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버랜드→제일모직’ 이름 확 바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이다. 이는 기업에도 적용될 법하다. ‘모태기업’은 창업주가 회사를 처음 세우고, 그룹으로 성장시키는 데 기반이 된 회사다. 창업주의 정신이 담겨있다고 볼 수도 있다. 따라서 오너들은 모태기업에 남다른 애착을 갖고 있다. 최근 모태기업을 지키거나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재계의 움직임을 따라가 봤다.
왼쪽부터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 박인천 회장, 현대그룹 창업주 정주영 회장.
삼성그룹의 사업구조 개편으로 제일모직은 지난해 12월 패션사업부를 삼성에버랜드에 양도했다. 패션사업부 이관으로 화학·전자소재 사업에 집중하던 제일모직은 3개월 만인 지난 3월 31일, 삼성SDI에 흡수합병하기로 결정됐다. ‘삼성SDI-제일모직-삼성전기-삼성테크윈-삼성전자’로 이어지는 전자 수직계열화의 일환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개편으로 인해 ‘제일모직’이라는 사명은 사라질 상황에 놓였다. 제일모직은 삼성물산, 제일제당과 함께 삼성그룹의 시초가 되는 모태기업이다. 특히 제일모직은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가 가장 애착을 가졌던 계열사였다고 전해진다. 이병철 창업주가 삼성그룹 가운데 유일하게 대표이사로 재직한 곳이 제일모직이었으며, 1987년 별세 전까지 등기이사로 있을 정도였다.
따라서 삼성그룹에게도 제일모직 사명을 그대로 역사의 뒤안길로 보낼 수는 없는 입장이다. 이에 삼성그룹에서는 패션사업부문을 맡고 있는 삼성에버랜드를 제일모직으로 사명을 변경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제일모직은 패션사업부를 삼성에버랜드에 양도하면서 제일모직이 상호를 더 이상 쓰지 않을 경우 상표권을 삼성에버랜드에 양도하기로 합의했다.
삼성에버랜드 관계자는 “아직 제일모직과 삼성SDI의 합병이 완료된 게 아니라 제일모직 사명을 사용 중이다. 따라서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면서도 “제일모직 사명을 사용하는 것을 유력하게 검토 중이다”라고 설명했다. 제일모직과 삼성SDI의 합병은 오는 7월 완료된다.
이어 그는 “제일모직 합병 이전부터 삼성에버랜드 사명 변경을 추진 중이었다. 그러던 중 바꾼다면 삼성그룹의 모태기업인 제일모직을 사용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말이 나왔다”며 “리조트사업부, 건축부, 에버랜드, 패션사업부 등 사업부 구조의 변화는 없다”고 덧붙였다.
경영 사정상 어쩔 수 없이 모태기업을 팔아야 했지만 되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룹도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오는 8월 금호고속의 재인수를 계획하고 있다. 금호고속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모태기업이다. 고 박인천 금호아시아나그룹 창업주가 1946년 택시 두 대로 광주택시를 시작해 1948년 9월 현재의 금호고속인 광주여객자동차(주)를 설립하며 본격적인 운수업에 뛰어들었다. 이를 기반으로 박인천 창업주는 사업을 확장해 지금의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이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년 전인 지난 2012년 금호고속을 IBK투자증권과 케이스톤 컨소시엄 사모펀드(PEF)에 매각해야 했다. 워크아웃 중이었던 금호산업의 구조조정 차원에서였다. 다만 금호산업은 금호고속을 다시 사들일 것을 염두에 두고 금호고속 지분에 2년간 매각 유예와 우선매수협상권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이에 오는 8월이면 금호고속이 매각된 지 2년이 지나 사모펀드가 다시 매물로 나오게 된다. 가장 유력한 인수 후보는 역시 우선매수협상권을 가진 금호터미널이다. 금호터미널의 지분은 아시아나항공이 100% 보유하고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측에서도 금호고속은 그룹의 모태인 만큼 다시 가져올 것이라는 의지가 강하다.
그러나 계획과는 달리 금호고속 재인수가 쉽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업계에서는 금호고속의 매각가를 4000억~5000억 원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 2012년 IBK·케이스톤 사모펀드가 금호고속을 인수했을 당시 가격은 3345억 원이었다. 매각했을 때보다 돈을 더 주고 사와야 하는 상황이다. 금호산업은 워크아웃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좋지 않은 건설경기에도 지난해 1조 4345억 원 매출과 589억 원의 영업이익을 내는 등 내실을 다지며 올해 졸업을 목표로 삼고 있지만, 금호고속의 인수는 그룹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한 박삼구 그룹 회장과 동생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 사이의 소송전 역시 현재진행형이다. 금호석유화학은 지난 3월 아시아나항공 정기주주총회에서 아시아나항공이 금호산업 지분을 총수익맞교환(TRS) 방식으로 매각하고 박삼구 회장을 사내이사로 선임한 과정이 적법하지 않다며 서울남부지법에 가처분신청을 제기했다. 금호터미널이 아시아나항공의 자회사이기 때문에 이 소송이 변수로 작용할 여지도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 관계자는 “아직 금호고속이 매물로 나온 것도 아니고 8월까지 상황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다”면서도 “그룹 차원에서도 금호고속이 모태기업인 만큼 다시 사들일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리고 금호고속은 현금 흐름이 좋고 꾸준히 이익을 내는 기업이기 때문에 사업성을 보고 인수를 추진하는 면도 있다”고 설명했다.
재계 관계자는 “모태기업은 창업주부터 키워온 그룹 성장의 기반이 된 사업이다. 그래서 창업주도 그렇고, 후대 총수들도 애착을 보인다. 창업주들의 자녀들이 후계를 승계하는 한국 기업의 특성상 그런 경향이 더욱 큰 것 같다”며 “2세, 3세 총수들도 수익성이 떨어져 사업을 접어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모태기업은 최대한 가져가려 한다”고 설명했다.
그룹 성장의 기반이 된 주축기업을 둘러싸고 계열분리된 총수 일가 회사들이 치열한 인수전을 벌이기도 한다. 지난 2010년 현대그룹과 현대차그룹의 현대건설 인수전이 대표적이다. 당시 재계에서는 정몽구 회장이 현대가의 모태를 되찾으면서 현대가 장자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현대차그룹 관계자는 “현대차그룹은 현대그룹에서 계열 분리된 기업이기 때문에 현대건설을 현대차그룹의 완전한 모태기업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면서 “당시 일각에서는 정몽구 회장이 장자로서 정통성을 위해 범현대가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있는 현대건설을 인수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현대차그룹 성장의 3대 축으로서 건설을 육성하기 위한 사업적 측면에서 인수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재계 관계자도 “하나의 기업을 인수하거나 지키기 위해서는 수천억 원에서 많게는 수조 원의 자금이 들어간다”며 “수익성이 보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룹의 모태가 되는 기업이라고 명분·상징성을 위해 인수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잘못하면 그룹 정통성을 지키려다 존폐의 위기에 처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