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시픽인터내셔널·재일 한국인 유씨·프랑크푸르트계좌
▲ 지난 6월16일 김우중 전 대우 회장이 서울구치소로 구속수감되기 위해 대검을 나서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하지만 <일요신문>의 추적 결과, 보다 더 다양한 루트로 김 전 회장의 재산이 관리되고 있을 수도 있는 가능성이 발견됐다. 우선 대우 및 김 전 회장의 비밀계좌가 BFC 하나에만 국한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김 전 회장과 관련이 있는 페이퍼 컴퍼니와 그 관리자(해외 자금 도피처)도 현재 집중적인 의혹을 받고 있는 조풍언씨와 ‘홍콩 KMC’(대우정보시스템의 최대 주주), 미국 ‘라베스’사 외에 더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BFC에서 나간 돈이 해외의 법인이 아니라 전혀 알려지지 않은 ‘제3의 인물’의 계좌에도 흘러들어간 정황도 일부 포착됐다. 김우중 전 회장의 ‘은닉 재산’ 의혹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세 가지 키를 추적했다.
전형적 유령회사 '퍼시픽'
“김 전 회장 은닉재산에 대한 의혹을 풀고자 한다면 ‘퍼시픽인터내셔널’사를 주의깊게 살펴봐라.”
대우 사태에 깊숙이 개입되어 있는 한 관계자가 기자와의 만남에서 김 전 회장과 함께 일하던 당시를 회상하며 많은 이야기를 쏟아내던 중 조심스럽게 언급한 대목이다.
퍼시픽인터내셔널은 ‘필코리아리미티드’사(전 대우개발)의 최대 주주다. 무려 주식의 90.8%를 소유하고 있다. 필코리아리미티드는 김 전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가 실질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회사다. 그는 9.2%의 주식 소유로 2대 주주지만 최대 주주인 퍼시픽인터내셔널이 현재 실체가 없는 회사로 남아 있는 탓에 사실상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대우 사태를 바라보는 이들의 최대 관심은 ‘대우 그룹의 후신’으로 주목받고 있는 필코리아리미티드의 향후 행보에 쏠려 있다. “김 전 회장이 자신의 직계가족을 통해서 대우의 명예회복을 위한 발판으로 삼을 것”이라는 얘기가 파다하기 때문이다. 필코리아리미티드는 현재 경주힐튼호텔, 베트남 하노이 대우호텔, 중국 연변 대우호텔, 선재미술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자본금은 8백60억원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 전 회장의 차남 선협씨가 운영하는 아도니스 골프장도 외형상은 별개 회사지만 사실상 필코리아리미티드의 계열사 성격이 짙다. 아도니스 지분의 18%가 현재 필코리아리미티드에 있다.
결과적으로 ‘전 대우 로열패밀리’의 회사인 필코리아리미티드의 90%가 넘는 막강한 지분을 가진 최대 주주가 현재 완전히 베일 속에 감춰진 셈이다. 검찰과 예보에서도 “유령회사다. 전형적인 페이퍼 컴퍼니다”라고 말할 뿐, 이 회사의 실체에 대해서 아는 이는 현재 거의 없다. 심지어는 자기 회사의 최대주주임에도 불구하고 필코리아리미티드 관계자들도 모른다고 밝혔다. 케이만 군도에 소재한 외국투자법인이라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영국령인 케이만 군도는 ‘조세 피난처’로 유명한 곳이다.
기자는 퍼시픽인터내셔널의 실체를 쫓기 위해 대우 관계자들을 폭넓게 접촉했다. 관련 기록도 모두 뒤졌다. 놀랍게도 이 유령 해외법인이 국내 언론에 처음 알려진 것은 지난 91년 9월이었다. 당시 한 일간지는 ‘케이만군도의 퍼시픽인터내셔널이 국내 힐튼호텔(대우)과 합작으로 경주보문단지 관광호텔업에 9천9백63만달러를 투자한다’고 짤막하게 보도하고 있다. 이미 오래전부터 대우의 ‘파트너’였던 셈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도 의혹은 도사리고 있다. 14년 전의 일이지만 당시 경주보문단지 관광사업 규모로 볼 때 전혀 알려지지 않은 한 외국 투자회사가 별로 수익성도 보이지 않는 작은 규모의 이런 사업에 무려 9천9백만여달러씩이나 투자했다는 점에 대해 의혹이 쏠리는 것이다.
이 회사에 대한 여러 가지 가능성이 담긴 증언을 청취하는 가운데 유독 기자의 눈길을 끈 것은 조풍언씨 소유로 알려진 페이퍼 컴퍼니사와의 연관성이었다. 즉 퍼시픽인터내셔널이 ‘홍콩 KMC’사나 미국 ‘라베스’사와 같은 형태일 것이라는 얘기다.
