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그레이스 위해…다시 한번 굿샷
안시현이 2년 공백기를 접고 KLPGA투어 진출권을 획득하는 등 제2의 골프인생을 준비하고 있다.
안시현은 시드전을 통과한 그날의 감동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시드전을 마친 후 밤길을 달려 인천 집으로 차를 몰고 온 안시현은 자고 있던 딸을 깨워 볼에 입맞춤했다. 그 순간 안도감과 행복감이 밀려왔다. “이제 큰 짐 하나를 덜었구나” “이제부터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들이 느릿느릿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혼 후 인생을 포기하려는 생각이 불쑥 불쑥 들 때마다 자신을 일으켜 세운 딸 그레이스가 너무나 고마운 순간이기도 했다.
결혼 전 안시현은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식당에서 시끄럽게 뛰어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짜증이 밀려왔다. 하지만 자연분만으로 딸을 낳은 후 이런 생각은 백팔십도 달라졌다. “저렇게 뛰다 다치면 어떡하지?”란 걱정이 먼저 들었다. 딸 그레이스는 안시현에게 살아가는 분명한 이유다. 평생 살면서 ‘나보다 소중한 존재’가 처음 생겼고 ‘내가 챙겨야 할 또 다른 나’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안시현에게 딸 그레이스는 끊임없이 삶의 의욕을 충전시켜 주는 배터리 같은 존재다. 본인 스스로 강한 모성애에 놀랄 정도다.
안시현은 팔자가 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굴곡 있는 삶을 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 할 정점의 순간을 맛보기도 했고 반대로 동정을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정점은 2003년이었다. 안시현은 제주도에서 열린 미국LPGA투어 CJ 나인브릿지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갑자기 세상이 바뀌었다. 엄청나게 바빠졌고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 없이 그해 겨울 미국으로 건너갔다. 영어 한마디 못하던 안시현은 이듬해 미국LPGA투어 신인왕에 올랐으며 매니저도 없이 홀로 다니며 8년간 경쟁력 있게 투어생활을 했다. 간혹 외로움을 느낄 때도 있었으나 별다른 불만이 없는 삶이었다.
2003년 안시현은 미국 LPGA투어 CJ 나인브릿지 클래식에서 우승하며 ‘신데렐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됐다.
지난 11월 스폰서 초청으로 출전한 ADT캡스 챔피언십은 또 다른 전환점이 됐다. 미국에서 뛸 때 쓰던 낡은 클럽을 들고 출전한 그 대회에서 안시현은 예선통과는 물론 공동 9위라는 대단한 성적을 냈다. 26개월 만의 복귀전 치곤 놀라운 결과였다. 안시현은 생각이 바뀐 게 성공적인 복귀전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과거엔 시합의 중요성도 몰랐고 뭘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은 분명한 목표가 생겼다. 오로지 딸 그레이스를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좋은 성적을 내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다, 부모님에게 받았던 사랑과 관심 그 이상을 해주고 싶다는 게 엄마 안시현의 마음이었다.
안시현은 요즘 열심히 몸을 만들고 있다. 오전엔 인천 집에서 딸과 시간을 보내고 오후에 잠실로 이동해 2시간씩 체력훈련을 하고 있다. 출산으로 인해 망가진 몸을 회복시키는 작업이다. 이 작업이 끝나면 내년 1월 초 미국으로 동계훈련을 떠난다. LA 인근 얼바인에 살고 있는 여동생 집에서 머물며 훈련할 계획이다. 물론 딸도 데려간다.
안시현에게 LA는 10년 전 겨울 미국LPGA투어 데뷔를 준비하던 도시다. 안시현은 “친구 최혜정 프로가 올랜도에서 함께 훈련하자고 했지만 LA로 가기로 했다. 10년 전 다녔던 골프장과 연습장이 그대로라는 소리를 들었다.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말했다. 10대 후반의 어린 나이에 미지의 세계를 향한 출발을 준비하던 ‘천사들의 도시’에서 서른이 된 안시현이 ‘제2의 골프인생’을 준비한다. 인생의 아이러니다.
안시현은 “내년 시즌 꼭 우승하고 싶다”고 했다. 딸 그레이스 때문이다. 상금을 많이 따야 딸이 원하는 걸 다 해줄 수 있다는 모성애의 발로다. 안시현은 국내무대에서 1승을 기록 중이다. 2004년 88CC에서 열린 엑스 캔버스 여자오픈에서 선배 박지은을 상대로 역전 우승을 거뒀다. 우승이 쉽지 않아 보이는 데이터다. 하지만 안시현에겐 ‘정신적인 성숙’이란 경쟁력이 생겼다. “잘나갈 때 좀 더 겸손했어야 했다.” “잘나갈 때 나를 잘 이끌어 줄 멘토가 있었더라면….” “내 자신을 더 낮췄어야 했다.” 그랬으면 굴곡 많은 삶을 살지 않았을 것이란 참회다. 다시 출발선에 선 안시현이 아무쪼록 내년 봄엔 좀 더 여유로운 얼굴로 KLPGA투어의 어린 경쟁자들을 만나기를 기대해 본다.
이강래 골프포스트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