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과의 사투 속에도 “나는 아직 쓸 게 많다”
최인호 소설 중 영화화된 작품들이 다시 주목 받고 있다. 그는 총 32편의 영화에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원작을 제공하는 등 한국 영화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연합뉴스
최인호를 본격문학 작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가 천재적인 감각을 지닌 글쟁이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대표작인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은 대중소설이었음에도 현대 소비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물화 현상을 날카롭게 짚어낸 작품이었다. 대중적 재미뿐 아니라 비판의식도 잊지 않았던 셈이다.
최인호는 긴 분량의 대하역사소설을 여러 작품 집필했고 수십 편의 장편을 남길 만큼 다작의 작가였다. 술자리에서 동료 문인들에게 밝히길 초기 대표 단편인 <술꾼>은 앉은 자리에서 단 몇 시간만에 쓴 작품이라고 한다. 영화화된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이 잇달아 히트하면서 <걷지 말고 뛰어라>로 직접 연출을 맡아 감독 데뷔를 하기도 했다. 배창호 감독과 함께한 <고래사냥>은 동명 주제곡의 가사를 직접 쓰기도 했다.
그는 대중문학과 순수문학의 경계를 개의치 않았고, 다방면에 걸쳐 열정적으로 창작했다. 덕분에 호스티스 작가, 퇴폐 작가라는 비난으로 괴로워하기도 했다. 이런 그에 대해 배창호 감독은 “독자와 관객에게 진정한 삶의 위안을 주고, 깊은 의미를 줄 수 있다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열정적으로 창작했다”고 전했다.
최인호 작가는 1945년 해방 직후 서울 중구에서 변호사 집안의 3남3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그 세대의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지방 출신이었던 것에 비해 최인호는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하고 살아온 ‘도시의 아이’였다. 1980년대 황석영이 계급을 소재로 한 민중문학의 대표자였다면 최인호는 세련된 도시적 감수성과 청년문화의 아이콘을 자처했다.
수필집 <인연>(2010)에 의하면, 1966년엔 단편을 수십 편 써서 모든 신문사 신춘문예에 응모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두 떨어지자, 조선일보에 직접 찾아가 자신의 응모작이 확실히 접수된 것이 맞는지 묻기도 했다고 밝히고 있다.
군 복무 중이던 다음해 그는 22세의 나이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다시 한 번 도전하면서 아예 ‘당선소감’을 동봉할 만큼 자신감이 넘쳤다. 이때 조선일보의 심사위원이 <소나기>의 작가 황순원이다. <인연>에서 작가 스스로 밝힌 것에 의하면, 최인호는 황순원의 막내 아들과 고교동창으로 늘 어울려 다녔다고 한다. 처음엔 황 선생이 자기 아들이 악동인 자신과 어울려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대학에 입학하고 등단을 하면서부터는 친아들처럼 아껴주었다고 한다. 결혼 당시 주례를 서주기도 했으며 첫 딸이 태어났을 때 ‘다혜’라는 이름을 지어준 것도 황 선생이었다. 이 이름은 후에 <겨울 나그네>의 여주인공 이름이 된다. 1972년 26세의 나이로 조선일보에 <별들의 고향>을 연재한 것도 황순원의 추천 덕분이었다. 원래 <별들의 무덤>이었던 제목을 <별들의 고향>으로 바꾸도록 권유한 것도 황순원이었다고 한다.
문학평론가 김형중 조선대 교수는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도시로 온 농촌 아가씨들이 직업을 얻지 못하는 상황 등 시대의 흐름 및 풍속을 잘 이해한 작가”라며 “상업적인 감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시대와 감수성의 변화를 읽는데 능했다. 지금 읽으면 재평가할 만한 대목이 많다. 당대의 문화사적인 사료로 읽으면 좋겠다”고 평가했다.
