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농민운동가 출신의 생기마을 ‘촌장’ 정성헌씨가 최근 마사회 회장으로 내정됐다. 생기마을은 많 은 유명인사들이 회원으로 있으며 그들의 ‘쉼터’ 이기도 하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강원도 첩첩산중 오지에 유기농법으로만 농사를 짓는 마을이 있다. 이곳이 바로 생기마을. 마을이라고 해봐야 황토벽돌집과 통나무집만 덩그러니 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현역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과 시민단체장, 문화·예술계 인사 등이 이곳을 자주 방문한다는 점이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들은 이 오지마을까지 찾아오는 것일까.
마을 촌장이자 남북강원도협력협회 이사장인 정성헌씨(58) 때문이다. 정씨가 지난 99년 처음 이 마을 조성한 다음부터 사회 유명 인사들의 발길이 이곳까지 닿고 있는 것. 그러면 이 마을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비밀 아지트’와 같은 이 마을을 찾아갔다.
강원도 춘천시 북산면 부귀리에 자리잡은 ‘생기마을’. 기자가 3년 전 처음 이곳을 방문할 때만 해도 생기마을은 오지였다. 아스팔트 도로를 벗어나 겨우 승용차 한 대 통과할 수 있는 비포장도로로 3km 남짓 산속으로 더 들어가야만 다다를 수 있는 곳이 바로 ‘생기마을’이다.
그런데 지난 7월26일 방문했을 때는 3년 전과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울퉁불퉁했던 비포장도로 일부가 시멘트도로로 변해 있었다. 또 덩그러니 황토벽돌집 한 채만 있었던 마을에는 통나무집 한 채가 더 생겼다. 시멘트도로는 지난해 9월 춘천시의 ‘오지종합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
생기마을에 도착했을 때 ‘촌장’ 정성헌씨(58)는 일꾼 한 명과 함께 고추밭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복숭아나무에서 복숭아를 따 풀잎으로 쓱쓱 몇 번 문지르더니 취재진에게 권하며 밭에 풀썩 주저앉았다.
“취재는 무슨 취재, 그냥 구경이나 하고 가”라며 좀처럼 입을 열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먼길을 달려온 취재진의 성의 때문인지, 생기마을의 유래부터 하나씩 풀어놓았다.
생기마을이 처음 문을 연 것은 지난 99년 5월. 정씨와 뜻을 같이 한 회원 30여 명이 5백만원씩 갹출, 논밭 1만2백 평을 사 가지고 만든 유기농 마을이다. 말이 좋아 ‘마을’이지 생기마을에는 정씨의 집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도 왜 생기마을일까. 비록 회원들이 전국 각지와 해외에 뿔뿔이 흩어져 살아도 늘 마음만은 정씨와 함께 한다는 의미다.
▲ 생기마을을 지키는 정씨의 벽돌집. | ||
또 최열 환경운동연합 대표를 비롯한 시민사회단체 회원들이 포함돼 있으며, 문화예술계 인사로는 생명사상가이자 시인인 김지하씨와 연극연출가 겸 국악인 임진택씨, ‘춤꾼’으로 유명한 서울대 이애주 교수 등이 있다.
이밖에 박용수 강원대 총장 등 대학교수들과 한의사 등도 자주 이곳을 방문하는 회원들이다. 생기마을 회원들은 정씨가 70년대부터 시민사회단체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가끔 이 산골 오지마을에 모여 ‘생명과 평화, 협동, 자조’라는 큰 주제 안에서 작은 세미나를 열기도 하고, 즉석에서 공연을 열기도 한다. 가장 최근에는 지난 6월29일부터 7월1일까지 3일 동안 세미나와 공연이 열렸다.
하지만 세미나와 공연이 생기마을을 세운 주목적은 아니다. 정성헌씨는 “이곳은 특별한 규칙이 없는 열린 공간”이라고 소개한다. 회원이든 비회원이든 누구나 방문해도 무방하다는 것.
그는 “여기에 오면 스스로 알아서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밭작물을) 가져가도 된다”고 말했다. 콩과 고추, 호박, 감자, 옥수수, 미나리 등 생기마을에서 재배한 ‘무공해 야채’를 얼마든지 가져가도 좋다는 뜻이다. 대신 여기에 오면 스스로 밭에 나가 일을 한다는 것. 정씨는 “계동이(박계동 전 의원)는 촌놈 출신이라 일을 상당히 잘한다”고 칭찬했다.
또 “부영이형(이부영 의원)도 감자를 캘 때는 감자를 캔다. 여기서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들은 최근 들어 신당창당 문제 때문에 이곳을 자주 방문하고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는 “이애주 교수는 전국을 순회한다고 해서, 또 지하형(김지하 시인)은 몸이 안 좋아서 자주 못 오고 있다”고 전했다.
이처럼 생기마을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모여 휴식을 취하면서, 정신적인 에너지를 재충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생기마을에는 한때 유기농사꾼을 꿈꾸며 6명의 젊은이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채 1년도 안돼 모두 이곳을 떠났다고 한다. 정씨는 “유기농 공동체를 만들어보겠다는 종교적 신념을 갖고 온 청년들이 있었지만 모두 떠났다”며 “농사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일이 좋아서 해야 한다”는 자신의 농사 철학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 마을 ‘촌장’이자 ‘터줏대감’인 정성헌씨가 최근 한국마사회 회장으로 내정됐다는 보도가 났다. 머지 않아 이곳을 떠나 과천 경마장으로 출근해야 할지도 모른다. 정씨는 “(마사회회장 내정 사실에 대해) 아직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다”며 무덤덤하게 담배를 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