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멤버 그대로 ‘옛 영광 다시 한번’
▲ 99년 누비라II 신차 발표회에 참석한 김우중 회장. 최근 그의 재기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 ||
“1년 뒤 기회를 가질 테니 지켜봐 달라.”
지난해 3월 20일 서울의 한 호텔에서 열린 대우그룹 창립 42주년 기념식장에서 김우중 전 회장이 비공개로 한 말이다. 당시 그 자리에 참석했던 한 인사는 “부축을 받긴 했지만 건강은 상당히 좋아 보였다.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씀도 하셨다”고 전했다. 1999년 대우그룹 해체 후 공식석상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김 전 회장의 이 같은 발언은 재기를 염두에 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지난 2007년 12월 특별사면을 받은 후 악화된 병세를 치료하는 데 주력했던 김 전 회장은 올해 1월경부터 자신의 측근들과 함께 본격적인 활동을 위한 채비를 갖추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 전직 대우 임원은 “지난해 연말 김 전 회장이 흩어져 있는 대우맨들 결집에 나설 것이란 얘기를 들었다”고 귀띔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이 2월 12일 전직 대우 사장단 50여 명과의 만찬을 주최한 것이나, 같은 달 19일 전·현직 대우 임직원들이 만든 ‘대우인회’ 모임에 참석한 것도 이 연장선상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김 전 회장 측근들은 대우그룹 창립기념식 다음날이던 3월 21일 대우인회 정기총회를 열고 세계경영연구회(연구회) 설립을 추진하기로 결의했다. 두 달 뒤인 5월 25일 준비위원회를 발족했고 7월 21일부터는 회원모집을 시작했다. 아직 정확한 날짜가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9월 말을 출범 목표로 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연구회준비사무국은 “1999년 12월 말 이전에 대우 계열사에서 5년 이상 근무한 경력이 있어야 회원이 될 수 있다. 아직까지는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대우맨들이 대상인데 조만간 해외로 넓힐 것”이라고 밝혔다.
이처럼 연구회 출범이 일사천리로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은 김 전 회장과 그의 측근들이 이미 관련 구상을 끝내놨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란 관측이다. 이에 대해 연구회 측은 “김 전 회장과는 무관하다”며 펄쩍 뛴다. 준비사무국 관계자는 “김 전 회장과 관련된 얘기는 우리도 전혀 모른다. 무슨 일을 할지도 회원들이 논의해 결정할 것”이라면서 “순수한 사교모임 정도로 봐 달라”고 주문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연구회 막후에 김 전 회장이 있을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김 전 회장 최측근 중 한 명이었던 장병주 전 대우 사장이 연구회 준비위원장을 맡고 있다는 점도 이러한 견해에 무게를 더해주고 있다. 그밖에 백기승 전 홍보이사(기획조정), 전주범 전 대우전자 사장(전자), 유현근 전 대우건설 부사장(건설), 이동호 대우자동차판매사 사장(자동차판매) 등도 준비위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다. 모두 김 전 회장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사들이다.
앞서의 전직 대우 임원은 “김 전 회장이 연구회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주도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김 전 회장 영향력이 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대우그룹 임원 출신의 한 금융권 관계자도 “김 전 회장은 지인들에게 대우의 명예회복과 자신의 재기 작업을 도와 줄 조직이 필요하다고 여러 차례 말했다. 연구회가 그런 역할을 할 것 같다”고 내다봤다.
세계경영2팀의 핵심 업무는 대우사태 분석 및 그룹의 명예회복이다. 여기엔 김 전 회장이 주창한 세계경영 알리기도 포함된다고 한다. 이는 천문학적인 추징금 액수, 여전한 비난 여론 등 김 전 회장의 재기를 막고 있는 걸림돌 제거를 위한 초반 분위기 조성의 일환인 것으로 보인다. 연구회 설립 실무를 맡고 있는 한 관계자는 “부정적인 여론을 돌려놔야 한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김 전 회장 재기도 그러한 작업이 전제돼야 할 것”이라고 귀띔했다.
김 전 회장의 재계 인맥 네트워크도 지원사격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특히 김 전 회장과 친분이 두터웠던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과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신격호 회장과 막역한 사이였던 김 전 회장은 롯데그룹 역점 사업 중 하나인 롯데백화점의 해외 진출을 적극 도와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지난 5월 베트남 진출 때에는 부지 확보, 건축 인허가 등 사업 과정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김 전 회장은 박태준 명예회장과도 각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포스코가 지난해 4월 대우엔지니어링을 인수하고, 비록 실패했지만 대우조선해양 대우로지스틱스 등 유독 대우 계열사에 관심을 보였던 것도 우연만은 아닐 것이란 관측이다.
김 전 회장 재기 움직임이 가시화되면 더욱 많은 원군들이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각계에 퍼져 있는 옛 대우맨들이 목소리를 낼 가능성이 크다. 재계에서는 김현중 한화건설 사장, 김기동 두산건설 사장 등이 대우 출신이고 금융권에서는 박종수 전 우리투자증권 사장과 황건호 한국금융투자협회장 등이 있다. 이밖에 이한구 한나라당 의원과 박정훈 전 민주당 의원 등도 김 전 회장이 아꼈던 직원들이었다. 김 전 회장이 나온 경기고-연세대 동문들 사이에서도 그의 컴백을 바라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명박 정부 역시 김 전 회장 ‘역할론’에 대해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지난 6월 말에는 이 대통령이 직접 김 전 회장을 초청해 만나기도 했다고 한다. 비공식적으로 이뤄진 터라 자세한 내용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회동에서 이 대통령과 김 전 회장은 한 시간가량 깊은 대화를 나눈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에 대해 “금시초문”이라며 “두 분이 만날 이유가 없다”고 부인했지만 여권의 한 핵심인사는 “이 대통령과 김 전 회장은 예전부터 친분이 있었다. 또한 여러 루트를 통해 만나볼 필요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온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김 전 회장이 한국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분명하지만 세계경영 노하우나 해외인맥 등은 지금도 활용할 부분이 많다는 게 현 정부의 인식이다. 직접 경영은 힘들겠지만 투자유치나 사업조언 등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청와대 방문 이후 옛 대우그룹 계열사에 대한 현황 등을 파악하는 데도 분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재계 일각에서는 김 전 회장이 정부의 암묵적 동조 아래 자신의 측근들을 내세워 옛 계열사 중 한 곳의 경영에 참여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다. 김 전 회장이 대우건설 대우조선해양 대우자동차판매 등 자신의 피땀이 어린 계열사들이 표류하고 있는 것을 더 이상 바라보고 있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