 회장 딸들인 신영자 롯데쇼핑 사장과 신유미 씨가 몇몇 비상장 계열사 주주로 올라있는 까닭에서다. 편의점 세븐일레븐에 식품을 납품하는 롯데후레쉬델리카(지분율 각각 9.31%)를 제외하고도, 신 사장은 시네마통상(28.3%) 등의 지분을 가지고 있고 신유미 씨는 롯데시네마 매점 운영을 담당하는 유원실업 지분 40%를 보유하고 있다. 롯데삼강을 정점으로 하는 식품 계열사에서 이 회사들은 제외돼 딸들 몫으로 할당될 가능성이 커 보인다.
다만 신 사장과 신유미 씨가 이를 수용할지가 관건이다. 자칫 ‘자매의 난’이 일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특히 롯데그룹 핵심 계열사인 롯데쇼핑의 오늘을 일군 일등공신으로 평가받는 신 사장이 그에 걸맞은 대우를 요구할 경우 신동빈 부회장 체제는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후계 승계를 위한 8부 능선을 넘은 신 회장이 이러한 과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재계의 시선이 쏠리고 있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