이어 김 평론가는 “산업사회 인간소외 문제를 최인호처럼 빨리 포착해 낸 작가가 없다”면서 “동시에 문학을 영화, 드라마 같은 인접 영역으로 확장시킨 선구자적 작가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 작가는 악필로 가득한 육필 원고로도 유명하다. 신문사마다 그의 전담 교열기자가 있을 정도였다. 나이 든 작가들이 뒤늦게 컴퓨터를 배워 자판으로 쓴 원고를 출판사에 넘길 때에도 그는 끝내 펜을 고집했다. 작가들이 늦은 나이에도 자판을 익힌 것에 대해 한 원로 소설가는 “손으로 쓰면 출판사에서 원고를 받아주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는데, <길 없는 길>(2008) 같은 불교를 소재로 한 책도 100만 부를 넘게 팔아치운 베스트셀러 작가이기 때문에 육필 원고도 출판사에서 불평 없이 받아준 것이다.
실제로 그는 이문열, 조정래, 황석영, 박범신, 신경숙 등과 함께 판매량 및 인세에서 항상 최고 대우를 받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1997년 한국일보에 연재한 <상도>는 300만여 부가 팔려나갔다. 이후 동명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중국에서도 출간된 소설은 200만여 부의 공식판매를 기록했다. 출판계의 한 관계자는 “해적판이 정본보다 5~10배 더 팔리는 중국시장의 특성상 1000만 부 정도 팔리지 않았을까 추측한다”고 귀띔했다.
한편 최 작가는 첫 장편소설 <별들의 고향>(1973)이 영화화되면서 영화계와도 인연을 맺었다. 그는 총 32편의 영화에서 시나리오를 쓰거나 원작을 제공했다. 사실상 최인호는 1970년대 한국영화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지난 9월 25일 타계한 최인호 작가의 빈소에 조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최 작가와 배창호 감독은 <고래사냥> <적도의 꽃> <깊고 푸른 밤> <황진이> <안녕하세요 하나님> 등 7편의 작품을 함께했다. 배 감독은 “성품이 열정적이고, 따뜻해서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며 “촌철살인의 유머가 있어서 만나면 즐거웠다”고 고인에 대해 추억했다.
이어 배 감독은 “내가 시나리오를 쓸 때 작업실 책상 위에 성경책을 올려놓곤 하셨다”며 “탈고가 끝나면 원고지 위에 성경책을 놓고, 내 손과 형의 손을 포개고 함께 기도했다. 그것이 우리에겐 작품을 끝내는 의식이었다”고 말했다.
최인호에게 종교는 문학의 가장 주요한 소재였다. 그는 1987년 어머니의 죽음을 겪고 천주교에 귀의하면서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을 연이어 발표했다. 2008년 침샘암 판정을 받은 후 초기의 실험적인 스타일로 회귀한 작품인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발표했고, 그 후 암과 싸우며 <인생>을 내놨다. <인생>은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간 소식지인 <서울주보> ‘말씀의 이삭’란에 실은 자신의 투병기와 신앙 이야기를 담은 수필집으로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됐다.
<인생>에선 암과 싸우면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창작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모습과 신에게 의지하려는 겸손하고 소박한 종교적 감정을 엿볼 수 있다.
배 감독은 “암 투병 소식 이후엔 주보에 연재한 묵상록을 통해 근황을 확인했다”며 “작년에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 육체적으론 쇠약했지만 창작의욕은 매우 컸다. 당시 내게 ‘21세기에도 대중적 감독의 명성을 유지하라’며 ‘나도 아직 쓸 게 많다’고 의욕을 보이셨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가 안 간 게 아니라 인호 형 스스로 많이 안 만나셨다. 사색과 인내의 시간을 가지시며 묵상록을 집필하신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 작가는 <인생>에서 “5년에 걸친 투병 생활 중에 내가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글을 쓸 수 없는 허기였다. 피어나지 않으면 꽃이 아니고, 노래 부르지 않으면 새가 아니듯, 글을 쓰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작가가 아니다. (중략) 나는 내가 작가가 아니라 환자라는 것이 제일 슬펐다. 나는 작가로 죽고 싶지, 환자로 죽고 싶지는 않았다”고 썼다. 시대를 예민하게 읽고 자기 세대의 거대한 풍속화를 그렸던 소설가 최인호는 하늘나라에서도 여전히 글을 쓰며 작가로 살고 있을 것이다.
신상미 기자 shi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