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검사, 의견진술 하시죠.”
재판장이 논고를 명령했다. 검사가 흥분한 표정의 붉은 얼굴로 일어섰다. 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재판장님! 이 법정에서 먼저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검사의 솔직한 심경을 얘기하고 논고문은 나중에 내겠습니다.”
검사와 대각선 방향의 피고인석에 앉은 회장부인이 독기 품은 눈으로 검사를 노려보았다.
“회장부인은 미행만 시켰다고 하면서 살인교사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회장부인이 아주 교묘하게 살인범인 김용국과 마기룡을 해외로 도피시켰습니다. 정말 미행만 시켰다면 왜 범인들을 도피시켰을까요? 도피시킨 사실 그 자체가 벌써 살인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랫동안 검사 생활을 해오면서 회장부인인 이 김귀숙같이 뻔뻔스런 여자는 정말 처음 봤습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서운 여자입니다.”
김귀숙의 얼굴에 냉소가 스치고 지나갔다. 사형 구형을 받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웃음을 짓는 인간을 나는 처음 보았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 검사가 계속했다.
“여대생 정혜경양의 시신이 발견되고 범인들이 해외로 도피했을 때 수사검사인 저는 회장부인이신 저 여자 김귀숙에 대해 살인혐의를 걸 수 없었습니다.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죠. 그때 김귀숙이 저를 찾아와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빨리 김용국이가 잡혀 와서 진상이 밝혀졌으면 좋겠다’고 교양 있는 지도층인사의 부인인 양 가장했습니다. 그러다가 천신만고 끝에 김용국이 잡혀 왔습니다. 회장부인은 검찰청에 와서 김용국을 보자마자 이번에는 ‘네가 거기서 죽지 왜 이렇게 왔니?’라고 말하는 겁니다. 마치 조카인 김용국이 명문가문의 망신이라도 시킨 듯 말입니다. 이건 검사인 제가 직접 목격한 사실입니다.
김귀숙은 모든 사실을 무조건 부인했습니다. 검사인 제가 김용국과의 통화내역서를 뽑아 하나하나 들이대야 마지못해 거짓을 섞어 조금 인정하는 독한 인간이었습니다. 김귀숙은 살인청부 자금을 단 1원까지도 현찰로 줬습니다. 그것도 차 안에서 은밀히 말입니다. 김귀숙은 한번은 조카 김용국에게 실수로 10만원짜리 수표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마저 얼마 후 돌려달라고 하고 만원짜리로 바꾸어줄 정도로 증거인멸의 습관이 뼈에까지 박힌 인간입니다. 살인청부자금을 현찰로 만들어 가지고 김용국에게 전하는 모습도 ‘007’을 방불케 합니다. 몇 대나 되는 자기 차를 쓰지 않고 기사를 대동하지도 않았습니다. 어떤 때는 혼자 변장을 하고 택시를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급할 때도 절대로 자신의 휴대폰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꼭 공중전화를 사용했습니다. 김귀숙은 이렇게 완전범죄를 노린 무서운 인간입니다.”
나는 오랜만에 용기 있는 검사를 본 것 같았다. 그의 집요함이 아니면 회장부인은 이미 무혐의로 석방되었을 것이다. 살인교사가 유죄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사이비 교주들이 광신자를 시켜서 사람을 살해해도 무죄였다. 살인지시를 한 조폭 두목들도 쉽게 법망에 걸려들지 않았다. 돈의 힘은 살인청부업자들뿐만 아니라 권력의 칼도 솜방망이로 만들곤 했다. 회장부인은 바로 그 힘을 신앙처럼 믿고 있는 듯했다.
