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에 튜브 차고 노래 그는 ‘진짜’ 가수였다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다 죽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는 김갑순 씨는 지난 크리스마스 이브 공연을 마지막으로 다시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사진제공=만수무강엔터테인먼트
충남 논산에서 소를 키우며 농사일을 돕던 고등학생 김 씨는 일을 할 때면 언제나 노래를 불렀다. ‘아리랑’을 부르며 모내기를 할 때면 고된 하루도 금방 저물었다. 김 씨는 화려한 무대 위에서 노래를 부르며 박수갈채를 받는 ‘가수’가 된 자신의 모습을 꿈꿨다.
김 씨의 어머니는 그런 김 씨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김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어머니는 소 한 마리를 팔아 어렵게 돈을 마련해 줬다. 김 씨는 전 재산과 다름없는 ‘소판 돈’을 들고 가수가 되기 위해 홀로 서울로 상경했다.
1988년, 그토록 소원했던 김갑순이란 이름을 내건 앨범이 세상에 나왔다. “이별한 지 몇 해냐 두고 온 원산만아, 해당화 곱게 피는 내 고향은 명사십리”로 시작하는 김 씨의 노래 ‘명사십리’는 가요무대에도 소개됐다. 그러나 김 씨의 청운에 부푼 꿈은 얼마가지 못했다. 신곡을 발표한 이후 앨범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면서 김 씨의 오랜 무명생활이 시작된 것. 무명생활이 길어지면서 김 씨는 노숙인, 일용직 노동자로 전전하기도 했다. 그야말로 ‘쫄딱’ 망한 것이다. 김 씨는 결국 어머니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작은 사진은 김갑순 씨의 영정사진과 그의 동생 개그맨 김철민 씨의 모습으로 OBS ‘독특한 연예뉴스’ 방송 화면을 캡처했다.
너훈아로 살았던 지난 25년간 김갑순 씨는 바쁜 나날을 보냈다. ‘김갑순’이라는 이름으로는 중앙무대는 고사하고 밤무대조차 서기 어려웠지만 ‘너훈아’는 달랐다. 축제가 빈번한 봄가을 이은 모창가수들에겐 ‘성수기’로 통했지만 ‘너훈아’ 김 씨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말이었다. 김 씨는 4계절 상관없이 하루 3~4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이미테이션 가수 세계의 톱스타였다. 밤무대에서도 너훈아를 모셔가려는 경쟁이 치열해 지면서 그야말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김 씨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나훈아’가 되기 위해 나훈아 원곡 테이프를 듣고 또 들었다. 하루에 나훈아 노래만 50곡 이상을 불렀다. 나훈아와 조금 더 비슷해지기 위해서 얼굴성형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김 씨는 생전 한 인터뷰에서 “내가 나훈아 씨는 아니지만 무대에 서면 팬들이 대리만족을 느낀다”라며 너훈아로 사는 인생의 보람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너훈아로 살았던 지난 25년의 세월이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김 씨의 공연을 본 관객들은 격려와 환호를 보냈지만 비웃음과 야유를 보내는 관객도 있었다. 특히 밤무대 공연을 할 때면 술에 취한 손님들이 김 씨에게 “네가 나훈아야 인마, 가짜 나훈아”라며 무대에서 내려올 것을 강요할 때도 있었다. 나훈아의 그림자 인생을 사는 김 씨에게 ‘짝퉁’ ‘가짜’라는 비아냥은 큰 상처였다. 밤무대 사회를 보는 친한 동생이 김 씨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계속해서 ‘짝퉁’ 나훈아라고 소개하자 10년간 등을 진 적도 있었다. 김 씨는 언젠가는 김갑순이라는 이름으로 가수생활을 할 것이라는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너훈아 김갑순 씨는 계절 관계 없이 하루 평균 3~4개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이미테이션 가수계의 톱스타였다.
김 씨와 15년간 무대에서 일했다는 서울코리아나기획 이철웅 대표(52)는 “간암진단을 받고 시한부 판정을 받고서도 ‘무대 위에서 노래하다 죽겠다’며 병을 숨기고 끊임없이 공연을 해왔다”며 “결국 공연 중 쓰러져 병원에 입원을 했다. 그런데 지적장애인 보호시설인 은혜로운 집에서 얼굴만이라고 보고 싶어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대에 올랐다. 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마지막 무대가 됐다”고 말했다.
김갑순 씨의 동생 개그맨 김철민 씨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형은 투병 중에도 마이크를 놓지 않았다. 복수에 물이 차서 튜브를 차고 있으면서도 지인들에게 노래를 불러줬는데 그날 눈물바다가 됐다”고 전했다.
언젠가는 김갑순이라는 이름으로 가수생활을 하게 되는 날을 기다렸다는 김 씨는 지난해 2013년 12월 24일 ‘너훈아’라는 이름으로 선 무대가 마지막이 됐다. 자신의 입버릇처럼 노래를 부르다 무대 위에서 쓰러진 김 씨는 결국 지난 12일 오랜 투병 생활 끝에 숨을 거뒀다. 이철웅 대표는 “나훈아의 ‘고향역’을 가장 즐겨 불렀던 김 씨가 생각이 난다. ‘모방’가수였지만 무대만큼은 진짜였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