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대원과 여흥 돈 건네자 “우리 술집녀자 아닙네다”
▲ 묘향산 국제친선전시관 앞에서 북한 안내원과 함께한 필자 권기식씨. | ||
간단한 입국절차를 마친 후 북한 민화협에서 준비한 5대의 버스에 올라 숙소인 고려호텔로 향했다. 각 버스에는 ‘안내원’으로 소개한 민화협 관계자들이 3명씩 동승했는데, 이들의 임무는 안내와 감시를 병행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마치 패키지투어의 가이드 같은 친절한 모습이었지만 ‘체제 문제’와 관련한 주의사항을 전달하는 과정에서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평양 거리의 모습은 그동안 남쪽 TV에서 자주 소개된 탓에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일부 기념물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낡고 퇴색된 모습이어서 ‘회색 도시’ 같은 느낌을 주었다. 주체사상탑과 개선문, 인민대학습당 등 사회주의 건축양식의 웅장한 건축물들과 아파트 건물들의 낡은 모습은 묘한 대조를 이뤘다.
평양 사람들과 평양의 모습에서 우리는 ‘자주’와 ‘개방’의 기묘한 동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자주’는 북쪽 사람들에게 버릴 수 없는 가치인 것 같았다. 각종 구호와 선전 문구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말이지만 ‘자주’라는 말은 이미 북쪽 사람들의 삶 그자체가 돼버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 일행은 고려호텔 접대원들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놀았는데, 감사의 표시로 달러를 주려고 하자 극구 사양했다. “남쪽에서 온 동포이기 때문에 함께 놀았을 뿐이지 술집여자는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개방’은 이들에게 새로운 가치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북한을 세 번째 방문한다는 김성호 전 의원은 “평양이 갈수록 밝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 분위기는 물론 시민들의 표정도 갈수록 활달하고 개방적이라는 것이었다.
평양시내 곳곳에는 산뜻한 모습의 노점들이 들어서 아이스크림과 음료수 등 간단한 먹거리를 팔고 있었다. 안내원의 말에 따르면 평양시내에만 모두 1천5백여 개의 노점이 있으며, 개인끼리 노점을 사고 판다고 한다. 민화협 소속 안내원들 중에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서 있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자본주의식’ 차림을 한 사람들도 많았다. 옷차림은 물론 세련된 매너로 우리 일행과 흔쾌히 어울리는 그들의 모습에서 ‘개방’의 물결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저녁에 능라도 5·1경기장에서 열리는 ‘아리랑’ 집체공연을 관람했다. 10만여 명의 인원이 동원된 ‘아리랑’ 공연은 그 규모나 화려함에서 다른 어느 문화공연보다 강한 인상을 주었다. 10만여 명의 인원이 일사불란하게 공연을 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옆자리에서 관람한 독일 관광객 게르하르트씨(28)는 감탄사를 연발했다. 공연을 보고 난 뒤 돌아오는 차안에서 의견은 반으로 나뉘었다. “훌륭한 공연”이라는 평가와 함께 “기분 나쁘고 소름끼친다”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함께 나왔다.
▲ 평양 옥류관 앞 간이 매점에 시민들이 늘어서 있다. 평양에는 이런 노점이 1천5백여 개 있으며 개인끼리 사고 판다고 한다. | ||
숙소인 고려호텔 앞은 최근 아스팔트를 새로 깔았는데, 북측 안내원에 따르면 얼마 전 안상수 인천시장이 평양을 방문할 당시 제공한 아스콘으로 포장한 것이라고 했다. 각종 음식점들이 늘어서 ‘먹자거리’에 해당하는 창광거리는 새롭게 포장한 아스팔트 도로와 페인트칠로 인해 서방 국가의 활기찬 거리를 연상시킬 정도로 산뜻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창광거리를 벗어나면 여전히 잿빛 아파트들이 즐비해 북한의 물자난을 실감할 수 있었다. 북한 당국이 이번 공연 추진과정에서 현물로 페인트를 요구한 이유도 이 같은 물자난에 기인한 것이리라.
‘자주’와 ‘개방’은 평양사람들의 생활속에 녹아 있었지만 두 개념이 충돌하는 현장도 곳곳에서 목격됐다. 개방 정책 이후 한 쪽에서 이른바 ‘돈 맛’을 알게 된 사람들이 뒷돈 받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선 자존심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모습도 보였다.
두 명의 자녀를 두고 방 3칸짜리 아파트에 산다는 한 안내원은 우리 일행 중 한 명이 북한 주민의 평균 월급이 수십달러밖에 안 된다고 하자 “우리 월급을 달러로 비교하지 말라”며 화를 냈다. 월급 4천원을 받는다는 그는 단순 환율이 아닌 실질 구매력으로 계산하면 자신의 월급이 4백~5백달러 정도는 된다고 했다.
▲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왕릉 입구. 주변에선 화가들이 그림을 팔고 있었다. | ||
오후 3시 봉화예술극장에서 열린 공연은 성황리에 끝났다. ‘고구려’라는 공연의 타이틀 때문인지 북한 주민들은 깊은 관심과 공감을 보였다. 이날 저녁 양각도 호텔에서 열린 환송 만찬에서도 북한 당국 관계자들은 고구려 공연의 의미를 통일과 연관시켜서 강조했다. 내 옆자리에 앉은 30대 북측 은행 관계자도 “쭉 냅시다”(“원샷”의 북한 표현)를 연발하면서 40도 짜리 평양소주를 거푸 들이켰다. 그는 “앞으로 남북 은행간 교류가 있었으면 좋겠다”며 건배를 제의했다.
‘자주적으로’ 살아가면서도 ‘개방’을 통해 경제적 성과를 이뤄내려는 움직임이 9·9절을 앞둔 평양 거리 곳곳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2000년 6·15공동선언 이후 5년이 흐른 지금 평양은 개방의 문턱에 서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필자소개
필자 권기식씨는 경북대와 한양대학원을 졸업하고 <한겨레신문> 기자, 청와대 정치상황국장, 노무현 대통령후보 비서실 부실장, 한양대학원 연구교수 등을 거쳐 현재 열린우리당 당의장 비서실 정무차장을 맡고 있다. 민족오페라 <광개토대왕> 공연 추진단의 일원으로 지난 9월5일~8일 평양을 방문했다.
권기식 전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