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2 이후 전두환 사령관의 명령으로 작성된 ‘인사처리대상자’(위)와 ‘전역장성취업건의’ 문건. 이 명단에 포함된 장성들은 강제 예편됐다. | ||
이 문건은 당시 ‘거사’ 후 완벽한 군부 장악을 노린 신군부 세력이 자신들에 반하는 현역 군장성들을 솎아내기 위해 작성한 ‘살생부 리스트’였다. 이른바 ‘인사처리대상자’와 ‘전역장성 취업 건의’가 그것. 이 명단에 오른 총 20명의 당시 현역 장성들은 당초 12·12 사태를 거치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예편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이 ‘숙청 리스트’에 오름으로 해서 전원이 동시에 강제 예편 조치된 사실이 처음 밝혀졌다.
79년 12월 당시 이 문건을 직접 작성했던 홍인호 예비역 중령에 의해 25년 만에 공개된 이 문건은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김홍한 육본 인사참모부장이 직접 낙점한 숙청자 명단이다. 두 사람은 당시 육군 소장과 준장을 대상으로 신군부에 반하는 소위 정승화 계엄사령관 측근 20여 명을 엄선했다. 역쿠데타의 화근도 미리 막고, 신군부 세력의 조기 진출도 꾀할 수 있다는 일거양득을 노린 결과였다. 이 문건의 실체가 드러남으로써 지금까지 여러 경로를 통해 ‘12·12 사태 직후 신군부에 의한 반대 세력 숙청 작업은 없었다’는 그간의 정설도 뒤집히게 될 것으로 보인다.
본지에 이와 같은 2건의 문건을 전격 공개한 홍인호 예비역 중령은 12·12 사태 당시 육군본부의 인사참모부에서 장군인사장교로 근무한 실무자였다. 그는 “12·12가 발생하자마자 곧바로 인사참모부장으로 부임해온 고 김홍한 장군과 함께 단 둘이서 79년 12월에서 80년 5월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전개되는 역사의 과정에서 숱한 철야 작업을 통해 수많은 군인사들의 인사 작업을 모두 진행했으며, 우리 손을 거쳐간 군 인사들은 이후 5~6공의 실세로 초고속 성장을 해 나갔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전 사령관과 그의 전폭적인 신뢰와 권한을 위임받은 김 장군의 결정이 곧 국가의 결정이었으며 (최규하) 대통령의 결재란은 형식에 불과했다. 내 손으로 작성한 결재 문건 가운데 단 한 건도 반려된 것이 없었다”고 밝혀 당시 두 사람의 막강한 영향력을 짐작케 했다.
전 사령관의 지시 또는 권한 위임으로 당시 ‘김-홍’팀이 담당한 군인사 밀실작업의 주요 내용은 79년 12월 중순의 ‘반 신군부 세력 숙청 작업’과 경찰 장악을 위한 80년 1월의 ‘현직 영관급 장교의 경찰 간부 파견 작업’, 5월의 ‘국보위 요원 인선과 편성 작업’ 등이 대표적이다.
1. 반대파 제거
오늘날 12·12 쿠데타에 대해서는 당시 여러 당사자들의 증언을 통해 그 진행과정이 비교적 상세히 전해지고 있다. 정승화 계엄사령관 전격 연행과 함께 그의 당시 대표적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병주 특전사령관(소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소장), 김학원 1군사령관(중장), 이건영 3군사령관(중장)은 모두 80년 1월 한꺼번에 옷을 벗었다. 물론 강제 예편조치였다. 문홍구 합참본부장(중장) 역시 80년 1월 합참본부장에서 보직해임된 뒤 1년 후 예편했다.
소장과 준장 장성들 가운데서도 당시 정 사령관 측근이거나 혹은 그 편에 서서 상대적으로 신군부에 반대했던 것으로 알려진 인사들은 많았으나, 이들에 대한 신군부측의 특별 인사 조치는 현재까지 전혀 공개된 바 없다.
한국 군부의 동향을 세밀히 관찰했던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대사도 이 같은 신군부의 ‘군 장악 프로그램’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글라이스틴 전 대사는 지난 99년 자서전 <알려지지 않은 역사>에서 “(12·12 직후) 당시 한국군 내부에 ‘숙청’이 있었다는 정보는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홍 예비역 중령은 “당시 숙청 대상 명단을 전 사령관과 김 장군이 선정했고, 그 명단 작성을 내가 직접 이 손으로 썼다”면서 “정보력이 밝은 미국의 감시망도 피할 만큼 아주 극비리에 전격적으로 단행된 조치였다”고 밝혔다.
그가 그 증거자료로 제시한 당시 문건 사본을 보면 ‘인사처리대상자’라는 제하에 17명의 현역 소장과 3명의 현역 준장 등 모두 20명의 장성 명단이 나열돼 있다.