“김귀숙측은 참 교활하게도 범행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검찰에서 추정한 사망시점과 실제 사망시점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트집 잡으면서 혐의를 부인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 뇌에 대못이 박히고도 생존한 사람의 뉴스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또 몸에 바늘이 여러 개 들어 있는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죽은 정혜경양도 실제로는 아주 작은 공기총알이 뇌에 박혔습니다. 숨골을 건드리는 치명상이 아니고 대뇌피질에 박혔다면 즉사하지 않고 오랜 시간 고통을 받으면서 서서히 죽어갔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망시각은 총기 발사시각보다 훨씬 후일 수 있습니다. 더구나 3월의 기온이 낮은 산기슭에서는 부패가 아주 늦게 진행됩니다. 회장부인 김귀숙측은 이런 사실을 무시하고 교묘하게 사건을 흐리고 있습니다.”
난 <악마 변호사>란 미국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소만이, 그래서 더 많은 돈을 버는 것만이 변호사의 목표인 것이다.
또 김귀숙측은 죽은 정혜경의 머리에서 나온 총알이 앞이마뿐만 아니라 뒤통수에서도 발견됐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마기룡이 한 방향으로만 총을 쐈다는데 왜 앞뒤 다른 곳에서 총알이 나오느냐는 주장입니다. 이걸 보십시오.”
검사는 손가락을 총 모양으로 해서 자기 이마에 가져다 댔다.
“동물이나 인간이나 주먹으로 맞아도 머리가 즉각 반대쪽으로 반응합니다. 앞을 쏘면 머리가 돌아가고 그러면 다음 총알은 뒤통수에 맞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반동으로 다시 머리통이 돌아와 앞에 총알이 맞을 수 있습니다.”
검사는 총구처럼 손가락을 이마에 대고 마치 서부영화의 결투장면처럼 머리를 획 돌렸다가 다시 반동으로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코믹하게 연기했다. 순간 나의 눈에 방청석 끝에 있는 여대생의 아버지 정의택씨가 보였다. 그의 붉어진 눈에 물기가 번들거렸다. 그때 갑자기 김귀숙이 손을 번쩍 들면서 발악을 했다.
“재판장님! 저 검사가 소설을 써요, 소설을.”
“가만있지 못해요?”
재판장이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어떤 다른 힘을 광신하는 그녀에게 재판은 국가와의 게임이었다. 자기 무덤을 파는 그녀에게 차라리 측은한 느낌이 들었다.
“김귀숙은 번복하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르러서야 아주 조금씩 말을 바꾸는 인간 이하였습니다. 처음에 김귀숙은 저에게 너무너무 억울하다고 했습니다. 그런 김귀숙의 태도에 검사인 저도 깜빡 속아 살인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조심해서 조사를 해 갔습니다. 그래서 일단 살인혐의는 배제하고 체포감금 정도로만 조사했었습니다. 김귀숙은 검사를 그렇게 현혹시키고 그 와중에 김용국과 마기룡을 도피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있는 베트남에 전화를 걸어 자신은 전혀 관여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게 하고 그걸 녹음해서 증거로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러면서 검사인 제게 와서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자기 조카인 김용국이가 빨리 잡혀야 진실이 밝혀진다고 울먹이는 연기를 했습니다. 혐의를 받고 있는 자체도 명예가 훼손되는 듯이 말입니다. 그러다 정작 김용국이 잡혀오자 독 오른 얼굴로 김용국에게 죽으라고 하면서 덤비는 걸 보고 검사인 저는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정말 독하고 치밀하고 잔인한 여자입니다.”
나는 회장부인을 바라보았다.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구속된 피고인 신분이면서도 좋은 옷을 입고 있었다. 아직도 미모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어리석은’ 김용국의 자백만 아니었다면 그녀는 여전히 부잣집 착한 사모님일 것이다.
