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판·검사의 기업행이 잇따르자 비판 여론이 일고 있다. 사진은 대한변호사회관 앞에 서있는 법의 여신상. | ||
판·검사들의 기업행은 지난해부터 본격화되더니 올 초 들어 급증, 20여 명이 옮겼거나 옮길 준비를 하고 있다. 검찰쪽은 2월 정기인사를 앞두고 최근 사표를 낸 대검 중수부와 법무부의 엘리트 검사 2명이 각각 CJ와 SK로 갈 예정이다. 또 백승민 대검 컴퓨터 수사과장도 모교인 연세대 법대 교수로 영입돼 사표가 수리되기만을 기다리는 상태다. 검사로서 승진 보증수표나 마찬가지인 대검과 법무부에 있는 엘리트 검사들이 이처럼 한꺼번에 외부로 빠져나가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법원도 마찬가지다. 2월 법원인사에서 차관급인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 1순위였던 서울중앙지법의 아무개 부장판사도 사표를 냈다. 이 부장판사는 삼성으로 갈 것으로 전해졌다. 대법원 재판연구관으로 있는 또 다른 부장판사도 SK로부터 입사 제의를 받고 사표를 냈다. 둘 다 법원 내에서 촉망받고 전도유망한 판사들이다.
이 같은 ‘엑소더스’의 물꼬를 튼 것은 지난해 7월 삼성그룹의 법무실장(사장급)에 영입된 대검찰청 수사기획관 출신의 이종왕 변호사다. 노무현 대통령과 사법시험 동기(사시 17회)인 이 변호사는 대선자금 수사 때 김&장 법률사무소에 있으면서 SK 등의 변론을 맡더니 결국 삼성에 둥지를 옮겼다.
이어 서울중앙지검 특수부장 출신의 서우정 검사가 부사장급으로 삼성 법무실에 들어갔다. 삼성으로 옮기게 될 서울지법 부장판사의 영입에는 이 실장이 직접 나섰다는 후문이다. 삼성 법무실에는 전 대검 연구관 출신의 김수목 변호사와 전 서울중앙지검 검사 출신인 유승엽 변호사 등 검사 출신만 11명이나 있어 웬만한 로펌 이상의 화려한 재조경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됐다.
대선자금 수사 때 손길승 그룹회장이 구속까지 됐던 SK도 지난해 대검 중수부 과장을 지낸 김준호 변호사를 부사장으로 영입해 화제가 됐었다. SK는 이어 서울중앙지법 판사 출신의 강희선 변호사도 데려왔다. 올해 2~3명의 판·검사 출신들이 더 들어오기 때문에 SK도 삼성 못지않은 막강한 법조라인을 구축하게 된다.
최근 들어 이 같은 현상이 급증하는 것은 변화된 법조계 분위기와 기업환경에서 판·검사들과 기업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기 때문이다. 판·검사들이 기업으로 옮기는 이유로는 경제적인 사정도 있지만 미래에 대한 두려움도 한몫한다.
우선 과거처럼 판·검사라면 무조건 존경과 우대를 받던 사회적 분위기가 사라져가고 있다. 참여정부가 정권 차원에서 추진하는 검찰개혁과 사법개혁이 주는 위기감도 만만치 않다. 부장검사나 부장판사쯤 되면 든든한 ‘스폰서’가 몇 명 있어 돈 걱정은 안해도 되던 관행도 사회가 투명화되면서 불가능해 졌다. 법복이 보장해주던 권력의 달콤함을 더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여기에 과거에는 언제든지 옷을 벗고 변호사 개업만 하면 ‘전관예우’를 통해 몇 년만에 수십억원은 너끈히 챙길 수 있던 시절도 갔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대기업으로 가는 것도 타이밍이 중요하게 됐다. 검사장이나 고등부장판사 등 고위직을 마치고 기업으로 가면 실무에서 뛰기에는 부담스럽기 때문에 기업도 환영하지 않는다. 그래서 최근 대기업행을 택한 판·검사들은 대부분 신진 또는 중견급들이다.
한 중견간부급 검사는 “지방검찰청 부장 때가 나가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지 검사 생활을 계속할지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로 인식되고 있다”고 말했다.
▲ 삼성그룹 법무실장 이종왕 변호사. | ||
한 기업정보팀 관계자는 “SK의 경우 지난해 그룹 법무팀이 검찰 동향 파악에 완전히 실패해 손길승, 최태원 회장이 잇따라 구속되는 낭패를 겪었다는 내부 비판이 거세게 일었다”고 말했다. 수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검찰 정보를 조금이라도 빼낼 수 있는 법무 참모들이 절실해진 것이다. 여기에 증권집단소송제나 제조물책임법 등이 시행되면서 경영활동에서 적극적으로 법률적 검토를 해야할 사안들이 많아진 것도 이유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에 대해 법조계 안팎에서는 직업윤리에 위배된다는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도 높다. 우선 대기업 수사를 주로 담당했던 특수통 검사들의 기업행은 수사기밀 유출의 부작용이 우려된다. 또 이들이 각종 수사나 재판에서 기업 비리를 보호하는 선봉장이 될 것이라는 비판이다.
당장 삼성의 경우만도 서울중앙지검에서 수사중인 이재용씨의 에버랜드 주식 헐값매입 의혹 사건 등 각종 사건들이 검찰과 법원에 걸려 있는 상태다. 삼성으로 옮긴 검사들이 재조시절 삼성 관련 사건을 직접 다루지는 않았다해도 바로 옆에서 수사과정을 지켜봐 온 것은 분명하다. 실제 지난해 삼성으로 옮긴 서우정 변호사의 경우 서울중앙지검 특수부 선임부장(1부장)으로 있을 때 특수2부에서는 에버랜드 사건을 수사중이었다.
요직에 있던 부장판사들이 곧바로 대기업으로 옮기는 것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민사건 형사건, 기업 관련 사건의 재판을 했던 판사들이 사표를 내자마자 기업으로 간다면 그들이 내렸던 판결의 신뢰도가 떨어지고, 사법부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무래도 판사 출신들을 소송에서 법원으로 통하는 인맥으로 활용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재판에 부당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기업이 윤리경영을 위해 판·검사 출신을 영입한다고 내세우지만 속내는 수사나 소송 때 이용하겠다는 것”이라며 “법·경유착이라는 말까지 나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진기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