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삼십육계 줄행랑’이 최고수
▲ 허문석(왼쪽), 김우중 | ||
이 말은 검찰 수사를 받게되면 피의자는 무조건 도망치는 것이 최상책이며 다음이 무조건 부인하는 것이고, 그것도 안되면 ‘빽’을 써서 검찰의 칼날을 피해야 한다는 뜻이다. 대선자금 수사를 거쳐 검찰이 거듭나면서 검찰 주변에서 사라지는 듯했던 이 말이 다시 돌기 시작한 것은 오일게이트의 핵심인물인 허문석 KOC 대표가 외국으로 도피하면서부터다.
물론 검찰은 지난 4월27일 철도공사 유전개발의혹의 또다른 주인공인 전대월 하이앤드 대표를 구속수감했다. 검찰은 또 허씨와 함께 죄충우돌하며 사업을 추진하던 왕영용 철도공사 사업개발본부장을 28일 전격 소환했다. 이처럼 검찰은 도피중인 전씨를 비롯해 왕씨 등 오일게이트의 핵심인물을 조사함으로써 사건의 실체적 진실 규명이 급물살을 타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전씨를 구속수감한 검찰은 한편으로 걱정이 태산같다. 부정수표법 위반으로 지명수배됐다 도피했던 전씨가 검찰에 제출한 허문석 KOC 대표와의 휴대전화 녹취록 때문이다. 이 녹취록에서 허씨는 유전개발의혹과 관련된 핵심사안에 대해 전씨에게 말맞추기를 비롯 상세하게 코치한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허씨가 전씨에게 이광재 의원을 살리는 방법을 언급하기도 해 주목을 끌었다. 이 녹취록은 알려진 것처럼 이번 사건의 핵심인물은 전씨가 아니라 허씨였다는 점을 보여준다. 따라서 외국으로 건너간 허씨가 검찰에 나오지 않는 한 이번 사건은 미궁에 빠질 확률이 높아졌다.
허씨는 유전개발의혹 사건을 감사원이 집중 감사하자 4월4일 자신의 삶의 터전인 인도네시아로 건너갔다. 허씨는 아예 최근에는 자신을 찾아다니는 한국 언론을 피해 인도네시아에서도 잠적한 상태다.
허씨가 이렇게 당국의 수사망을 비웃듯이 해외로 도피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 시민권자이기 때문이다. 미국 시민권자는 외국인으로 간주 출국금지 대상이 되지 않는다. 다만 외국인의 경우 수사당국은 출국정지를 시킬 수 있으나 최대 10일에 불과하다. 따라서 사건의 핵심인 허씨는 감사원과 검찰의 감시망을 피해 외국으로 유유히 도주할 수 있었다. 따라서 검찰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허씨의 귀국을 종용시키지 못할 경우 오일게이트의 진실 규명은 쉽지 않을 전망이다. 그렇게 되면 4월 김종빈 검찰총장 체제 출범후 첫단추부터 검찰은 스타일을 구기게 된다.
이처럼 검찰 수사를 피해 외국으로 도주해 사건을 미궁으로 빠뜨린 ‘일도’ 선수들은 세계화 바람을 타고 점점 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해만 해도 7백50명이 해외도피했으며 그중에 가장 많은 1백여 명이 미국으로 도피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 많은 해외도피자 가운데 일도의 대명사는 대우그룹 김우중 전 회장이다. 99년 검찰의 대우 분식회계 수사가 시작되자마자 김 전 회장은 중국을 통해 외국으로 잠적했다. 그의 측근들에 따르면 그는 프랑스 여권을 가지고 베트남과 독일 등을 비교적 어려움없이 오가고 있다고 한다.
인터폴 적색수배 신분인 김 전 회장은 4월 초 베트남 한 호텔에서 교민들에 의해 목격됐다. 그는 호치민시의 한 호텔에서 적색수배자 상태인 자신의 이름으로 방을 예약하는 대담함도 보였다.
김 전 회장은 현재 사기 혐의 등으로 기소중지된 상태이다.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으로 이미 김 전 회장을 제외한 대우 고위간부를 비롯한 관련자들은 대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았으며 추징금만도 22조원에 이른다. 검찰은 김 전 회장이 귀국해야만 대우그룹의 분식회계 실태를 정확히 알 수 있다고 보고 있다.
김 전 회장의 비중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현대비자금 사건의 주역인 무기 거래상 김영완씨도 해외도피중이다. 김씨는 이익치 전 현대전자 회장이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건넨 1백50억원의 비자금을 관리해줬다고 검찰에서 진술해 박 전 장관을 구속시킨 장본인이다. 또 김씨는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의 돈을 관리한 혐의도 받고 있다.
