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행정수도 이전 예정지였던 충남 공주-연기 현지의 분위기는 단순히 ‘실망’ 차원이 아니었다. 차라리 ‘적개심’에 가까웠다. 서울에서 내려온 기자라는 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여지껏 우롱해놓고, 이제는 워쩐 꼴로 죽어 자빠지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러 왔능가”라는 울분의 목소리가 바로 되돌아왔다. 특히 10월21일 헌법재판소의 행정수도 위헌 판결 직후 서울시 관계자들과 수도권 주민들의 ‘만세 삼창’ 물결은, 안 그래도 울고 싶은 현지 주민들의 뺨을 때린 격이 되고 말았다.
10월23일과 24일 주말 양일간, 행정수도 이전 후보지였던 충남 연기군 남면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24일 오후 1시 종촌리 성남고 맞은편 행정수도이전주민대책위원회 사무실 앞에서는 헌재와 한나라당을 규탄하는 화형식이 펼쳐지기도 했다.
대책위원회에 참가하고 있다는 주민 강병재씨(44)는 “우리는 노무현 대통령이나 열린우리당의 지지자도 아니고 정치에 큰 관심도 없지만, 그래도 한나라당이나 보수신문 등의 횡포는 충분히 알 수 있다. 행정수도 문제만 해도 결국 대통령이 한다고 하니까 무조건 반대부터 하고 보는 것 아니냐. 주민들이야 죽든 살든…”이라며 울분을 토했다.
사실 이번 헌재의 결정이 있기 전만해도 공주 연기 현지의 여론은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찬성과 반대가 엇갈려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또 실제 21일 헌재 결정 직후에도 ‘현지의 목소리’로 환영과 비난의 의견이 나란히 전달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기자가 지켜본 현장의 분위기는 영 딴판이었다.
현지 주민들에게 행정수도 이전 철회는 이미 생존권의 문제로 다가서고 있었다. 남면 양화리 토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주민 임아무개씨(55)의 경우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임씨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봤다.
─이번 행정수도 이전 철회로 주민들이 본 가장 큰 피해는 무엇인가.
▲막대한 은행 빚이다. 계속 농사는 지어야겠기에 여기 땅을 담보로 농협에 3억원 대출을 받아서 인근 서면에 땅을 샀다. 그런데 갑자기 행정수도가 안 온다고 하니 여기 땅값도 폭락하고 덩달아 서면 등 인근 땅값도 다 폭락할 것은 뻔한 것 아닌가. 서면 땅 팔아봐야 은행빚 반도 못 갚는다. 이자만 매달 2백만~3백만원씩 나간다.
─서면 땅은 원래 시가보다 비싸게 매입했나.
▲그렇다. 행정수도 온다는 소식 이후 이 인근 땅 치고 안 오른 곳이 없으니까. 평소 평당 4만~5만원 하던 것이 13만~14만원씩 거래됐다. 그나마도 날이 갈수록 뛰어올랐다.
─행정수도 이전이 최종 확정된 것도 아닌데, 서둘러 다른 지역의 땅을 매입하다보니 이런 화를 자초한 것 아닌가.
▲(역정을 내며) 국회에서 이미 통과됐고, 정부가 여기를 최종 후보지로 확정 발표까지 하지 않았나. 아예 농사를 포기한다면 모를까, 하루가 다르게 값이 오르고 주변에서는 이미 다들 움직이는데, 나만 손놓고 바보처럼 있을 수 있나. 농민으로서 어쩔 수 없는 막다른 선택이었다.
원래 임씨의 계획대로라면 금년 말 정부와 현지 주민들과의 협의를 거쳐 보상금이 확정되고 내년부터 지급되면 그 돈으로 은행 빚을 갚고 새로운 터전에서 계속 농사를 지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고, 앞으로 남은 빚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막막하게 됐다.
그나마 임씨의 형편은 그래도 좀 나은 편. 그가 소개하는 이웃 주민 김아무개씨는 온 집안이 신용불량의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처하게 됐다. 원래 은행 대출이 좀 있었던 김씨는 추가 대출만으론 새 농지를 살 돈이 안됐다. 그래서 모자라는 돈을 직장생활을 하는 서울의 아들과 딸에게 신용대출을 부탁해서 충당했다고 한다. 요즘 김씨는 ‘못난 애비 때문에 직장생활하는 자식들까지 신용불량자로 내몰게 생겼다’며 술로 시름을 달랜다고 한다.
