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 기사의 신고 전화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한 한 경찰관은 택시 기사와 승객인 50대 여인을 지구대로 데려와 신원을 조회하다 깜짝 놀랐다. 기사와 언쟁을 벌인 50대 여인이 지난 96년 사기 혐의로 지명 수배된 전 S그룹 회장의 전 부인 이아무개씨(50)로 드러난 것. 이날 오전 검찰로 신병이 넘겨진 이씨는 이틀 후 법원이 구속영장을 발부하면서 8년간의 기나긴 도피 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됐다.
이씨는 지난 96년 12월부터 경찰의 수사망을 피해 종적을 감췄다. 이씨의 혐의가 드러난 것은 30대 남성 두 명이 보석상에서 부도 어음으로 보석을 구입하다 적발된 사건 때문.
경찰청 특수수사과가 96년 12월27일 최아무개씨(당시 30세) 등 남성 두 명을 긴급체포하면서 이들이 두 달 전인 10월 이씨의 이름으로 배서된 부도 어음 세 장으로 서울 방이동 소재 보석상에서 8억8천만원 상당의 보석을 구입한 사실을 밝혀낸 것. 당시 이들이 구입한 보석은 시계 1점을 포함해 모두 24점이었으며, 2억원이 넘는 사파이어 반지까지 포함된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은 최씨 등을 구속한 뒤 곧바로 이씨를 지명수배했다. 이씨의 이름이 단순히 타의로 배서된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린 것. 실제 경찰은 수사 과정에서 최씨 등과 피해자들을 통해 최씨 등이 구입한 보석을 이씨가 건네받은 적이 있고, 자신의 이름이 배서된 어음에 대해 책임을 지겠다고 말한 사실이 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뿐만 아니라 이씨가 당시 개인 사업 등으로 인한 은행 채무 액수가 15억원이 넘으며, 보석을 구입할 즈음에는 이사장을 맡고 있던 모 문화재단의 창립행사를 추진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경찰은 이씨의 사건 개입 가능성을 높게 점쳤다. 즉 이씨가 최씨 등과 공모해 부도 어음으로 구입한 보석 등을 재차 팔아 빚 변제 및 재단 행사 비용 등에 유용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 것이었다.
이 사건을 경찰로부터 넘겨받은 서울중앙지검 특수2부는 이씨가 부도 어음으로 구입한 보석 중 일부를 되팔아 6천만원을 챙긴 사실까지 밝혀내고 이듬해인 97년 1월26일 법원으로부터 체포 영장을 발부받아 본격적으로 이씨 검거에 나선 바 있다.
8년여가 지난 후 또 다시 이씨 사건을 맡은 특수2부(주임검사 김진태)가 밝힌 피해 액수는 총 36억3천만원. 검찰은 이씨와 최씨 등이 96년 10월 사건 외에도 세 건의 사기를 더 저질렀다고 밝혔다.
이씨와 공모한 최씨는 지난 96년 8월 명동 C호텔에서 당시 S백화점 직원 장아무개씨를 만나 자신을 D산업 회장의 아들이자 S그룹 회장 부인의 비서라고 속인 뒤 “신한국당 의원 로비용으로 상품권을 주면 한 달 후에 상품권 대금 절반, 두 달 후에 나머지 절반을 현금으로 결제하겠다”고 속여 약 5억5천만원 상당의 S백화점 상품권을 받아낸 것으로 드러났다.
이 과정에서 이씨는 장씨를 이태원 회장 자택으로까지 불러 신분을 확인시킨 뒤 대금 결제를 굳게 약속해, 장씨로부터 즉석에서 단번에 상품권 2천3백 매(약 2억2천만원 상당)를 받아내는 ‘수완’도 발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해 9월20일에도 이씨는 S그룹 회장 부인을 자처하며 S백화점 직원인 이아무개씨에게 접근한 뒤 “S그룹과 상관없이 부산영화제에 참석하는 귀빈들에게 선물용으로 상품권을 사용할 것이니 상품권 10만원권을 1백 매씩 선물로 포장하여, 30개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 장충동 S호텔에서 약 3억원 상당의 상품권 10만원권 3천 매를 편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10월 최씨가 자신이 K산업 회장의 아들로서 D관광사를 인수, 제주에 R호텔을 건립하는 중이고, 이씨가 이사장으로 있는 문화재단의 창립행사에 참석하는 스페인 국왕 등에게 선물로 증정할 것이라고 속여 보석상 이아무개씨로부터 보석 등을 가로챈 기존 혐의도 그대로 인정됐다. 최씨는 1982년부터 2년여간 D상운 대표이사를 지낸 최아무개 회장의 아들인 것으로 드러났다.
이씨는 같은 해 11월 자신과 최씨 등이 편취한 상품권 및 보석 등의 대금 결제 요구가 빗발치자 D산업 심아무개 사장에게 19억원짜리 약속어음을 발행한 뒤, 돈을 갚지 않은 혐의도 받고 있다.
이처럼 수십억원대 사기 행각을 벌인 뒤 8년간 검찰의 두터운 포위망을 유유히 피해왔던 이씨가 어떻게 택시 기사와의 사소한 다툼이 빌미가 돼 ‘허무하게’ 검거된 것일까.
검찰 주변에서는 두 가지 추측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최종 사건 날짜부터 공소시효가 적용되는 것으로 알았거나, 일찌감치 공범들에 대한 판결이 확정돼 마음을 놓았던 게 아닐까라는 추측이 가장 설득력을 얻고 있는 것.
실제 범죄 종료일로만 따진다면 이씨의 사기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 기간(7년)은 이미 지난 상황. 지난 96년 11월 약속어음 대금을 갚지 않은 것이 가장 마지막 범행이기 때문에 2003년 11월에 형벌권이 이미 소멸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검찰이 공범들과 함께 자신을 공소 제기한 것으로 추정해 공소시효가 완성된 것으로 착각할 수도 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이씨에 대해서만큼은 공소를 제기하지 않은 상태였다. 객관적 혐의가 충분하나 피의자가 잠적해 수사를 종결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기소중지 조치를 취한 것. 공소시효는 검사의 공소 제기가 있거나 사건에 대한 확정 판결이 있은 후부터 계산된다.
만약 사건을 굳이 분리시키지 않더라도 공범인 최씨 등은 지난 96년 구속되고 한참 후에야 법원의 확정 판결을 받았기 때문에 검찰이 이씨를 기소하는 것은 법률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간 이씨는 철저하게 자신을 숨기며 살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순간의 ‘착오’로 8년간 공들인 도피 생활을 허망하게 날린 충격 때문일까. 이씨는 검거된 지 일주일여가 지났음에도 변호사를 선임하지도 못하고 고민에 빠진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