“저 김귀숙이가 얼마나 다그쳤으면 김용국이나 마기룡이 여대생을 잡자마자 죽였겠습니까? 정말 소름끼치는 장면은 김귀숙의 남편인 회장이 주가조작으로 대구에서 구속되어 재판을 받을 때였습니다. 김귀숙의 변호인들은 남편이 구속된 상황에서 어떻게 옥바라지에 바쁜 부인이 살인교사를 할 수 있었겠느냐 주장하고 있습니다. 변호사의 그런 주장이 보통사람들의 상식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김귀숙은 그 상식선을 넘어서 그런 상황에서도 밤에 서울로 상경해서 죽은 정혜경양 아파트 앞에 와서 김용국이 보여주는 총까지 확인하고 다시 내려갔습니다. 본 검사가 항공기 탑승내역과 비행기표를 확보하지 않았다면 저 여자는 죽을 때까지 그 사실을 부인했을 겁니다.”
난 그 사실을 처음 알았다.
“이봐요, 검사님!”
회장부인이 다시 손을 들면서 소리쳤다.
“가만있지 못해요?”
재판장이 화를 내면서 어조를 높였다. 교도관이 와서 회장부인을 제지시켰다. 논고는 결론 쪽을 향해 가고 있었다.
“김귀숙은 살인청부자금을 주지 않았다고 계속 잡아떼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본 검사가 김용국의 동생 통장을 들이대고서야 비로소 조용해졌습니다. 살인 수고비를 간접적으로 위장해서 준 거니까요. 물론 이 법정에서는 그 돈들을 다 친척을 도와준 따뜻한 돈으로 변신을 시켰지만 말입니다. 본 검사는 돈을 받고 죽은 정혜경양을 미행한 자들로부터 들은 사실이 있습니다. 여대생을 미행시키고 회장부인 김귀숙은 미행자를 미행하는 독한 여자였습니다. 미행자들에게 여대생 정혜경을 조금도 놓치지 말고 밀착 감시하라고 했습니다. 하루는 여대생 정혜경이 가다가 자기를 따라오는 낌새가 있어 방향을 백팔십도 바꿔 돌아서서 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미행자들도 정혜경이 보는 데서 백팔십도 돌아서 따라오더라는 겁니다. 그 뒤에서 회장부인 김귀숙이 눈을 부라리고 있어서 그랬다는 겁니다. 검사실에 붙잡혀온 미행자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알량한 돈 몇 푼 때문에 그랬다고 자백했습니다.
김귀숙은 심지어 판사사위집 현관에도 실을 붙여두고 미행자의 감시를 재확인하는 여자였습니다. 김귀숙은 백퍼센트의 완전범죄를 저지르려고 한 극악무도한 인간입니다. 지금 이 법정에서도 억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 뻔뻔스런 모습을 보십시오. 단지 자신의 의심만으로 사람을 죽인 저 여자는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살인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이 사건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소설 속에서나 있을 엽기적이고 패륜적인 살인 얘기입니다. 사람을 죽여 놓고도 죽은 여대생의 아버지에게 단 한마디 미안하다는 말도 없습니다. 또 민사소송에 걸리게 되자 그 많은 재산을 빼돌리면서도 피해자측에 단돈 1원도 공탁하지 않는 집안입니다. 재판장님! 이 자리에 서 있는 저 여자를 보십시오. 돈이면 무엇이든지 다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저 여자는 죽어야 마땅합니다. 사형을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청석이 술렁거렸다. 다음은 김용국과 마기룡에 대한 검사의 논고였다. 김용국은 뭔가 희망하는 얼굴이었다.
“김용국의 경우는 그래도 뒤늦게나마 반성하고 진실을 말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대생 정혜경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 걸 알면서도 중간에서 바른 처신을 하지 않고 회장부인의 꼭두각시 노릇을 한 점, 또 상황이 난처해지자 해외로 도피한 파렴치한 점이 있습니다. 마기룡의 경우는 처자식도 없는 혼자의 몸이면서도 돈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사람을 확인사살까지 했습니다. 더구나 마기룡은 해외에서 신분을 숨기기 위해 성형수술까지 하는 치밀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들에 대해서도 역시 사형에 처해 주십시오.”
김용국과 마기룡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회장부인 김귀숙도 처음으로 초조한 듯 손가락을 주물렀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