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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 5·18 당시 광주 시내에 투입된 진압군. | ||
그동안 정치권과 군 주변에서는 80년 당시 ‘광주 진압군’으로 투입된 특전사(3·7·11여단) 및 20사단의 지휘관들이 이후 진급에서 상당한 특혜를 받았으리라는 의혹이 여러 차례 제기된 바 있다. 실제 80년대 전반기를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근무했던 예비역 중령 출신의 H씨는 이 같은 의혹이 상당부분 진실이라는 증언을 했다.
그는 “85년 대령 진급자를 대상으로 한 심사가 거의 막바지에 이른 때였다. 갑자기 인사참모부 간부인 P대령이 황급히 어디인가로부터 전갈을 받더니 막판에 세 명의 중령 이름을 메모지에 휘갈기듯이 적어서 진급대상자 명단에 같이 올렸다. 워낙 순식간이었지만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어서 당시 세 명의 이름을 또렷이 기억한다. 김아무개 중령 등 모두 ‘광주사태’ 당시 특전사 대대장으로 현장에 투입된 장교들이었다”고 밝혔다.
실제 기자가 확인한 결과, H씨가 증언한 당시 세 명의 중령들은 모두 85년 대령으로 진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또한 이들뿐만 아니라, 당시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특전사와 20사단 소속 야전지휘관들인 대대장 17명 전원이 대령에 100% 진급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가운데 장성 진급자도 무려 10명에 이르렀다. 59%에 달하는 수치다. H씨는 “가장 진급이 잘 된다는 육사 출신도 당시 대령 진급은 40%, 장성은 12% 정도에 불과했다. 특히 당시 광주 투입 대대장 17명 가운데엔 갑종 등 비육사 출신이 9명이나 포함돼 있었다. 비육사 출신의 진급률은 육사 출신의 절반에도 훨씬 못 미친다. 그런 점만 봐도 진압군 출신 지휘관들의 진급률은 대단한 특혜가 아닐 수 없다”고 밝혔다.
그는 “흔히 진급 심사를 좌우하는 3대 핵심 보직으론 육군참모총장(대장) 육본인사참모부장(소장) 인사관리처장(준장)이 꼽힌다. 이들이 서로 의기투합되면 진급은 떼어놓은 당상이다. 그런 면에서 80년 광주항쟁 당시 특전사령관을 지낸 정호용씨가 이후 참모총장을, 20사단장을 지낸 박준병씨가 인사참모부장을 지냈다는 점만 봐도 광주 진압군 출신들이 상당한 특혜를 누렸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상상이 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기류는 YS정부 시절 검찰 조사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기도 했다. 당시 특전사 대대장이었던 C씨는 “5·18 광주사태 이후 광주에 투입되었던 공수부대 3개 여단의 (비육사 출신) 각 대대장 한 명씩을 장군으로 진급시켜 주었는데 11공수의 A대대장은 선임 대대장임에도 불구하고 진급을 못하고 대령으로 예편했다. 우리들 사이에서는 그가 80년 광주사태 당시 상급기관에 철수 건의를 한 것이 윗선에서 ‘괘씸죄’에 걸린 때문으로 보인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실제 비육사 출신 가운데 3공수의 L중령, 7공수의 K중령은 장성 진급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국방부는 “이들이 장성으로 진급해 군요직에 오른 것은 능력에 의해 승진한 것이지, 광주 진압에 참여했다고 해서 특혜를 받은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한 바 있다. 5·18 당시 대대장을 지냈던 B씨는 “군의 특수성을 조금만 아는 사람이라면,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비난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 것”이라며 지휘체계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을 강조했다.
하지만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설사 군 지휘계통에 따랐다 하더라도 진압현장을 직접 지휘한 대대장의 권한으로 무자비하게 유혈 진압을 한 책임은 반드시 져야 한다는 것. 당시 광주 진압의 공로를 인정받아 화랑무공훈장 등 훈장 및 표창을 받은 대대장은 특전사 소속의 K중령 등 모두 5명에 이른다.
‘12·12 및 5·18 수사기록 검증위원회’의 정동년 위원장은 이와 관련해 “최초 발포 명령자, 헬기 기총 사격 등 아직 풀리지 않은 광주 항쟁 당시의 진상 규명을 위해서는 당시 현장 지휘관인 대대장 이하 지휘관들의 증언과 지휘관회의 기록 및 전투상보, 상황일지 등을 공개해야 함에도 검찰이 국방부의 의견을 모두 반영해서, 이를 전적으로 봉쇄한 것은 납득키 어렵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감명국 기자 km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