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전대통령에 의해 처음 싹을 틔운 ‘행정수도 이전계획’이 부활하기까지는 정확히 25년의 세월이 걸렸다. 사반세기 동안 이 프로젝트는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서서히 잊혀져가는 운명에 처해 있다가 극적으로 부활한 셈이다. 국가의 근간을 뿌리채 흔들 만큼 워낙 거대한 프로젝트였던 탓에 여기에 관련된 인사들은 그간 베일에 가려졌다.
최근 이 자료의 개방과 함께 프로젝트 수립 과정에 대한 갖가지 뒷얘기와 관련 인사들의 이름이 하나둘씩 밝혀지고 있다.
우선 ‘행정수도 이전계획’의 최초 창안자는 박 전대통령인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수도 이전이라는 말이 처음 세간에 회자된 것은 지난 1977년 2월이었다. 당시의 명칭은 ‘임시행정수도’였다. 즉 통일 이후를 대비해서 서울은 상징적인 수도로 계속 남겨둔 상태에서 남한 국토의 중간 지점에 임시수도를 건설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그만큼 수도 이전, 즉 ‘천도’는 사회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미칠 수 있다는 고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 이같은 구상은 1972년 유신개헌 이후부터 이미 박 전대통령의 머리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최초로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제기한 이가 71년 대통령선거 당시 경쟁자였던 김대중 후보였기에 공식적으로 언급하지 못했던 측면이 있었다.
자주국방의 기틀에 주력했던 박 전대통령은 우선 첫번째 카드로 73년 중화학공업화 추진 계획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두번째 카드로 내민 것이 행정수도 이전계획이었던 것. 박 전대통령은 이미 75년 8월 진해 하계 휴양지에서 청와대 출입기자들과 환담하면서 ‘보안유지’를 전제로 이같은 구상을 밝혔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그해 12월 그는 김종필씨와 김재규 건설부 장관에게 은밀하게 ‘하명’을 내렸다. JP에게는 후보지 물색 작업을, 김 장관에게는 지질조사•분석 등을 맡겼다. 두 사람 모두 당시 ‘2인자’ 다툼을 벌일 만큼 대통령의 핵심 측근이었다. 특히 JP는 당시 국무총리 자리에서 물러나자마자 이 작업에 참여, 그의 역할에 의문이 제기됐다.
행정수도 이전계획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은 77년 3월. 청와대 중화학기획단의 오원철 단장과 박봉환 부단장이 실무자였다. 그러나 박 전대통령에 이어 청와대 주인이 된 최규하 전 대통령은 이미 총리 시절부터 이 계획에 대해 부정적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이 태평한 시대에 천도가 웬말이냐”고 언급했다는 것.
전두환 정권의 탄생과 함께 ‘백지계획’의 주역들은 자연스럽게 역사의 뒷편으로 밀려났다. 박 전대통령과 김재규씨는 10•26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죽었고, JP와 오원철 수석은 신군부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렸다.
유일하게 5공 정권에서도 중용되었던 박 부단장 역시 역부족이었다. 당시 박 부단장의 경제 이론을 중시한 전 전대통령도 수도 이전 계획에 대해서만큼은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백지계획’의 주역들 가운데 현재 생존하고 있는 사람은 오 전수석이다.
오 전수석은 관계가 소원했던 5공 정권이 끝나자마자 이 프로젝트를 들고 노태우 정권을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당시 6공 정권의 황태자로 불렸던 박철언 체육부장관의 시큰둥한 반응으로 끝내 묻히고 말았다. 오 전수석은 이 방대한 자료를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려놓는 것으로 계획 무산의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단독] "총장님 지시"라며 개입…윤석열 '비밀캠프' 소유주 비선 의혹
온라인 기사 ( 2024.12.13 10: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