이 명단은 당시 군의 핵심인 육군본부 참모진을 비롯, 정승화 사령관 측근 인사들로 대부분 채워져 있다. 당시 육본의 작전참모부장으로 있으면서 정 사령관 연행 직후 각 지휘관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예하부대를 철저히 장악하고 육본 명령 이외의 지령에 흔들리지 말 것”을 엄중 지시했다가 신군부에 의해 M16 총탄을 가슴에 맞고 중상을 입기도 했던 하소곤 소장(갑종1기)도 명단에 포함돼 있다.
또한 육본 정보참모부장 황의철 소장(육사8기), 교육참모부장 채항석 소장(육사10기), 작전참모차장 안철원 소장(육사8기), 예비군참모차장 이호봉 소장(육사10기), 국방부 인력차관보 유병하 소장(육사7기), 민사군정감 신정수 소장(육사8기) 등이 포함돼 있다.
이외에도 평상시보다는 특히 비상시국인 계엄상황에서 각 지방의 행정과 국방을 총괄하는 막강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각 군관구 사령관이 이 명단에 대거 포함됐다. 부산 경남 지역을 맡았던 2관구 사령관 정상만 소장(육사8기), 충청 지역을 담당했던 3관구 사령관 김종구 소장(육사7기), 대구 경북 지역을 맡았던 5관구 사령관 김명수 소장(육사10기) 등이 그들이다. 광주에 위치하고 있는 전투병과교육사령부(전교사) 백윤기 부사령관(육사7기)도 여기에 포함됐다. 1관구(호남 지역) 사령관과 6관구(경인 지역) 사령관은 제외된 것으로 봐서 숙청 대상에 오른 3명의 사령관이 신군부에 의해 ‘요주의 인물’로 찍힌 것으로 보인다.
야전군 부사령관인 소장 계급의 1, 2, 3군 부사령관도 어김없이 인사처리대상자에 포함돼 있다. 박승옥 소장(육사9기), 곽응철 소장(육사9기), 김수중 소장(육사9기)이 그들이다. 이외에도 육군대학 총장 김한용 소장(육사8기), 포병학교장 박재종 소장(육사8기), 제2훈련소장 이필조 소장(종합12기), 제2훈련소 부소장 김병삼 준장(종합1기), 행정학교 교수부장 정우봉 준장(종합2기), 감찰차감 장영돈 준장(종합2기) 등이 숙청자 명단에 포함됐다.
당초 숙청대상자 명단에 올랐다가 스스로가 자진 전역 의사를 밝혔던 김진기 헌병감(갑종6기)까지 포함하면 실제 대상자는 모두 21명이 된다.
당시 숙청 대상에 올라 불명예 예편해야 했던 채항석 예비역 소장은 “당시 상황이야 어디 상식이나 순리가 통하는 시대였나. 그저 자기들 내키는 대로 군을 휘두른 것 아니냐. 지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때 옷 잘 벗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이상 당시 얘기 재론하고 싶지 않다”며 불편한 심경을 내비치기도 했다.
▲ 홍인호 중령 | ||
홍 예비역 중령에 따르면 당시 숙청 대상자 21명은 별다른 ‘반발’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군부내의 분위기가 반발이나 저항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전혀 아니기도 했지만, 신군부측 역시 최대한 조용히 마무리 짓기 위해 나름대로의 ‘당근’을 제시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홍 예비역 대령은 “숙청 대상자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각 공사에 자리를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 훈장 수여와 위로 차원의 ‘보로금’도 전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다. 실제 본지에서 확인한 결과 당시 강제적으로 옷을 벗은 장성들 가운데 상당수가 보국훈장 국선장과 이등보국훈장 등을 서훈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또한 전체 21명 가운데 단 3명을 제외한 전원이 당시 퇴역과 동시에 광업진흥공사 석유개발공사 농협중앙회 등 공기업의 주요 임원 자리를 제공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에 대해 당시 전역과 동시에 모 공사의 간부로 옮겨간 한 예비역 소장은 “훈장은 전두환이 준 것이 아니라 내 30년 군생활에 대해 국가가 준 것이기에 받았다”며 “공사 간부 자리는 미력이나마 군이 아닌 곳에서라도 국가에 봉사한다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으나, 돈을 받은 적은 결코 없다”고 부인했다.
2. 경찰력 장악
박정희 소장에 의한 5·16 군사 쿠데타 이후 당시 군 장교들이 경찰력을 장악하기 위해 경찰 간부로 파견나간 사실은 알려졌지만, 이 같은 일이 똑같이 12·12 직후 신군부에 의해서도 자행됐다는 사실이 이번에 처음 밝혀졌다. 이 같은 작업도 역시 ‘김-홍’팀에 의해 주도됐던 것으로 확인됐다. 홍 예비역 중령의 회상이다.
“김 장군이 80년 1월경 갑자기 내게 ‘경찰이 개판이야. 아무래도 우리 군인들이 가서 새바람을 일으켜야겠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예, 5·16 때도 그런 전례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즉시 김 장군의 지시에 따라 구체적인 보고서를 내가 직접 작성했다.”
