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욕하면 돈 뜯는다’ 꼼수가 기가 막혀
일요신문DB
“일베충(일베 회원을 낮춰 부르는 네티즌 용어)인 남자친구가 나를 때리고 고양이를 발로 차서 장을 파열시켰어요.”
지난 3월 23일 여성전용 인터넷 카페인 ‘여성시대’에 끔찍한 내용을 담은 글 하나가 올라왔다. 이 글은 여친을 폭행한 데다 요즘 들어 자주 논란이 되고 있는 동물 학대 내용까지 들어 있어 네티즌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순식간에 수십여 개의 댓글이 달렸는데 대부분 글쓴이를 걱정함과 동시에 남자친구에 대한 분노를 담고 있었다. 노골적인 욕설 댓글도 줄줄이 이어졌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게시글과 그에 대한 ‘댓글’ 간의 일종의 놀이이자 상호작용의 결과다. 인터넷 공간에 올라오는 글들은 무수한 악성댓글을 ‘당연히’ 동반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상호작용’을 범죄에 악용한 ‘똘똘한’ 일베 회원이 있었다. 앞서의 게시글에 수많은 여성들이 분노했다. 그 결과 여성시대 게시판의 댓글란에는 일베충 남자친구를 비난하는 글들이 폭포수를 이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여성시대 게시판의 ‘일베충’ 당사자였던 남성이 일베 게시판에 “여성시대에 남겨진 댓글을 보고 정신적 피해를 입어 치료를 받고 있다. 고소를 진행 중이다”는 글과 대구 동부경찰서 전경 사진을 3차례에 걸쳐 올린 것. 평소 일베와 여성시대는 서로 경계하는 분위기라 어느 한 쪽 사이트에 관련 글이 올라오면 순식간에 전파됐다. 때문에 일베에 올라온 고소와 관련한 글 역시 즉각 여성시대에 퍼져 댓글을 남긴 여성 회원들은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는 고소 전쟁의 시작일 뿐이었다. 일베에 고소와 관련한 글이 올라오자 격분한 다른 여성회원 100여 명도 또 다시 욕설 댓글을 달았는데 이들에 대해서도 모욕죄로 고소장이 접수된 것. 경찰이 한 차례 이를 반려했지만 ‘끈기 있는’ 일베 회원은 일부 댓글을 추려 다시 고소하기까지 했다. 결국 시간이 흐를수록 고소를 당한 여성 회원들은 심리적인 압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이를 노린 일베 회원은 “형사 합의를 보자”며 두 차례에 걸쳐 돈을 요구했다.
그런데 사건을 수사하던 대구 동부경찰서는 몇 가지 의문스러운 점을 발견하게 된다. 처음 모욕 댓글을 고소하면서 본래 글을 작성했던 사람은 배제했던 점, 합의금을 종용하려는 글을 올린 점 등이었는데 이를 토대로 ‘자작극’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역시 반전은 있었다. 경찰의 수사 결과 처음 여성시대 사이트에 작성된 글은 일베 회원 허 아무개 씨(25) 등 2명의 악성댓글 유도의 ‘낚시성’ 글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동부경찰서의 한 관계자는 “피의자 두 명은 원래 알던 사이는 아니며 허 씨만 일베 회원이다. 휴대전화 판매업을 하던 허 씨가 중고거래를 하면서 또 다른 피의자를 알게 돼 범행을 공모한 것으로 조사됐다. 여성시대 아이디는 지인의 것을 빌려 한 것이었으며 두 차례에 걸쳐 피해자들을 협박했지만 결국 돈을 받아내진 못했다”며 “범행이 미수에 그쳤고 동종전과가 없다는 점을 참작해 불구속 입건해 조사 중”이라고 말했다.
이는 ‘악성댓글’에 일가견이 있는 한 일베 회원이 그 노하우로 돈을 노렸던 어처구니없는 사건이다. 일방적 인신공격 댓글이 난무하는 작금의 인터넷 문화에서나 볼 법한 씁쓸한 해프닝이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