김씨도 허씨와 마찬가지로 미국 시민권자다. 검찰은 미국으로 도피한 김씨를 소환하지 못하고 김씨가 선임한 변호사를 통한 진술을 토대로 박 전 장관을 기소했다. 그러나 1, 2심에서 김씨 진술을 증거로 인정해 유죄판결을 이끌어냈던 검찰은 대법원에서 무죄취지로 재판을 파기환송 당했다. 김씨가 동남아의 한 호텔에서 자신이 선임한 변호사를 통해 검찰에 제출한 진술은 증거능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검찰은 졸지에 김씨를 귀국시켜 관련 진술을 확보하거나 법정에 김씨를 세우지 않으면 박 전 장관을 풀어줘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검찰은 현재 김씨의 소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는 옛 중정 간부 출신인 장인의 도움으로 사채와 부동산 등을 통해 상당한 재력을 보유했으나 이를 모두 은밀히 숨겨둔 상태다. 따라서 검찰은 현재 김씨의 귀국을 종용할 방법이 없다.
이처럼 해외도피로 법망을 피하는데 성공한 인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해외도피 끝에 외국 경찰에게 체포돼 한국으로 송환된 인물도 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세풍의 주역인 이석희 전 국세청 차장과 최성규 전 경찰청 특수수사 과장(총경)이다.
▲ 권노갑(왼쪽), 박지원 | ||
또 최성규 전 총경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홍걸씨가 체육복표 사업자 선정과 관련해 업체로부터 주식 등 금품을 받았다는 ‘최규선 게이트’의 핵심 인물로 최규선 게이트가 터지자마자 미국으로 도피했다가 2년만에 강제송환 당했다.
최씨는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실의 발인 ‘사직동팀’의 책임자로서 직위를 이용해 각종 이권에 개입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청와대까지도 도덕적 시비에 휩싸이게 한 장본인이다. 특히 최규선씨에 의하면 최 전 총경은 검찰 출두전 최씨에게 일본으로 밀항을 권유하기도 했다.
최 전 총경은 허문석씨와 마찬가지로 사건 초기 인도네시아로 일단 도피했다 미국으로 건너갔다. 최 전 총경은 특히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에 주요 감시 대상자로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 JFK 공항을 일반출구와 다른 뒷문으로 유유히 빠져나간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요리조리 빠져나갔던 최총경은 미국에서 검거된 후 결국 인도 재판에서 한국행을 택했다. 그가 한국행을 택하는데 결정적이었던 것은 미국 감옥이 주는 빵 위주의 식사가 그의 입맛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검찰은 밝혔다. 이석희 전 차장도 미국 구치소 식사를 견디지 못했다고 검찰은 전했다.
해외로 도망가지 못해 결국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됐을 경우 차선책인 ‘부인(否認)’의 대명사는 영원한 DJ의 오른팔인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권노갑 전 민주당 고문이다.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의 최측근인 두사람은 나란히 검찰에 구속됐고 검찰과 법원에서 혐의를 줄곧 부인한 것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박 전 장관은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권씨는 유죄를 선고받았다.
권씨는 현대로부터 2백억원을 받은 혐의로 지난해 10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이다. 알선수재의 최고형인 5년형을 선고받은 권씨는 법정에서 “하늘도 무심하시지 하느님은 알 거야”라며 마지막까지 자신의 혐의를 부인했다. 그는 검찰과 법원에서 내내 결백을 주장했지만 법원은 그의 결백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권씨측 변호인은 심지어 현대로부터 받은 현금 50억원을 승용차로 실어날랐다고 검찰이 주장하는데 대해 현금 50억원의 무게만 500kg이 넘는데 어떻게 승용차로 운반하느냐며 반박했다. 권씨측은 검찰 진술이 날조됐다며 현장검증을 요청했다. 결국 서초동 법원 앞에서 이색 현증검증이 벌어졌다. 그러나 결과는 검찰 주장대로 다이너스티 승용차는 현금 50억원을 싣고 법원에서 남산까지 시속 60km로 달렸다. 그 결과 항소심에서 권씨의 유죄가 선고됐다.
하지만 권씨는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으로부터 5천만원을 받았다는 혐의에 대해서는 시종일관 부인해 결국 무죄를 선고받기도 했다.