양화리 주민인 김아무개씨(48)는 “언론이 더 나쁘다. 지역 민심을 왜곡하고 있다. 행정수도 이전을 반대하는 여론은 임씨 집성촌인 이곳의 극소수 일부 노인층 몇몇뿐이다. 그 목소리도 역시 ‘생전에는 조상의 묘를 옮길 수 없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마치 서울에서는 현지 주민의 여론이 반반씩인 것처럼 보도하고 있다”고 불평을 쏟아냈다.
종촌리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고 있는 정아무개씨(44)는 “우리같이 젊은 사람들치고 발빠르게 움직이지 않은 이가 없다. 가만히 있으면 뒤늦게 후회한다는 생각에서 너도나도 은행 대출 알아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또 농협 등에서도 신청만 하면 무조건 대출이 됐다. 일부 금융권에서는 가만히 있는 주민들을 부추기기도 했다”고 전했다. 정씨도 고민이 있기는 마찬가지. 그 역시 새 생활방편을 찾기 위해 공주의 한 신축 아파트 상가에 있는 5억원짜리 슈퍼마켓 자리를 서둘러 계약을 했다고 한다.
정씨에 따르면 은행 대출이 여의치 않은 일부 주민들은 다급한 심정에 사채까지 끌어다 쓴 이도 있다는 것. 곁에 있던 정씨의 부인은 “아마 앞으로 농약 먹고 자살할 사람 여럿 나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지 부동산중개사무소들도 죄인이 된 심정으로 모두 숨어버렸다. 20여 개가 난립했던 남면 일대의 중개사무실은 모두 문이 잠겨져 있었다. 일부 사무실에는 ‘임대’라는 딱지가 붙어 있기도 했다. 유일하게 문이 열려 있는 한 사무실에는 주인은 없었고, 이웃 주민이 대신 앉아 있었다. 그는 “지금 땅을 산 사람들로부터 걸려오는 전화가 불이 나는데, 여기 붙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디 도망이라도 가야 할 상황인데. 본의 아니게 정부 시책만 믿고 미리 앞을 내다본 죄로 복덩방 주인들은 지금 사기꾼으로 몰려서 도망다니는 형편이 됐다”고 말했다.
종촌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이아무개씨(여·51)는 “수도 전체가 못 오면 정부청사가 오든 뭐든지 오긴 와야지 만약 이대로 끝났다가는 정말 여기에서 폭동 일어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한 여성 주민은 “설마 정부에서 나 몰라라 하기야 하겄슈. 무슨 살 길을 맹글어주지 않겄슈”하며 기자에게 안타깝게 되묻기도 했다.
양화3리 이장 노수재씨(66)는 “앞으로 한나라당은 충청도에서 표 받을 생각 꿈도 꾸면 안될 것”이라고 일갈했다. 그는 “아무리 우리가 ‘멍청도’라고 해도 이렇게 업신여김을 당할 수 있나. 자민련도 힘이 없고, 그래서 열린우리당 밀어줬더니 하는 짓보면 거기도 틀린 것 같다”고 답답해 했다.
현지 주민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또 있다. 행정수도 이전으로 인해 이미 남면의 땅만 해도 50% 이상이 서울 등 돈 많은 외지인들의 소유로 넘어갔다고 한다. 반면 지역 주민들의 대출은 농협 한 군데서만 이미 3백억원이 넘었다고 한다. 땅은 넘어가고 빚만 떠안은 셈이다.
요즘 이곳은 남면 노인회장 임헌서씨(77)의 넋두리처럼 “화기애애했던 마을에 온통 불신과 반목, 그리고 분노만 가득찼다”는 표현이 적절한 모습이다. 행정수도 이전 계획 무산이 할퀴고 간 상처는 너무나도 큰 만큼, 그 치유에도 상당한 시간과 후유증이 뒤따를 전망이다.
내년 7월부터 헬스장·수영장 이용 시 시설 이용료 30% 소득공제
온라인 기사 ( 2024.12.15 13: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