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인호 예비역 중령. | ||
<일요신문>이 지난주 보도한 ‘전두환 신군부의 살생부 리스트 문건 최초 공개’ 기사의 자료를 제공했던 홍인호 전 육본 인사장교는 25년 만에 당시 문건을 공개하는 이유에 대해서 이렇게 밝혔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를 전후로 해서 약 10년 가까이 육본인사참모부실에서 장군인사장교로 근무했던 홍 예비역 중령은 보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장군들과 맞닥뜨리거나 인사카드를 관리해야 했다. 실세 방에는 수많은 정치군인들이 들락날락했다. 장군 진급 심사가 있을 때나 인사 때에는 정보를 얻기 위해 숱한 군인이나 정치인들이 기웃거리기도 했다. 이 같은 역사의 이면을 가까이서 지켜본 홍 예비역 중령이 전두환과 신군부 사람들에 얽힌 몇가지 비화를 공개했다.
12·12 쿠데타가 있은 지 얼마 후 육군회관에서 ‘의미있는’ 모임이 열렸다. 육사16기 임관 20주년 기념 모임이었다. 당시 동기회 회장은 장세동 수경사 30경비단장이었다. 영관급 장교로 당시 일선 부대의 연대장 또는 대대장 등 야전 지휘관으로 나가 있던 육사16기는 대단히 중요한 위치에 있었던 기수였다.
이 모임 직전에 육군회관 앞에 황급히 한 대의 짚차가 섰고, 거기에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내렸다. 그를 수행한 이는 김진영(육사17기) 당시 수경사 33경비단장이었다. 전씨는 노타이의 사복 차림에 캐주얼화를 신고 면도도 하지 않은 꺼칠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당시 상황의 긴박성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전씨는 당시 행사장에서 “지금은 국가의 위기이며 아주 중대한 상황이다. 여러분들이 도와줘야 한다”는 취지의 일장 연설을 했다.
같은 육사 동기들이지만 당시 노태우 정호용씨 등은 전씨를 직속 상관 모시듯 아주 깍듯했다고 한다. 당시 보여준 전씨의 위상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닌 만큼 이미 오래전 하나회 내부에서부터 전씨는 사실상 최고 지도자의 위치를 점하고 있었던 셈이다.
홍 예비역 중령은 육사16기들과 친했다고 한다. 자신은 비육사 출신이지만 연령으로 볼 때 육사16기와 연배가 같았기 때문. 특히 인사참모부실에 있던 박규종 실장이 동기회 총무였던 관계로 본의 아니게 참모부 사무실이 동기회 사무실 비슷한 기능을 했다는 것. 따라서 홍 예비역 중령도 이들과 자연스럽게 친해진 탓에 명예회원으로 위촉되기도 했다고 한다. 여기에는 당시 장군 인사 담당자였던 홍 예비역 중령의 위치를 감안한 측면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왼쪽부터) 장세동, 김복동, 정승화 | ||
홍 예비역 중령은 지난 99년 서울 송파갑 재선거 당시의 비화 한 토막도 전했다. 당시 장씨는 6월에 실시될 예정이었던 재선거에 출마할 뜻을 잠깐 내비쳤다가 3월경에 스스로 접은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하지만 당시 장씨는 잠깐 출마를 생각했던 차원에서 벗어나 실제 송파구의 한 아파트로 이사를 가고, 사무실을 얻고, 선거대책본부장에 육사 동기인 박아무개씨를 앉히는 등 출마에 상당한 의욕을 보였다는 것.
그러던 장씨가 갑자기 출마를 포기한 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장씨의 출마를 포기시킬 사람은 전씨 단 한 사람뿐”이라면서 당시 대통령이던 DJ와 전씨와의 ‘교감’을 거론했다고 한다.
홍 예비역 중령은 “김복동씨의 사실상 강제 전역 절차를 직접 보면서 새삼 권력의 힘을 느끼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장교 및 장성 인사 카드를 관리해왔던 그에게 육사11기의 최고 인재로 단연 김씨가 돋보였다는 것. 특히 전씨와 김씨 두 사람은 나란히 진급 1, 2위를 다투었던 탓에 그 경쟁의식도 굉장했다고 한다. 실질적인 정규 육사 출신의 최고를 다투는 자존심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12·12 쿠데타 이후 두 사람의 명암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전씨가 국보위 상임위원장을 맡으면서 사실상 권력을 장악했던 80년 7월, 김씨는 육사교장으로 부임했다. 이후 전씨는 8월 대장으로 승진한 뒤 곧바로 예편하고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신군부의 쿠데타에 반대했던 김씨의 존재는 전씨에게는 부담스런 존재였다. 특히 김씨는 후배 군인들의 존경도 받고 있었다.
82년 1월 어느날 갑자기 인사참모실에 김씨를 예편시키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홍 예비역 중령은 “당시 중장이자 육사교장으로서의 예우를 갖추기 위해 내가 직접 예편원서를 들고 찾아가야 했으나, 너무 부담스러워 부하를 시켰다. 그가 내게 전해준 말에 따르면, 당시 김씨가 옛 친구에 의해 불명예스럽게 갑자기 옷을 벗어야만 했던 인간적인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육본 인사참모실에서 갑작스레 예고도 없이 육사 교장실에 들이닥치는 순간, 김씨는 이미 ‘올 것이 왔다’는 것을 직감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김씨는 원칙적인 업무 수행으로 무언의 항의를 벌였다.
그는 인사참모실 관계자를 밖에 세워둔 채 자신의 집무실에서 그날 예정된 모든 집무를 다 수행했다고 한다. 진급신고, 업무보고는 물론, 외부 방문객의 인사까지 모두 받았다는 것. 그러고 나서 오후에 더이상 그날의 업무가 없자, 그제서야 들어오게 해서는 단 한마디 말도 없이 입을 굳게 다문 채 펜으로 꾹 눌러서 예편원서에 서명을 하고는 방을 나섰다고 한다.
그는 “아침마다 정 사령관은 깨끗이 이발을 하고 옷에 먼지 하나 묻어 있지 않을 정도의 아주 깔끔한 모습으로 지휘봉을 쥐고 차에서 내렸다. 심지어 반짝 반짝 빛나는 구두에 무엇이 묻어 있을라 치면 곁에 있던 다른 장성들이 직접 이를 닦아줄 정도였다”며 “그 모습을 본 일부 장교들 중에서는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할 이 위기 상황에서 계엄사령관이 너무 겉모습만 신경쓰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고 전했다.
홍 예비역 중령은 “모두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치 군인들은 특성상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군인답지 못한 풍토를 낳은 측면도 있다”고 개탄했다. 그는 그 대표적인 인물로 육사12기 출신의 P씨를 꼽았다. P씨는 12·12 쿠데타 성공 이후 승승장구한 대표적인 인물. 특히 인사에 민감했던 그는 당시 인사참모부실을 수시로 들락거리며 약삭빠른 처신으로 유명했다고 한다. 특히 자신을 ‘홍 박사’라고 부르며 인사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애썼다는 것. 하지만 막상 목적을 성취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태도가 돌변했다고 한다. 당시 P씨는 이후 정치권으로 진출해서 5공 실세로 명성을 이어갔다.
홍 예비역 중령은 “당시 내가 직접 담당했던 중요한 군인사의 현장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정치 군인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던 당시의 비화를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길 생각”이라는 계획을 내비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