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끝내 이루지 못한 꿈 “소년병을 기억하라”
6·25참전 소년병은 1만여 명으로 전체 군인의 30%에 달했다. 앞줄 오른쪽이 고 이봉갑 씨. 사진출처=<우리들의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어떠한 예고도 없이 입대하게 된 이 씨 때문에 집안도 발칵 뒤집어졌다. 갑자기 사라진 아들을 찾아 어머니는 길거리를 헤맸다. 며칠이 흘러 이 씨와 함께 징집됐으나 신체검사에서 요령껏 불합격 판정을 받고 귀가한 청년이 그의 소식을 전해줬다. 그날부터 이 씨의 어머니는 매일같이 절에서 치성을 드리고 집에서도 밤낮으로 정화수를 떠놓고 빌었다. 그저 아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게만 해달라는 간절한 기도였다.
같은 시각 이 씨는 밀양역에서 무개화차에 실려 부산으로 이동했다. 그제야 군복 일습을 지급받고 머리를 깎은 이 씨는 평범한 소년에서 ‘소년병’이란 이름의 군인이 됐다. 그의 목에는 0200309라고 적힌 군번줄도 걸렸다. 곧장 속성으로 10일간의 교육이 진행됐는데 당시 배웠던 군가는 이 씨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단 한 글자도 기억에서 잊히지 않았다.
훈련이 끝나자마자 이 씨는 바로 출동 명령을 받았다. 부산에서 경북 영천시 신녕읍까지 북상해 처음으로 M1소총과 실탄을 지급받았다. 이 씨는 1사단 12연대 2대대에 소속돼 당시 사단장이었던 백선엽 준장과 같은 공간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이후 이 씨의 삶은 철저히 ‘전쟁터의 군인’일 뿐이었다. 그가 머물던 낙동강전선엔 이 씨와 같은 처지의 소년병 1만여 명이 있었는데 이는 전체 군인의 30%에 달했다. 총을 들면 자신의 몸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연약했던 소년병들은 포탄과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생사를 함께하며 나라를 지켰던 것이다. 수도 없이 전우가 죽어나가고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지옥 같은 나날이었지만 이 씨는 “내 나라 내가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힘든 시간을 버텨냈다.
전쟁이 극에 달할 무렵 이 씨는 최후의 격전지로 불리는 다부동 전투에도 투입돼 생사를 넘나들었다. 지금 당장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보다는 ‘여기서 무너지면 끝’이라는 생각이 또 다시 총을 쥐게 만들었다.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다행히 전투는 승리로 끝났고 시간은 흘러 휴전이라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소년으로 입대한 그는 이제 어엿한 청년이 돼있었다. 휴전에도 이 씨는 어수선한 나라를 위해 군복무를 계속했고 1954년 5월 15일 일등중사로 제대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민간인으로 돌아온 이 씨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한창 공부를 해야 할 시기 소년병으로 전장을 누빈 터라 제대로 배운 것이 없어 한참을 고생해야 했다. 그래도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이 씨는 가정을 꾸려 평범하지만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워낙 어린 나이에 겪은 참상에 몸과 마음에 후유증이 남았던 것. 무엇보다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쳤던 전우들이 아무런 대우도 받지 못한 채 잊히는 게 가슴 아팠다. “낙동강과 대한민국은 아이들이 지켰다”고 아무리 얘기해봤자 누구 하나 귀 기울여주지 않았고 환갑이 넘어서자 하나둘 소년병들이었던 동료들이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마냥 있을 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 마침내 이 씨와 뜻을 함께하던 동료들은 1996년 소년병의 존재를 알려야겠다는 일념 아래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를 결성했다.
이곳에서 이사로 활동했던 이 씨는 ‘6·25 참전 소년병(정규군) 보고서’ 펴내는 등 수많은 노력 끝에 차츰 소년병의 존재를 알려갔다.
그러나 4년 전 갑작스러운 병마가 그를 덮쳤다. 반신불수의 상태로 요양원에서 여생을 보내야 했던 이 씨는 “어린 나이에 나라를 구하겠다는 생각만 갖고 입대한 우리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후손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간직한 채 지난 9월 29일 전우가 기다리는 곳으로 떠났다. 안타깝게도 여전히 교과서나 한국국방전서 등 공식적인 기록 어디에도 ‘소년병’이란 용어가 등재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 씨와 함께 활동했던 박태승 6·25참전소년지원병중앙회 회장은 “병으로 인해 몇 년간 활동하지 못했지만 마음으로 항상 함께했다. 그는 정말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자였다. 더 이상 힘들게 눈 감는 소년병들이 없도록 국가에서 신경을 써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