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격자가 살인자로?“억울하다” 재심청구
2000년 8월 10일 새벽 2시께 전북 익산 약촌 오거리에서 택시기사 유 아무개 씨가 처참한 모습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유 씨의 어깨와 가슴 등 12군데서 흉기로 찔린 상처들이 발견됐다. 흉기의 날이 갈비뼈를 지나 폐동맥까지 건드린 깊은 상처였다. 유 씨의 팔과 얼굴 곳곳에서 발견된 방어흔은 당시 유 씨가 얼마나 필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려 했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유 씨는 급히 대학병원으로 옮겨졌지만 끝내 숨을 거뒀다.
새벽 2시, 인적이 드문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었다. 사건발생 직전 “약촌 오거리, 강도야!”라고 택시에 설치된 무전기에 소리친 유 씨의 목소리와 사건을 목격했다고 말한 당시 15세였던 ‘다방 꼬마’ 최 씨의 진술이 이 사건의 결정적 단서였다. 다방 배달 일을 하던 최 씨는 현장조사 중이던 경찰에게 “2명의 남자가 뛰어가는 것을 봤다”고 말한 뒤 다음날 아침까지 목격자로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사건발생 3일 후 익산경찰서는 약촌 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용의자를 체포했다. 체포된 용의자는 놀랍게도 목격자였던 최 씨였다. 당시 수사결과에 따르면 최 씨는 오토바이를 타고 택시 앞을 지나가다 택시기사로부터 ‘애미, 애비도 없느냐’는 말과 함께 욕설을 듣자 앙심을 품고 오토바이 공구함에 있던 칼로 운전기사를 찔러 살해한 것으로 발표됐다.
최 씨는 자신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조사과정에서 최 씨의 진술은 자백과 번복이 반복됐다. 1심 법원에서 최 씨는 “경찰봉과 대걸레로 맞으면서 잠도 못자니까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군대 다녀온다고 생각하고 소년원에 가서 1~2년만 살면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믿었다”며 자신의 무죄를 주장했다.
그런데 2심을 앞두고 최 씨는 무죄라는 주장을 번복하고 범행을 자백한다. 형량을 줄이자는 국선변호사의 설득 때문이었다. 결국 최 씨는 5년을 감형 받아 2심에서 10년형을 판결 받았다. 그렇게 최 씨는 살인자가 됐다. 대법원 상고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의 결백을 믿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자포자기했다.
실제로 당시 수사과정에서는 여러 허점들이 발견됐다. 경찰은 최 씨가 택시기사를 살해한 후 피 묻은 칼을 들고 인근 공원으로 도주해 칼을 신문지로 닦은 다음 입었던 옷은 세탁소에 맡겼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최 씨가 범행당시 사용했다는 흉기와 입었던 옷 어디에서도 택시기사 유 씨의 혈흔이 발견되지 않았다. 국과수 검사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증거로 채택된 칼도 의문이었다. 당초 경찰은 최 씨가 오토바이 공구함에 있는 칼을 범행도구로 이용했다고 했다. 최 씨는 공구함에 있던 칼이 낚시할 때 사용하던 과도라고 했지만 증거로 제출된 칼은 자신의 과도가 아닌 다방 주방에 있던 식칼이었다. 최 씨가 범인이라는 물증은 하나도 없었다. 결국 물증 없이 정황증거와 최 씨의 자백만이 판결의 증거로 채택됐다.
김 씨의 진술은 상세했다. 김 씨는 2000년 초여름 무렵 본드와 부탄가스를 마시고 미리 준비한 식칼을 가지고 택시강도를 계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식칼을 택시기사 목에 들이대고 금품을 요구하자 운전기사가 반항해 뒷좌석에서 택시기사를 준비한 흉기로 찌르고 인근 친구집으로 도망쳤다는 게 사건 전말이었다.
이 진술은 최 씨가 누명을 벗을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최 씨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져 버렸다. 물증이 발견되지 않자 새로운 용의자들이 자백을 번복했다. 자백을 번복한 김 씨와 친구 임 씨는 나란히 정신병원에 입원해 폭력적인 게임에 심취해 거짓말로 자백을 꾸며냈다고 말한다. 결국 수사는 2006년 흐지부지 종결됐고, 최 씨의 형집행은 계속됐다.
2010년 형집행을 마치고 출소한 최 씨가 자신의 무죄를 밝히기 위해 재심을 준비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근로복지공단이 사망한 택시기사 유가족에게 지급한 4000만 원에 1억여 원의 이자를 붙여 지급하라는 구상권 청구소송에서 패소해 억대의 빚까지 떠안게 됐다.
재심 조건도 무척 까다로웠다. 원 판결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명백한 증거가 없는 이상 재심을 청구했다 기각당하면 재심을 신청할 수 없다. 검찰과 법원의 판단을 뒤집어야 하는 상황에서 재심이 결정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최 씨는 다시 재판을 받아 자신이 살인자가 아님을 증명하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최 씨의 재심 변호사인 박준영 변호사는 “국가 기관이 검토해 재심을 권고하는 시국사건과 비교해 형사사건이 재심을 받는 건 ‘하늘의 별따기’다. 하지만 ‘약촌 오거리 살인사건’의 경우 강력한 재심사유가 있기에 재심이 가능할 것이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박 변호사는 강력한 재심사유로 △새로운 목격자의 등장 △당시 증거로 채택되지 못한 최 씨의 물리적 범행시간이 불가능함을 증명해 줄 택시의 운행기록 제출 △경찰의 수사과정에서 있었던 불법행위 등을 들었다. 박 변호사는 “당시 현장에는 4명의 목격자가 있었다. 목격자들은 당시 현장에 오토바이가 없었다고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다. 그 중 한 명만이 경찰 조사를 받았다. 재심을 준비하면서 당시 현장에 있었던 또 다른 결정적인 목격자의 진술을 확보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당시 최 씨는 너무 어렸고 세상을 몰라 진실을 바로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이라도 자신이 살인범이 아니라는 것만은 꼭 밝히고 싶다는 것이 소년에서 청년이 된 최 씨의 간절한 바람이다.
배해경 기자 ilyohk@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