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내친 이회창을 다시 모신 건 내 작전”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과의 갈등으로 사퇴했던 이회창 전 총리를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사진은 김영삼 대통령과 이회창 신한국당 대표가 담소를 나누는 모습. 일요신문 DB
남는 일은 빈자리를 새로운 인물로 채우는 일이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쭉 사용한 민주자유당이라는 이름이 의미가 없어진 시점이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큰 선거를 앞두고 집권여당이 이름을 바꾸고 개혁을 꾀하는 것을 우리 정치의 나쁜 특징으로 꼽기도 하는데 당을 환골탈퇴태하고 새롭게 출발하자는 것이므로 꼭 나쁘게만 볼 일은 아니라고 본다. 당시 대통령은 여당 총재를 겸임했기에 신한국당의 목표는 대통령 중심의 강한 집권여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는 계파 갈등에 좌우되지 않는 새로운 정당을 만들고 싶었다.
15대 총선은 크게 세 팀이 유기적으로 움직였다. 이원종 청와대 정무수석을 중심으로 한 ‘청와대팀’과 강삼재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한 ‘정당팀’, 그리고 나를 중심으로 한 ‘광화문팀’이었다. 광화문팀은 주로 당 외부 인사 영입과 지역구 여론조사를 맡았다. 세 팀이 각자 역할을 맡아 활동했지만 당 전면에서 총선을 지휘해 줄 상징적인 인물이 필요했다. 나는 이회창 전 총리가 적격이라고 판단했다.
총리직을 맡은 지 4개월 만에 청와대와 대립하며 불명예 사퇴한 이 전 총리였기에 청와대와 여권의 시선은 곱지 않았다. YS 역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그를 끝까지 탐탁지 않아 했다. 하지만 나는 이회창 전 총리와 무소속으로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박찬종 변호사 등을 범여권으로 집결시켜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YS에게는 “이 전 총리를 재신임하는 모습을 통해 포용력을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다”며 직접 부탁했다. 당시만 해도 그가 총선 이후 당 대표가 되고 대선 후보까지 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결국 내 고집대로 이 전 총리는 다시 정치권 전면에 나서게 됐고 15대 총선 전국구(비례대표) 1번과 신한국당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았다. 이 전 총리는 감사원장 시절 특별히 신임하던 부하 직원을 전국구에 배치해 줄 것은 요청하기도 했는데 그가 바로 황우여 현 새누리당 대표다.
이후 나는 과거 중앙조사연구소를 운영하며 선거를 지원했던 경험을 십분 활용했다. 여론조사 결과를 중심으로 적당한 인물을 선별해 옥석을 가려내고자 했다. 1년 내내 새로운 사람을 만났던 시기였다. 여론조사가 아닌 실제 지역구 득표력이 있는지 궁금하면 현지에 사람을 보내 민심 동향을 살피기도 했다.
당시 신한국당 공천의 원칙은 개혁성, 합리성, 참신성, 세 가지였다. 물론 당선 가능성도 중요한 요소였다. 아무리 참신한 인물을 공천하더라도 선거에서 이기지 못한다면 말짱 도루묵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지역구 안배가 중요한 일이기에 능력은 뛰어나지만 인지도가 약한 학계 인사들은 일치감치 지역구에 내려 보내 표밭을 다지도록 권유하기도 했다.
또 총선 때 정당에서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 ‘세모(△·경합) 지역구’다. 15대 총선은 수도권 대부분이 세모지역구들이었다. 그만큼 여야 모두 인적·물적 자원을 아끼지 않으며 총력전을 준비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것이 재야에서 활동하던 이재오 의원과 김문수 경기도지사, SBS 앵커 출신 맹형규 전 행정안전부 장관, 검사 출신 안상수 홍준표 전 한나라당 대표 등이었다.
1996년 4월 12일 새벽, 강삼재 선거대책본부장이 15대 총선 개표 결과 신한국당이 서울에서 예상외로 선전한 것으로 나타나자 기뻐하고 있다. 사진제공=대한매일
당시 선거 과정은 피를 말릴 정도였다. 매일 여론조사를 돌리며 지지율을 파악하고 전략을 세웠다. “오늘은 ○○동 아파트 단지를 공략하라” “○○초등학생 학부모를 만나라” “○○시장에서는 이런 인사를 하라”는 등 하나하나 지도했을 정도였다. 개인 능력이 아닌 여론조사 데이터가 전략보고서로 쓰인 것은 15대 총선이 처음이었다.
이 같은 노력으로 수도권 세모지역구가 ‘동그라미(○·당선유력)지역구’로 변하기 시작했다.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은 서울 47개 지역구 가운데 24개 지역에서 승리했다. 직선제 이후 수도권은 언제나 야권 강세지역으로 생각하고 있었기에 예상치 못했던 성과인 셈이었다.
15대 총선 승리는 여론조사와 같은 데이터를 적극 이용한 것이 주효했다. 당시는 공천심사위원회라는 별도 기구를 두지 않고 당 사무총장이 공천 전권을 갖고 휘두르던 시기였다. 대부분 지역구에서 전략공천이 이뤄졌기에 선거를 앞두고 로비와 청탁이 기승을 부렸다. 15대 총선 역시 전략공천이라는 측면은 동일하지만 그 과정에서 객관적인 여론조사 데이터가 사용됐다는 것이 큰 차이였다.
일각에서는 15대 총선에서 신한국당이 이긴 것은 야권분열 탓이었다고 평가절하하기도 한다. 하지만 당시 신한국당 역시 자민련의 탄생으로 분열된 채 선거를 치렀다. 신한국당 단독 의석만도 과반수에서 11석이 부족한 139석이었고 자민련 의석까지 합할 경우 189석이었다. 반면 야권은 구호만 있을 뿐 전략은 과거 총선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국회에 초선의원 비중이 절반(45%)에 가까워진 것도 문민정부가 만든 변화였다. 이후 정권에서 초선의원의 비중은 계속 늘었지만 그때만큼 개혁 전도사들이 대거 유입돼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었는지는 의문이다. 15대 국회 당시 신한국당 초선의원들은 자기 전공분야에 있어서만큼 충분히 목소리를 낼 수 있었고 당 차원에서도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덕분인지 신한국당이 영입한 정치인 상당수가 현 정치권에서 상당한 거물이 됐고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는 이도 여럿 있다. 반면 지금 집권여당 초선의원들은 계파 이해관계와 여야 대치 정국 속에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총선 승리에 기여한 것은 무척 기쁜 일이었지만 선거가 끝나고 낙천자들을 만나는 것은 고통이었다. 공천을 신청한 사람 10~20명 가운데 1명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두가 나를 적으로 대하는 기분이었다. 낙천자들은 하나같이 내가 본인들을 떨어뜨렸다는 듯이 “당신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 “이렇게까지 나를 무시할 수 있느냐”고 따져 물었다. 그럼에도 군부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3당 합당이라는 호랑이 굴로 들어간 YS가 15대 총선을 기점으로 뜻을 이뤘다는 것을 생각하면 충분히 감내할 수 있었다.
정리=김임수 기자 imsu@ilyo.co.kr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