한 재계 관계자는 “KMC와 라베스가 재미 교포 무기거래상 조풍언씨 소유라는 사실이 알려진 것도 아주 우연한 계기였고, 그로 인해 김 전 회장과 조씨간의 친분 관계 및 해외 비자금 관리인 의혹이 일었다”면서 “퍼시픽인터내셔널 역시 아주 똑같은 방식으로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퍼시픽인터내셔널이 무기거래상 조씨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다는 얘기인지 아니면 조씨와 비슷한 역할을 맡은 제3의 인물이 있다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대우 구조조정본부장을 지낸 김우일 전 상무는 “퍼시픽인터내셔널이 대우 초창기부터 존재해온 회사인 것은 맞다. 하지만 내부 직원들도 그 실체를 잘 모르고 있다. 다만 99년 김 전 회장이 힐튼호텔을 매각하려고 할 무렵에 당시 호텔 지분 40%를 퍼시픽인터내셔널이 갖고 있었다. 김 전 회장이 ‘이것 팔려면 퍼시픽인터내셔널의 허락을 받아야 하느냐’고 물어 내가 ‘그렇다’고 했더니 ‘과연 동의해줄까’라며 걱정을 하더라. 그래서 내 느낌으로는 김 전 회장이 실질적인 소유주라기보다는 제3의 인물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새로운 '파이프라인'
현재 검찰 조사에서 김 전 회장의 해외 재산 은닉 창구로 집중 조명받고 있는 곳이 바로 BFC 계좌다. 대우의 한 관계자는 “BFC는 (주)대우가 1981년 리비아 건설현장에 사용되는 유럽산 기자재 구입의 편의를 위해 설립된 부외 계좌로서 90년대 들어 대우의 해외진출 사업이 활발해지면서 편의를 위해 통합 관리한 것이지, 비밀 계좌는 아니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검찰은 현재 ‘BFC 자금 2백억달러 가운데 약 13억달러(약 1조6천억원)의 자금이 용처도 없이 사라졌다’는 점에 대해 예의주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참여연대 등에서는 “실제 BFC에서 관리한 비자금은 10조원이 넘는다고 말할 정도로 엄청나다”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그동안 대우의 은닉 자금을 꾸준히 추적해왔던 예보는 지난 2001년 발표에서 “BFC 계좌에서 4천4백30만달러가 두 곳의 해외 법인체인 페이퍼 컴퍼니사에 들어갔다”고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이 전부일까.
갖가지 의혹이 일고 있는 가운데 BFC 계좌의 돈이 법인뿐만 아니라 보다 더 추적이 어려운 개인 계좌에도 상당액이 들어갔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또한 이 개인은 전혀 외부에 실체가 드러나지 않은 김 전 회장의 측근이거나 특수한 관계에 있는 ‘제3의 인물’일 가능성도 아울러 제기되고 있다. 그런 의혹을 더욱 짙게 만드는 결정적인 단서를 <일요신문>은 확보했다. BFC 계좌에서 어느 특정인에게 꾸준히 정기적으로 돈이 송금된 사실을 확인한 것.
<일요신문>은 이미 지난 2001년 이 같은 사실을 포착, 한차례 보도한 바 있다(<일요신문> 462호 참조). 당시 대우 관계자를 통해 BFC의 37개 계좌 가운데 몇 곳에서 최저 2억원에서 많게는 8억원에 이르기까지 수억원대에 이르는 거액이 98년을 전후로 해서 매월 정기적으로 일본의 한 시중은행 개인계좌로 송금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대우로부터 이 돈을 송금받은 당사자는 유아무개씨로 밝혀졌다. 하지만 유씨의 존재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안개 속에 싸여 있다. <일요신문>은 유씨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애썼지만 그가 일본 도쿄 북구에 상당히 오랫동안 거주해온 재일 한국인이라는 정도의 정보에 그쳤다. 이름만으로는 유씨와 대우그룹, 또는 김 전 회장과의 관계를 유추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대해 대우그룹의 한 전직 고위 임원은 “당시 BFC 계좌의 실체에 대해서는 솔직히 나도 대우 사태 터지고 나서야 정확히 알았다. 그만큼 그룹 내에서도 비밀이었다. 그 계좌에서 돈이 들고 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김 전 회장과 계좌 담당자 몇 사람밖에 알 수 없다. 또한 돈을 입금받는 대상에 대해서는 김 전 회장밖에 알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고 밝혔다.
즉 <일요신문>에서 확인한 바와 같이 베일에 가려진 불특정인의 개인 계좌에도 얼마든지 BFC 자금이 입금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이 같은 가능성을 더욱 짙게 만드는 증언도 나왔다. 대우그룹 회계 담당자로 일했던 한 관계자는 지난 2001년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BFC에 입금된 해외비자금의 상당액이 서류상에서 흔적도 없이 증발되는 사례가 빈발했다”고 폭로한 바 있다.
또 다른 거점 프랑크푸르트
현재 대우 그룹 및 김 전 회장의 은닉재산 몸통으로 BFC가 주목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제2의 BFC가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증언이 나왔다.
과거 대우에 종사했던 한 관계자는 “대우 그룹이 현재 알려진 BFC 외에도 유럽의 또 다른 국가에서도 비자금 창구를 조성해 운영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당시 대우는 해외 법인만 약 4백개 정도 됐다. 거의 모든 해외 자금은 일단 해외 계좌를 한번 거쳐서 국내로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중심에 BFC가 있었다면 그 줄기로 또 다른 계좌가 존재했던 셈”이라고 밝혔다.
그의 증언을 어느 정도 믿을 수 있을까. 대우 출신의 한 관계자는 “BFC 외에 또 다른 해외 계좌가 있었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하지만 가능성은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한 관계자는 “유럽 해외 거점 계좌에 대해서 익히 알려진 영국 런던의 BFC 말고도 독일 프랑크푸르트 계좌설이 한때 나온 적이 있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실제 이 같은 구체적인 증언이 한때 대우 그룹에서 회계 담당자로 일했던 한 관계자를 통해서 4년전 한 일간지에 소개된 적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당시 이 관계자는 “대우는 당시 두 개의 통로를 통해 해외 비자금을 조성했다. 대우자동차 등 덩치가 큰 제조업체 비자금은 BFC를 통했고, 프랑크푸르트 계좌는 이보다 작은 규모로 해외 일선 판매 법인에서 나온 비자금을 주로 관리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대우의 한 전직 고위 임원은 “당시 대우의 유럽 거점 지역이 독일의 프랑크푸르트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는 얘기”라며 “그러나 또 다른 별도의 비밀 계좌라기보다는 BFC 계좌의 보충하는 계열 계좌일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