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문판사’ 대신 ‘포청천’이 떡 김승연 회장 ‘산넘어 산’
‘횡령·배임 혐의’ 김승연 한화 회장 측은 집행유예 만들기에 총력이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천신만고 끝에 ‘징역 3년’이라는 집행유예 요건을 채웠지만, 대법원에서 형이 확정되면 실형을 살아야 하는 상황이었다. 대법원은 법 적용에 문제가 없는지의 여부만을 판단하는 ‘법률심’이기 때문에 2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사건에 대해 집행유예를 선고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한화그룹 측으로서는 대법원이 법률적용을 잘못했다는 이유로 사건을 2심으로 다시 돌려보내는 ‘파기환송’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기적처럼 대법원은 지난해 12월 ‘배임액수를 다시 산정하라’며 사건을 파기환송했다.
김 회장 측은 서울고등법원에서 벌어질 파기환송심에서 배임액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추가로 467억 원을 공탁하는 등 ‘집행유예 만들기’에 총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실제 집행유예 가능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는 게 법조계의 대체적인 전망이다. 특히 재판장인 김기정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52·연수원 16기)는 횡령·배임 범죄에 대해 가차 없는 형을 선고하기로 이름이 높다.
과거 김 회장처럼 부실기업에 거액의 회삿돈을 부당 지원한 혐의로 기소된 국제건설과 코아정보시스템의 실소유주 윤 아무개 씨에게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고, 같은 혐의로 기소된 인터넷 사이트 ‘디시인사이드’ 대표 김 아무개 씨에 대해서도 징역 2년 6월을 선고한 바 있다. 당시 윤 씨의 범죄액수는 187억, 김 씨는 70억 원에 불과했다.
혐의는 다르지만 1000억 원대의 불법대출을 한 혐의로 기소된 유동천 제일저축은행 회장에게는 징역 8년의 중형을 선고했다. 재밌는 점은 김 회장의 파기환송심 재판장은 원래 김기정 부장판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당초 서울고등법원의 사무분담내규에 따라 김 회장 사건은 김동오 부장판사(57·연수원 14기)가 재판장인 형사2부에 배당됐다. 하지만 김 부장판사와 김 회장이 경기고 동문관계여서 부적절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대리재판부인 형사5부로 바뀌었다.
실낱같은 희망은 있다. 대법원에서 횡령·배임 액수를 다시 산정하라고 했기 때문에 400억 원 정도의 혐의부분이 무죄가 돼 감형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 게다가 재판부가 김 회장의 건강상태가 극도로 나쁜 점을 부담스러워 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면서 조심스럽게 집행유예 전망이 흘러나오기도 한다.
‘사기성 CP 발행 혐의’ 구자원 LIG 회장(위)과 아들 구본상 LIG넥스원 부회장은 감형을 노리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다수의 개인 투자자를 상대로 거액의 피해를 줬다는 점 등 죄질이 좋지 않아 감형이 쉽지 않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검찰이 피해액을 보전한 점을 고려해 1심 때보다 3년씩을 낮춰 구 회장에 대해 징역 5년, 구 부회장에 대해서는 징역 9년을 구형한 점을 고려하면 법정 구속된 구 회장에 대해 집행유예가 나오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감형이 있을 거라는 기대는 가능한 상황이다.
특히 이 사건은 동양그룹 쪽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다. 현재현 회장 역시 구 회장과 마찬가지로 그룹 부도위험을 알면서도 사기성 CP를 발행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현 회장은 구 회장과 똑같이 여환섭 부장검사(46·연수원 24기)가 이끌던 서울중앙지검 특부수의 수사를 받았다. 사법연수원을 2기로 수료하고 1975년 부산지검 검사로 임관했던 현재현 회장은 20년이 넘는 터울의 후배검사들에게 덜미를 잡혀 재판을 받게 된 셈이다.
이날에는 재벌가 총수들이 집안싸움을 벌인 삼성가 상속분쟁에 대한 민사소송 선고도 잡혀있다.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상속재산을 놓고 분쟁을 벌이고 있는 삼남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장남 이맹희 씨에 대한 항소심을 맡고 있는 서울고등법원 민사5부(윤준 부장판사)도 이날 결론을 내린다. 1심 재판에서 인지대만 127억 원에 달하는 거액의 소송을 진행한 양측은 불꽃 튀는 공방을 벌였지만 이맹희 씨 측의 완패로 끝난 바 있다.
이맹희 씨는 아버지가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해둔 주식을 이건희 회장이 다른 형제들 몰래 자신의 명의로 변경했다고 주장하며 소송을 냈었다. 이건희 회장과 삼성에버랜드를 상대로 삼성생명 주식 824만 주와 삼성전자 주식 20주, 그리고 배당금 1억 원 등 약 7000억 원을 나눠달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건희 회장 누나인 이숙희 씨와 형 창희 씨의 며느리 최선희 씨도 소송에 합류해 이맹희 씨가 분할 요구 액수를 높이며 소송가액은 4조 원을 넘었다.
1심 재판부는 삼성생명 50만 주가 상속재산으로 인정되지만,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제척기간’ 10년이 경과됐다고 판단했다. 현행 민법상 상속재산을 회복해달라는 청구는 상속침해가 있은 날로부터 10년이 지나면 침해주장을 하지 못하게 돼있다. 상속관계를 조속히 안정시키기 위한 입법이다. 나머지 주식과 배당금은 상속재산이 아니어서 상속인들에게 귀속되는 것으로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이맹희 씨 측의 주장을 거의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사실상 이건희 회장의 완승으로 끝난 결과였다.
법조계에서는 이맹희 씨 측이 새로운 쟁점을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이상 항소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다. 소송을 먼저 건 이맹희 씨 측이 먼저 손을 내밀어 화해 제스처를 보인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열린 공판에서 이맹희 씨 측은 화해를 위한 조정을 재판부에 신청했지만, 이건희 회장 측은 “이번 사건의 본질은 돈 문제가 아닌 원칙과 경영 승계에 대한 정통성인데, 이맹희 씨 측이 정통성을 훼손하고 있는 상황에서 합의를 하는 것은 원칙에 어긋난다”며 한껏 여유 있는 자세로 이를 거부했다.
다만 이맹희 씨 측이 2심에서 이건희 회장이 부정한 방법으로 경영권을 획득했다는 주장을 들고 나오면서 이 부분이 변수가 될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이맹희 씨 측은 항소심에서 이병철 창업주가 생존 당시 ‘승지회’를 통해 삼성그룹을 집단 체제로 경영할 것으로 지시했으며, 이건희 회장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재판장을 맡고 있는 윤준 부장판사(53·연수원 16기)는 법조계에서도 소문난 신중론자로, 윤관 전 대법원장의 아들이기도 하다. 법원 안팎에서는 윤 부장판사가 법리적으로 달리 판단할 부분이 없는 이상 쉽게 1심 판결을 뒤집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선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