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은 빚 털고 후계정리 양수겸장
▲ 삼성생명이 상장되면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작은사진)과 삼성 계열사들에게 엄청난 차익이 남겨지게 되는 셈이다. | ||
삼성생명이 본격적인 상장 절차에 들어가게 된 배경엔 일단 삼성자동차 채권단에 대한 채무 변제 목적이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999년 삼성차의 법정관리 결정으로 발생한 손실에 대해 삼성차 채권단은 이건희 전 회장 소유의 삼성생명 주식 350만 주를 주당 70만 원 조건으로 넘겨받았다. 아울러 삼성생명 상장을 통해 빚을 갚고 나서도 채권액에 미치지 못할 경우 이 전 회장과 계열사들이 추가 출연하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삼성생명 상장이 차일피일 미뤄지자 채권단은 지난 2005년 12월 이 전 회장과 계열사들을 상대로 삼성차 부채 2조 4500억 원과 연체이자 2조 2880억 원 등 총 4조 7380억 원 상환을 요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에 지난해 1월 1심 재판부는 삼성 측에 “2조 3000억 원을 지급할 의무가 있다”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현재 항소심 재판부는 소송액이 천문학적인 액수임을 감안해 삼성과 채권단을 상대로 조정절차에 나선 상태로 내년 초엔 재판이 마무리될 전망이다.
재계에선 1999년 이 전 회장 측의 채권단에 대한 약속 이후 10년 만에 이뤄진 이번 삼성생명 상장 작업을 이재용 전무로의 경영권 승계구도와 맞물린 것으로 보기도 한다. 삼성그룹 정기인사가 내년 초에서 올 연말로 앞당겨질 것이란 관측과 더불어 이재용 전무의 부사장 혹은 그 이상의 파격 승진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승계속도 가속화가 예상되는 시점에서 ‘아버지 대에 생긴 10년 묵은 빚을 아들 대까지 물려줄 수 없다’는 생각에 삼성생명 상장 작업이 급물살을 타게 됐다는 관측이다.
그동안 우려해온 ‘삼성생명 상장시 삼성에버랜드의 금융지주사 선정’을 피할 수 있게 된 점 또한 상장작업 돌입 배경으로 꼽힌다. 삼성그룹 지배구조는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의 순환출자구조로 이뤄져 있다. 지난해까지 삼성에버랜드는 금융권에 신탁한 120만 주(지분율 6%)를 포함해 삼성생명 지분 19.34%를 보유한 최대주주였다. 삼성에버랜드가 최대주주로 있는 삼성생명이 상장될 경우 ‘금융 자회사 주식 가치가 모회사 자산의 절반을 넘게 될 경우 금융지주사로 선정된다’는 법적용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이 경우 ‘보험 자회사 밑에 비금융 손자회사를 둘 수 없다’는 금융지주사법에 따라 삼성생명이 보유한 삼성전자 지분 7.21%를 매각해야 하며 이는 삼성전자 경영권 유지에 어려움을 초래할 수 있었다. 그런데 ‘삼성특검’ 수사를 통해 지난 1월 이 전 회장이 그동안 차명으로 관리해온 삼성생명 주식을 실명 전환하면서 최대주주(20.76%)에 오르게 됐다. 삼성에버랜드가 삼성생명 최대주주 자리를 이 전 회장에 내놓은 까닭에 삼성생명 상장이 이뤄져도 삼성에버랜드가 금융지주사법 적용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재계와 금융권에선 이번 상장 작업이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선을 불러올 것이란 기대감도 키우고 있다. 지주사법상 보험 자회사의 비금융 손자회사 보유는 불가능하지만 보험 지주사의 제조업 자회사 직접 보유는 가능하다. 삼성생명을 지주사로 하는 지배구조 개선작업을 고려해볼 수 있는 셈이다.
이는 그동안 재계를 달궈온 이 전 회장 맏딸 이부진 호텔신라 전무의 분가 시나리오와도 맞물린다. 얼마 전 이부진 전무가 삼성에버랜드 경영전략 담당 전무로 선임되면서 에버랜드 일부 사업부문이 이부진 전무 몫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번 상장작업이 그룹 주력인 전자와 금융을 이재용 전무 몫으로, 에버랜드를 이부진 전무 몫으로 나눠주기 위한 전초과정으로 이뤄졌다고 보는 시선도 있다.
삼성 측은 지난해 4·22 삼성쇄신안을 통해 ‘삼성카드가 보유한 에버랜드 지분 25.64%를 4~5년 내 매각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번 삼성생명 상장 작업이 지배구조 개선과 더불어 에버랜드 계열분리 추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셈이다. 이는 아울러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통해 이재용 전무로의 승계과정을 좀 더 용이하게 하려는 의도로 풀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 이건희 전 회장 명의의 삼성생명 지분을 이재용 전무에게 어떻게 증여할 것인가가 문제로 떠오른다. 이 전 회장이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 20.76%를 이재용 전무에게 고스란히 물려주기 위해선 거액의 증여세가 요구되는데 이를 이건희-이재용 부자가 감당하려 할지 의문이다. 이런 까닭에 삼성에버랜드 지분 25.10%를 보유한 이재용 전무 측이 현재의 지배구조를 고수하려 할 것으로 관측되기도 한다.
한편 이번 상장작업을 계기로 생보사 상장 차익 배분 논란이 재점화할 듯하다. 보험소비자연맹(보소연) 등 시민단체들은 ‘생보사 주주들이 얻게 되는 상장 차익 일부를 보험 계약자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주장을 줄곧 제기해왔다. 생보사의 성장에 주주뿐 아니라 보험 계약자들도 기여를 한 만큼 상응하는 보상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경제개혁연대는 지난 17일 논평을 통해 ‘삼성생명 주요 주주인 이 전 회장과 삼성 계열사들이 상장을 하면서 경영권 유지에 필요한 지분 30%를 제외한 나머지 지분 처분을 통해 약 3조 원의 상장 차익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지난 2007년 정부는 유가증권시장 상장 규정을 개정, 생보사들이 계약자 몫 배분 없이 상장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바 있다. 그러나 보소연 측은 “(정부가) 상장의 길만 터준 것일 뿐이며 차익 배분이 법적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현재 보소연은 삼성·교보생명 유배당 계약자 상장 이익배분 청구 소송을 위한 원고단을 모집 중이다.
조연행 보소연 사무국장은 “삼성생명 원고단은 2000명 정도 모였다. 변호인단과 자문위원단이 구성되는 내년 초 소송을 제기할 수 있을 것”이라며 “100% 승소를 자신한다. 계약자 몫을 주지 않고 상장하긴 쉽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