하지만 그는 이 발상의 최초 진원지가 전 사령관이었는지, 김 장군이었는지는 확실히 모르겠다고 덧붙였다. 아무튼 홍 중령이 기획해서 올린 보고서대로 당시 실제 현역 육군 중령 10명은 경찰 총경으로, 소령 20명은 경정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한다. YS 정권에서 경호실 차장을 지낸 바 있던 강아무개씨 역시 이때 육군 중령으로 예편해서 곧바로 경찰 총경으로 옷을 바꿔입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이 같은 조치의 배경에 대해 홍 예비역 중령은 “전두환 사령관의 경우, 12·12 직후 국보위 설치 등 사실상 모든 권력 장악 진행 과정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많이 따라갔다”며 “5·16 직후 경찰력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했던 것처럼 12·12 직후에도 (충성도가) 강한 군인들을 투입해서 상대적으로 나약한 경찰력을 다잡을 필요성이 제기됐던 것 같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3. 국보의 출범
1980년 5월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고 하는 정체불명의 막강한 새 기구가 출범했다. 이 국보위는 사실상 당시 최규하 정권을 무력화시키고 권력의 추를 전두환 보안사령관으로 옮기도록 하기 위한 장치였다. 지금껏 국보위의 설치 시기와 그 배경, 그리고 구성원들의 인선 과정을 놓고 갖가지 논란이 거듭돼온 게 사실이다.
홍 예비역 중령은 이와 관련해 “국보위 상임위원과 각 분과위원 가운데 현역 군 장성 및 영관급 장교를 대상으로 하는 인선은 우리 방에서 다 이뤄졌다”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내가 직접 그 명단을 작성했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하는데, 당시 국보위 인선은 5·18 광주 항쟁 이전에 다 끝났다”고 말했다. 이 같은 증언은 지금껏 국보위 탄생 과정에 대해 신군부측이 밝히고 있는 “5·18 사태 등 사회 혼란상을 수습하기 위한 비상대책기구의 필요성에 따른 조치”라는 설명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어서 주목된다.
지난 YS정권 때 5·18 사태에 대한 검찰 수사 당시 합수부 정보처장이었던 권정달씨는 “5월4일경 신군부 핵심 5인방인 유학성 3군사령관, 차규헌 육사교장, 황영시 참모차장, 노태우 수경사령관, 정호용 특전사령관을 포함한 군인들이 모여 시국수습방안을 논의하면서 국보위 얘기가 나왔고, 그뒤 12일 전두환 사령관에게 보고했다. 당초 전 사령관이 최 대통령에게 17일 비상계엄확대실시, 국회 해산, 국보위 설치 등 3개항을 인준받으려 했으나, 최 대통령의 반대로 국보위 설치는 인준받지 못했다. 계엄령 선포 이후 27일 국보위 설치령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홍 예비역 중령의 증언이 사실이라면, 지금껏 27일 의결 이후 사흘간의 인선 과정을 거쳐 31일 정식으로 국보위가 출범한 것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실제 이미 군 인사는 5·18 이전에 모두 정해진 채 대통령의 형식적인 재가 절차만 기다리고 있었던 셈이 된다.
홍 예비역 중령은 “당시 형식적인 위원회 외에 국보위의 실제 원동력은 전 사령관이 위원장으로 있는 상임위원회와 그 산하의 분과위원회였다. 상임위와 각 분과위에 투입될 현역 장성 장교들을 대상으로 한 선정 작업은 우리 방에서 엄정하게 이뤄졌다”고 밝혔다.
당시 선정된 육군 현역 장성 상임위 명단을 보면 차 교장과 노 수경사령관, 정 특전사령관 외에 신현수, 박노영, 강영식, 김윤호 중장, 이기백, 이광노, 심유선, 오자복, 이우재 준장 등이 포함돼 있다. ‘문건 기안자’인 김 장군 자신도 상임위에 참여했다.
이외에도 각 분과위원에는 허화평 허삼수를 비롯, 이춘구 안무혁 민병돈 최평욱 서완수 등 대부분 하나회 출신 장교들이 대거 선발됐다. 또한 오명 대령(전 과기부 장관), 최창윤 대령(전 총무처 장관) 등 똑똑하다고 소문난 영관급 장교들을 발탁했고, 결과적으로 이들은 국보위 진출을 계기로 이후 5~6공 정권에서 모두 승승장구하는 발판을 마련했다.
홍 예비역 중령은 “5공 정권 출범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던 국보위 선정 작업은 특히 중시했다”면서 “당시 김 장군이 써준 이름을 건네받으면 군인사 기록카드를 통해서 내가 명단을 작성했다. 전-김 두 사람간의 교감이 잘 이뤄졌기 때문에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고 밝혔다.
아울러 홍 예비역 중령은 자신의 증언이 12·12에서 5·18에 이르는 격동기의 역사적 진실에 접근하는 단초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