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완화 기조 후퇴하나’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두산그룹 회장)도 5월 3일 미국 뉴욕에서 개최될 코리아소사이어티 연례만찬에서 벤플리트상을 수상할 예정이었는데, 최근 주최 측에 불참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벤 플리트상은 한국전쟁 당시 미8군 사령관이었던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을 기리기 위해 코리아소사이어티가 1992년에 제정했다. 매년 한미관계 발전에 공로가 큰 인물이나 기관에 수여해왔는데, 김대중 전 대통령, 반기문 유엔(UN) 사무총장,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등이 받았다. 박 회장은 국민적 애도 분위기에서 수상축하연을 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판단한 것으로 전해졌다.
대기업들은 전남 진도 사고현장에서 수습 지원 활동을 벌이고 있거나, 참사 희생자와 가족을 돕기 위해 성금 조성과 기부를 내부적으로 검토하고는 있지만 “외부에서 모르게 하라”가 비공식적인 룰이 돼버렸다. 아무리 선행이라고는 하지만, 자칫 이미지 마케팅으로 비칠까 염려하는 것이다.
삼성그룹은 이미 사고현장에 삼성중공업의 8000톤급(국내 최대) 해상크레인 ‘삼성5호’와 3500톤급 ‘삼성2호’를 보내 세월호 인양작업에 참여토록 했다. 3000톤급 크레인의 경우 하루 경비가 1억 원을 웃도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삼성그룹 관계자들은 그 비용에 대해 입을 굳게 다물고 있다. 팽목항은 물론 피해가족들이 머물고 있는 진도실내체육관에도 삼성사회봉사단 소속의 자원봉사자들이 다수 활동을 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사회봉사단은 그런 경우 유니폼을 착용하지 않는다”면서 “현장에선 일반 자원봉사자들과 다름없어서 어디 소속인지도 모를 것”이라고 전했다. 사고수습 초반 박근혜 대통령이 “피해가족들이 구조상황을 알 수 있게 하라”고 지시함에 따라 진도실내체육관에 대형 TV가 2대 설치됐는데, 이를 삼성전자가 기증한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삼성은 이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바 없다.
재계 관계자는 “삼성이 재난수습이나 복구 지원, 봉사활동 등을 대외적으로 밝히지 않는지가 몇 년 됐다”면서 “국내 1위 기업인 만큼 그런 활동이 알려질 경우 잘했다는 말보다는 ‘그거밖에 안하느냐’고 비아냥거림을 듣기 일쑤여서 그런 것 같다”고 분석했다.
현대차그룹은 성금이나 기부금 조성 등을 내부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못하고 있다.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미리 움직였다가 되레 역풍을 맞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그룹의 위상에 걸맞은 사회공헌을 하겠다는 의지는 확고하지만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SK그룹 관계자도 “직원 모금이나 그룹 자금 출연 등 어떤 방안이 가장 도움이 될지 살피고 있다”고 말했으나 규모와 시점에 대해선 극도로 말을 아꼈다. SK 관계자는 “마케팅이라는 오해를 사는 등 오히려 회사 이미지가 나빠지지는 않을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분위기만 조성되면 곧바로 지원을 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
기업들의 가장 큰 걱정은 정부가 세월호 참사의 재발방지책으로 안전규제 강화 방침을 들고 나옴에 따라 어렵게 조성된 규제완화 정책기조가 추진 동력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번 침몰 사고의 원인으로 이명박 전 대통령 재임시절인 2009년 해운법을 개정, 선박 운항 수명을 20년에서 30년으로 늘려준 사실이 도마에 오른 상황인 만큼 정부가 안전규제 강화와 경제규제 완화를 구분해 동시에 추진하기 힘들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나온다. 한 경제단체 관계자는 “누구도 드러내 놓고 말할 분위기가 아니어서 그렇지 최근 분위기를 보면 규제개혁 드라이브는 이미 물 건너간 것으로 보는 기업인들이 많다”고 말했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지난 24일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각 기업이 사업장에서 안전관리 체계를 강화할 것을 주문하는 지침을 회원사에 전달했다. 경총은 지침에서 “최근 연쇄적으로 발생한 대형 화학사고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황에서 대규모 인명 피해를 유발한 해상사고로 안전관리 전반에 대한 국민의 불안감이 고조되고 있다”며 “각 기업에서는 근로자와 국민의 불안이 해소될 수 있도록 안전경영 체계를 점검하고 안전 문화를 정착하기 위한 예방 활동에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주문했다. 안전사고에 대해 극도로 민감해 있는 여론 속에서 작은 사고로도 자칫 또 다른 규제강화의 빌미가 될 수 있음을 감안한 것이다.
박웅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