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검찰 안팎에서는 지난 중간간부 인사 결과 남 전 과장이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으로 발령이 나자 삼성그룹의 연이은 ‘불운’을 점치기도 했다. 전형적인 수사통으로 대선자금 수사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데에 한몫을 담당했던 남 부장이 ‘사채시장 삼성채권’ 수사에 이어 또 다른 삼성그룹의 아킬레스건인 ‘에버랜드 변칙증여 사건’을 담당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 재배당 조치에 따라 일단 사건이 남 부장의 수사 선상에서 벗어나 삼성그룹으로선 가슴을 쓸어내린 꼴이 됐다는 것이 재계의 일반적인 평가다.
검찰에 따르면 중간간부 인사이동날인 지난달 14일 ‘에버랜드 변칙증여 사건’은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에서 금융조사부로 재배당됐다. 이에 대해 서울중앙지검 고위 관계자는 “지난달 초 이종백 서울중앙지검장의 부임 이후 부서별 업무 조정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이라며 “분식회계 등 기업의 본질적인 비리에 대한 수사는 금융조사부에서 맡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정에 따라 재배당했다”고 원칙적인 사건배당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는 또 “중간간부 인사 이전인 지난달 2일쯤 이미 재배당이 결정됐으며, 단지 배당시점이 새로운 부장의 부임 날짜였을 뿐”이라며 “사건 재배당에는 한 점 의혹도 없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또 다른 검찰 관계자는 사건 재배당 소식을 전해 듣자 “몇 년 동안 배당되어 있던 담당 부서에서 다른 부서로 사건이 재배당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며 “삼성 그룹이 세긴 센 모양”이라고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삼성그룹의 불법 대선자금 제공 사실이 드러나기 시작한 시점은 대검 중수부가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 개인후원회(일명 부국팀) 부회장 겸 법률고문을 지낸 서정우 변호사를 긴급체포한 지난해 12월8일. 당시 담당부서인 대검 중수2과(당시 유재만 과장)는 서 변호사를 체포한 뒤 이틀 후인 10일 삼성그룹이 지난 대선 직전 서 변호사를 통해 한나라당측에 현금 40억원과 함께 국민주택채권 1백12억원을 제공한 사실을 확인했다.
특히 검찰은 삼성그룹의 불법 정치자금 형태가 다른 그룹과는 달리 현금이 아닌 채권인 점에 주목했다. 검찰은 또한 사채업자들을 상대로 한 ‘사채시장’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삼성그룹과 관련된 거액의 채권 뭉치를 연달아 포착하기도 했다.
결국 검찰은 계좌추적 전문 수사관 등을 포함한 ‘삼성채권 전담추적반’을 편성했고, 이를 노무현 대통령 측근비리 수사를 막 마무리한 남 부장의 중수1과에 배치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남 부장의 삼성채권 수사는 대선자금 수사 마무리 시점까지 계속됐으며, 결국 7백억원대에 달하는 채권 규모를 밝혀내는 성과를 거뒀다.
당시 안대희 중수부장은 “삼성이 마련한 채권 규모는 7백억원가량 된다고 하는데, 그 채권의 행방이 딱 떨어지게 확인되지 않고 있다”며 “삼성채권의 행방 등에 관한 정밀 대조작업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특히 안 부장은 지난 3월8일 삼성측이 안희정씨를 통해 노무현 후보 캠프에 전달한 불법정치자금 30억원(채권 15억 포함) 등을 포함한 대선자금 수사 중간발표를 마치고 난 뒤 기자들과의 비공식 자리에서 “삼성채권 수사에서 남기춘 1과장이 일등 공신”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 왼쪽부터 국민수,남기춘 | ||
이 같은 배경 때문에 남 부장이 지난달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장으로 부임하자 검찰 주변에서는 ‘에버랜드 변칙증여 사건’이 또 다른 수사 단서가 되는 것이 아니냐는 섣부른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이 사건은 지난 2000년 6월 곽노현씨(방송대) 등 법학교수 43명이 “이건희 회장이 에버랜드 CB를 저가에 발행, 장남인 재용씨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편법 증여했고 에버랜드 주주들은 의도적인 실권행위로 저가발행에 공모, 회사에 손실을 끼쳤다”며 이 회장과 주주 등 33명을 고발하면서 검찰에 접수됐다.
검찰은 그러나 “고발 사건은 일반적으로 형사부에 배치한다”는 관례를 깨고 특수2부로 이 사건을 배당했다. 이 같은 이례적인 사건 배당에는 당시 형사부를 담당했던 차장 검사가 삼성그룹 고위층과 혈연관계였다는 특수 입장이 작용했다는 것이 검찰측에서 흘러나오는 유력한 설이다. 당시로는 이 사건이 형사부로 배당되면 자칫 수사와 관련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검찰 고위층이 오히려 이 같은 선택을 했다는 것.
이러한 배경을 감안한다면 이번 조치는 애초에 정상적이지 않았던 사건 배당이 제자리를 찾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부서별 업무 조정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검찰측의 설명도 설득력을 갖는다.
그러나 이번 사건 재배당과 관련, 일각에서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버리지 못하는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검찰은 고발장이 접수된 이후 50여 명을 조사했고 기록만도 1만 페이지에 이른다고 밝혔었다. 하지만 수사팀이 여러 차례 바뀌는 과정에서 이 사건에 대한 처벌이 가능한지에 대한 법리 검토 등을 이유로 사실상 사건처리를 미뤄왔었다.
마침내 검찰은 이 사건이 고발된 지 3년 6개월여 만인 지난 1월 당시 에버랜드 사장이던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대표 등 2명을 특경가법상 배임 혐의로 불구속기소, 공소시효를 정지시킨 뒤 수사를 계속하는 방법을 택했고, 현재 이 사건은 재판이 진행중이다.
에버랜드 CB 변칙증여 사건을 재배당받은 국민수 금융조사부장은 “현재 새로운 담당검사가 해당 기록을 살펴보고 있다”며 “사건에 대한 기본적인 검토를 진행중”이라고 밝혔다. 새 숙제를 안은 금융조사부의 향후 행보가 새삼 주목된다.
김태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