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부담 덜기냐 자기정치 시동이냐
문창극 총리 후보자에게 자진 사퇴를 요구한 서청원 의원에 대한 청와대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사진은 지난 10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새누리당 토론회. 이 자리에서 서 의원은 당권 도전 의사를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서청원 의원이 지난해 10월 재·보궐 선거를 통해 국회에 컴백하자 새누리당 의원들은 수직적인 당·청 관계가 변화할 것으로 기대했다. 여권 포메이션이 ‘김기춘 원톱’에서 ‘김기춘·서청원 투톱’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고 점쳤던 것이다. 서 의원은 새누리당 내에서 김 실장은 물론 박 대통령에게도 쓴소리를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정치인으로 꼽히는 까닭에서였다. 서 의원은 김 실장보다 네 살 어리지만 경력이나 위상 등 ‘정치적 스펙’ 면에선 오히려 김 실장을 앞선다는 평을 받고 있다. 그러나 서 의원은 6·4 지방선거 전까지 바싹 엎드리며 정중동 모드로 일관했다. 주요 정치적 사안에 대해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이를 놓고 정치권에선 차기 당권을 노린 스탠스로 이해했다. 전당대회를 앞두고 ‘부자 몸조심’에 들어갔다는 것이었다.
지방선거를 치르는 동안 공동선대위를 이끌며 전면에 나섰던 서 의원은 문창극 후보자가 과거 부적절한 글과 말로 뭇매를 맞자 포문을 열었다. 대통령이 지명한 총리 후보자에 대해 여권 주류 핵심 정치인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서 의원은 지난 19일 전당대회 출마 선언 기자회견에서 “지금 시점에서는 나라와 국민을 위해 스스로 물러나는 것도 좋지 않겠나 싶다”며 문 후보자를 겨냥했다. “국민 위한 길이 무엇인지 판단하라(16일)”, “스스로 판단해 모두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게 좋겠다(17일)”며 표현 강도를 점점 높였던 서 의원이 이번엔 직접 사퇴를 거론하고 나선 것이다. 서 의원을 필두로 계파를 막론하고 새누리당의 대부분 의원들이 문 후보자 자진사퇴를 촉구하고 나선 상태다.
이를 놓고 정치권에선 서 의원과 청와대가 물밑 교감을 나눴을 것이라는 관측을 내놓기도 한다. 문 후보자에 대한 여론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고 인사청문회를 거쳐 본회의 표결에 부쳐도 통과를 장담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여권이 출구전략을 모색했을 것이란 얘기다. 반등 기미를 보이던 박 대통령 지지율이 문 후보자 지명 후 또 다시 하락 추세로 돌아섰다는 점도 여권의 출구전략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자
그러나 청와대 일각에서 서 의원에 대한 섭섭함이 감지되는 것도 사실이다. 청와대는 문 후보자가 지명 직후부터 거센 공세를 받았지만 청문회 통과가 어려울 정도는 아니라는 판단을 했다고 한다. 여기엔 안대희 전 후보자 중도하차 이후 또 다시 인사가 실패할 경우 제기될 부실 검증에 대한 우려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청와대는 여러 채널을 통해 새누리당 의원들에게 ‘엄호 사격’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 정무 관계자는 “무조건 밀어붙이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박 대통령이 임명동의안 재가를 하지 않고 순방길에 오른 것도 이 때문”이라면서도 “여론의 추이를 지켜보겠다는 속내도 있었지만 친박 의원들이 국면을 어느 정도 전환해주거나 그것도 아니면 적어도 당 내부의 반발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은 막아줄 것으로 기대했다”고 털어놨다.
그런데 친박, 그것도 큰형님으로 통하는 서 의원이 공개적으로 문 후보자 자진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여권 내에선 청와대와 서 의원 간 물밑 교감설에 대해서도 고개를 젓는 이들이 적지 않다.
새누리당의 한 친박 의원은 “서 의원 정치 스타일상 자체적으로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서 의원이 스스로 박 대통령 의중을 읽었거나 아니면 진짜 문 후보자의 자질을 의심하고 있는 것”이라며 “청와대에서 과연 누가 서 의원에게 문 후보자 자진사퇴를 위해 분위기를 조성해달라는 식의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인가”라고 반문했다.