권씨와 달리 박 전 장관은 혐의를 계속 부인한 끝에 무죄취지의 대법원 판결을 받아내 대조를 이뤘다. 박 전 장관은 대북송금 특검 당시 구속되면서 “지는 꽃잎이 바람을 탓하랴”는 묘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음이 ‘삼백’인데 이는 정권실세나 실력자들을 등에 업고 무혐의 처리되거나 입건유예 또는 기소유예 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현재 검찰에서는 삼백이 잘 통하지는 않는다. 삼백은 과거 김대중 정부초기까지 애용되다 검찰 수사를 다시 수사하는 특별검사제가 도입되면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삼백’을 쓰려다 가장 피를 본 사람은 진승현 게이트의 주인공 진승현씨다.
진씨는 2001년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다 불법대출 관련해 검찰 수사를 받자 바로 잠적했다. 잠적하면서 그는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과 검찰총장 출신 변호사를 선임해서 구속 수사만은 면하려고 했으나 결국 구속수감돼 유죄를 선고받았다. 또 자신의 구명을 돕던 김은성 전 국정원 차장마저 구속됐다. 백이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이다.
어설픈 ‘백’은 오히려 뒷말을 낳는 것은 물론 여론의 비난을 살 수도 있다. 2002년 신승남 전 검찰총장의 동생 승환씨가 이용호 게이트에 연루됐지만 형이 총수로 있던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하지만 이용호 특검에서 다시 승환씨는 구속수감됐고 형인 신 전 총장도 결국 비슷한 사건들에 연루돼 옷을 벗었다.
▲ 진승현(왼쪽), 이용호 | ||
최근에는 검찰에 비해 법원이 백이 더 잘 통한다는 지적도 있다. 검찰은 정권을 거치면서 다른 권력의 견제를 더 많이 받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일었다.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은 대선자금 수사 당시 서청원 전 한나라당 의원에게 11억원을 비롯 60여 억원을 대선 전후로 정치권에 전달한 혐의로 기소됐다. 대한생명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그는 법원에서 금고 이상의 형을 선고받을 경우 금융회사 대표직을 박탈당할 위기에 처해있었다. 한화가 어떤 노력을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법원은 그에게 대생 대표이사직을 유지할 수 있는 벌금형을 선고했다.
또 법원은 국민주택채권 1백67억원을 증여받아 세금 71억원을 포탈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전두환 대통령 차남 재용씨를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석방했다. 재판부는 1심대로 재용씨의 돈의 절반이 전두환씨 비자금이며 나머지는 외조부인 이규동씨가 증여한 것으로 유죄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재용씨가 벌금과 세금을 내면 이 돈을 모두 내놔야 한다는 점을 고려해 실형을 선고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조세포탈범의 경우 5천만원만 넘어도 가중처벌을 받는다는 점을 고려할 때 재판부가 재용씨를 봐줬다라는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대기업은 아직 검찰에서 삼백이 잘 통한다. 지난해 9월 5대그룹 부당내부거래로 참여연대에게 배임혐의로 고발된 그룹 총수들을 포함한 83명 가운데 사망한 고 정몽헌 현대아산 이사회 회장을 제외하고 대부분 무혐의 처리했다.
검찰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었지만 “수출 주력 기업들의 대외신인도가 손상되는 등 국민경제 전반에 악영향을 미칠 것을 우려한 점이 있다”라며 속내를 솔직하게 밝혔다.
특히 기업 가운데 삼성은 검찰에서는 무혐의, 법원에서는 승소판결을 얻어내 삼성불패의 신화를 자랑한다. 검찰은 지난 4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아들 재용씨(삼성전자 상무)의 삼성투신운용 주식 편법취득 고발 사건에서 무혐의 결정을 내렸다.
서울중앙지검 조사부는 ‘이재용씨의 삼성투신운용 주식 매입과 삼성자동차에 대한 거액 대출을 통해 회사에 손해를 끼쳤다’며 참여연대가 이수빈 회장 등 삼성생명 전·현직 경영진 6명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 위반(배임) 혐의로 고발한 사건을 무혐의 처분했다고 밝혔다. 참여연대는 검찰의 삼성봐주기가 심하다는 불만을 터뜨렸다.
검찰은 또 지난 2월에는 삼성SDI의 위치찾기서비스를 통한 노조탄압 의혹에 대해 무혐의 처리해 노동계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은 이에 대해 특별검사 임명발의안까지 제출하기도 했다. 삼성과 관련된 무혐의 사건은 이외에도 더 많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삼성이 이렇게 검찰에서 선처를 받는다는 지적에 대해 서울지검의 한 간부는 “삼성 사건을 맡으면 3대가 재수없다는 말이 있다”며 “검사들이 삼성 사건을 처리하는데 그만큼 이래저래 신경을 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특히 삼성이 현직 판사와 검사들을 연봉 수억원씩 주면서 법무팀 변호사로 선발해가고 있는 상황이라서 법조인들 사이에서 삼성그룹이 법조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 아니냐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김정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