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짐에 대한 감사=이현주 목사님 댁에서 차를 마실 때였다. 나무로 깎아 만든 예쁜 차받침이 눈에 띄어 만지작거리니 사모님이 말씀하신다. “그거, 이 양반이 만들었어요.” 그러자 목사님 왈. “내가 나무를 어떻게 만들어?” 우리는 어떤 일을 ‘내가’ 그것도 ‘나 혼자’ 해낸 일로 얼마나 많이 착각하며 사는가. 작은 성과도 큰 것인 양 뻥튀기는 일은 또 얼마나 잦은가. 곧 나올 책 머릿글에 목사님은 이렇게 적으셨다. “루미가 읊은 것을 그의 제자가 받아 적고, 이름 모르는 누가 그것을 책으로 펴냈고, 이현주는 한국말로 옮기면서 제 느낌을 적어 붙였고, 디자인하는 사람, 인쇄하는 사람, 종이 만드는 사람, 그들을 낳아준 사람, 가르친 사람… 수많은 사람이 저마다 자기 일을 감당하여 마침내 이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그대 한 사람을 위해서!”나 혼자 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음을, 그러니 더 낮아지고, 사방팔방에 감사해야 함을 가르쳐주신 이현주 목사님. 그분은 글로, 말씀으로 오늘도 나를 흔들어 깨우고 있다.
(이평화 도서출판 샨티 기획실장)
▲부드러움의 힘=해마다 수첩에는 새로운 일과 새로운 이름들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세월 따라 모든 게 흐르고 변해간다. 하지만 수첩의 맨 앞장에는 5년이 흐른 지금도 똑같은 글귀가 적혀있다. 함석헌 선생의 말씀이다. “섬유가 아무리 길고 질겨도 빳빳하면 실이 되지 못하고, 쇠가 아무리 굳고 질겨도 부드러워 굽었다가 제자리로 일어서는 힘이 있지 않아서는 강철 노릇을 못한다. 사람의 정신도 그렇다. 깨끗하고 굳세고 날쌔기도 하지만 또 부드럽지 않으면 안 된다.” 매일 아침 이 글귀를 읽으며 나는 지금 사람 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내 혼이 너무 빳빳하지는 않은지 돌아볼 여유를 갖는다.
(강은석 대학 조교수)
▲세상과의 정직한 대결=농민운동가로 생을 마감한 이경해 선생과의 만남은 내게 아주 특별한, 그래서 15년이 지난 지금도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지난 90년, 제네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에서 자결시위를 벌였던 그는, 당시 후유증에 시달리며 아픈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때였다. “그러고 나니까 사람들이 오히려 나를 멀리 해. 내가 무슨 이준 열사가 되려고 그런 것도 아닌데…. 어떤 깊음과 절실함 없이 무엇이 되겠어.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야. 억지스러운 세상과의 싸움이지. 다만, 그럴수록 정직한 대결이 되어야겠지.”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는 선생의 말을 통해 ‘지성이라는 그릇’에 담아야 할 ‘그 무엇’이 어떤 건지 명료해진다.
(박정록 도서출판 북웨이브 대표)
▲까닭 묻지 않는 순한 영혼=아프리카로 떠난 배낭여행길, 반 년 동안 못 보게 될 손녀를 보내며 이제 날마다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고, 딱 돌아오는 날, 그날만 기다리겠다던 할머니. “네 발엔 날개가 달렸나보다”며 “날 수 있을 때 날아야지. 그럼. 그렇고 말고” 하셨던 분. 그런데 막상 떠나는 날 공항바닥에 주저앉아 엄마를 부르는 아이처럼 울부짖던 할머니. 나는 이 순한 영혼을 참 많이 기다리게 했다. 그 고운 얼굴을 가슴에 묻는 날이 오리란 걸 몰랐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다음해 나는 엄마가 되었고, 사람도 집이 되어 한 사람을 품고 감싸 안을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배우고 있다. 한 사람을 품는 것은 까닭을 묻지 않고도 “아무렴, 그럼” 하며 그의 발길에 지긋이 눈길 포갤 수도 있다는 것을.
(조민숙 <작은것이 아름답다>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