이처럼 청와대는 믿었던 친박 내에서조차 반발 움직임이 확산되자 사실상 ‘문창극 카드’를 접은 것으로 알려졌다. 청문회 통과에 필요한 동력을 상실했다는 판단에서다. 다음은 청와대의 한 핵심 관계자가 비보도를 전제로 사석에서 털어놓은 말이다. 친박이 조금만 버텨줬더라면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얘기였다.
“서 의원이 꼭 앞장서서 문 후보자 사퇴 발언을 했어야 했는지 조금은 아쉽다. 초·재선이나 비박계가 그랬다면 이해가 갔을 것이다. 그런데 서 의원이라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지 않나. 박 대통령 눈치를 보며 입장을 내놓지 않던 많은 의원들이 서 의원 발언 이후 문 후보자 사퇴를 요구했다. 몇몇 친박 의원들은 서 의원이 청와대와의 공감대 하에 문 후보자 사퇴를 주장했을 것이라며 이에 동조하는 게 박 대통령 뜻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그런데 청와대 기류는 그렇지 않다. 서 의원이 물꼬를 튼 것이다.”
김기춘 비서실장
권대우 정치평론가는 “서 의원은 김 의원보다 당심에선 우위에 있지만 국민 여론조사에선 뒤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 의원으로선 민심을 얻기 위한 방법으로 문 후보자 사퇴를 주장했을 수 있다. 서 의원이 문 후보자 논란 과정에서 주목도 많이 받았고,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는 점에서 성공한 전략”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서 의원은 <일요신문> 인터뷰에서 “사실 진작부터 하려고 했는데 ‘인기성 발언이 아니냐’는 소리를 들을까봐 고민이 많았다”며 “문 후보자의 언행에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많았다. 하루빨리 스스로 처신을 결정하는 것이 세월호 사고로 어려움에 빠진 정국에서 국민감정을 더 악화시키지 않는 길이라고 판단했다”고 해명했다.
정치권이 서 의원의 이러한 행보에 관심을 두는 것은 문 후보자에 대한 정치권 공세가 심해질수록 그 타깃은 인사위원장을 겸직하고 있는 김기춘 실장에게로 옮겨갈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다. 이는 서 의원과 김 실장이 향후 갈등을 빚을 수 있을 것이란 추측이 가능한 대목이다. 김 실장은 안대희 전 후보자가 물러날 당시 문책론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박 대통령 신임을 받았다. 친정체제 구축을 강화하려는 박 대통령 구상의 중심인물이 김 실장이라는 게 재확인 되면서 오히려 청와대 내에서의 입지는 더욱 공고해졌다. 그러나 문 후보자에 대한 부실 검증 논란이 야권은 물론 여권으로까지 확산되면 김 실장도 계속 버티긴 어렵다는 게 정가의 중론이다.
서 의원 측으로 분류되는 한 의원은 “서 의원과 김 실장 관계는 나쁘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김 실장 입장에선 서 의원이 문 후보자 사퇴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을 것이다. 어찌됐건 그 불똥은 김 실장에게로 튀지 않겠느냐”면서 “이는 청와대 ‘부통령’으로 불리는 김 실장과 차기 당권을 노리는 서 의원 간 파워게임으로까지 확전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김 실장과의 대결 구도에 대해 일단 서 의원은 선을 긋고 나섰다. 서 의원은 18일 기자들과의 질의응답에서 “문창극 후보자 논란과 김기춘 실장 책임론은 별도의 일이다. 비서실장이 전부 책임지는 것으로 하면 대통령한테 직격탄이 간다”며 “지금 비서실장이 인사위원장이어서 잘못하면 전부 비서실장에게 책임을 돌린다. 비서실장이 아니라 밑에서 인사 검증을 하는 것인데 차제에 외부 인사위원회를 만드는 시스템을 생각해봐야 한다”고 밝혔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