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부인은 무죄를 약속받은 듯 자신만만하게 웃었다
2004년 2월4일 고등법원 304호 법정. 붉은 주단 의자에 앉은 재판장의 표정이 속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담담했다. 살인교사 혐의로 기소된 회장부인에 대한 변론의 순간이었다. 대형 로펌의 거물급 변호사들이 동원된 법정이었다. 먼저 장관급을 지낸 대표 변호사가 준비된 변론문을 들고 첫 포성을 울렸다. 그들은 변론조차 나누어서 했다.
“오랫동안 심리를 해주신 재판장과 배석판사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이 사건에서 검찰이 여러 가지 의문점을 발견해서 진실을 밝혀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보니 검찰의 태도는 오히려 오해를 증폭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사건은 여대생의 사체가 산기슭에서 발견되고 나서야 본격적인 수사가 이뤄졌습니다. 현장에서 혈흔도 발견되지 않았고 여대생을 담고 올라갔다는 포대자루에 총구멍도 없었습니다. 총소리를 들은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정황을 볼 때 저희 변호인단은 여대생이 제3의 장소에서 살해되어 옮겨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검찰은 범인들이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그들과의 전화내역만으로 회장부인 김귀숙을 구속했습니다. 그것도 살인죄가 아닌 체포·감금 혐의 정도였습니다.”
사건이 교묘하게 변질돼가고 있었다. 그가 계속했다.
“중국에서 범인들이 압송되어 첫 진술을 했을 때 저희 변호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들이 제3자에게 부탁해서 한 범행이라고 진술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범인 김용국의 말이 번복됐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모든 수사는 김용국의 말에 꿰어 맞추는 형식으로 진행됐습니다. 김용국의 거짓말을 근거로 한 이 수사는 결국 추리소설에 불과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담당 변호사가 구체적인 근거를 들어가면서 변론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회장부인 김귀숙은 거물급 변호사의 지원사격에 비 맞은 식물처럼 되살아나고 있었다. 회장부인의 공판전담 변호사가 그 뒤를 이어 변론했다.
“김귀숙이 살인교사를 했다는 점에 대한 증거는 오직 김용국의 진술뿐입니다. 검사의 말처럼 김귀숙이 치밀하고 독한 여자라면 범행방법이나 사체처리에 대해서도 역시 면밀히 계획을 세워 실행했어야 마땅합니다. 치밀한 회장부인 김귀숙은 미행을 시키고도 다시 그 뒤를 미행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여대생을 살해한 뒤에는 그 모든 걸 김용국에게 맡기고 전혀 관여하지 않은 걸로 되어 있습니다. 성격상 과연 그게 일관성 있는 행동일까요?”
죽은 시신을 낙엽만 덮어둔 사실도 허술했다.
“김용국은 미행을 하면서 회장부인으로부터 차도 지원받고 돈도 얻어 썼습니다. 그렇다면 살인을 지시받았다면 얼마나 거액을 약속받았을까요? 그런데도 경찰에서 이 법정에 이르기까지 김용국은 고모인 회장부인으로부터 살인에 관해 자기는 단 한 푼도 약속도 하지 않고 돈을 받은 적도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받은 1억5천만원의 살인청부자금은 모두 마기룡에게 전달했다고 강변하고 있습니다.
김용국이 과연 고모인 회장부인을 위해 그렇게 충성했을까요? 더구나 이 사건의 살인시점은 김용국 부부가 고모인 회장부인을 찾아가서 방 얻을 돈을 도와달라고 했다가 냉정하게 거절당한 이후였습니다. 퍽이나 섭섭했다는 감정 표현이 수사기록에 그대로 적혀 있습니다. 그렇게 섭섭한 고모의 살인 부탁을 그냥 들어주었다는 게 과연 맞는 말일까요? 더구나 김용국은 살인에 직접 관여했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고백한 진실은 순수한 진실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어눌한 모습을 하면서 철저하게 계산된 형식적인 진실입니다.”
변호사인 나 역시 일말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민 변호사가 계속 지적해 나갔다.
“이 사건 수사의 논리적인 모순점을 대도록 하겠습니다. 김용국은 ‘살인계약금을 이미 전달했는데 회장부인 김귀숙이 그걸 돌려달라고 하면서 안 주면 아이들 학교까지 찾아가 행패를 부리겠다고 하는 바람에 살인까지 했다’고 자백하고 있습니다. 이게 과연 성립할 수 있는 얘기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미행이란 건 부도덕하지만 큰 범죄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살인의 경우는 다릅니다. 회장부인 김귀숙이 돈을 돌려달라고 공개적으로 아우성칠 수 있는 입장이 못 됩니다. 자신의 살인청부가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녀는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상장회사들을 거느린 그룹의 회장부인입니다. 살인계약금을 돌려달라고 ‘난리난리’쳤다는 김용국의 말이 맞는 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이건 모두 다 김용국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한 것입니다.”
방청석이 술렁댔다. 회장부인 김귀숙이 옆에 있는 김용국을 쏘아보고 있었다. 민 변호사가 서서히 결론을 짓고 있었다.
“형사재판에서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입증의 정도는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지게 해야 한다는 게 대법원 판례입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무죄입니다.”
방청석의 회장측 사람들로부터 소리 없는 박수가 터져나왔다. 결국은 연결고리인 김용국의 유일한 증언이 신빙성을 잃고 있었다. 나 역시 김용국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작은 일을 우물쭈물하다가 큰 의심을 받는 바보였다. 다음은 나의 차례였다.
“김용국의 변호인인 저는 이 사건을 맡으면서 한 가지 절대적인 조건을 달았습니다. 그건 김용국이나 그의 처가 진실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변호를 그만두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변호사의 임무 역시 실체적 진실의 발견이 먼저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변호사 윤리상 의뢰인의 만족이 먼저인가 진실이 먼저인가의 선택 문제가 있었다. 개인사업인 이상 고객을 만족시키고 높은 보수를 받는 것도 탓할 수는 없었다. 그런 경우 교활한 공작이 진행되기도 했다. 머리 좋은 변호사들이 모여 치밀한 시나리오를 작성했다. 증인들을 매수하고 검사의 칼날을 무디게 했다. 담당 재판장과 절친한 변호사들을 동원해서 판사의 시선을 죄인에서 친구 쪽으로 바꾸는 ‘최면술’을 걸기도 했다. 악마의 힘은 돈에서 나왔다. 대법원 판례 하나를 만드는 데 24억원이 들었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난 그런 것들을 깨고 싶었다. 그들의 위선을 벗기고 싶었다.
“이 사건에서 회장부인인 김귀숙은 절대로 살인을 교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심부름했던 김용국은 회장부인이 시켜서 살인을 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 중의 한 사람은 철저히 거짓말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변호사인 저는 김용국 피고인을 여러 번 구치소에서 만나면서 관찰을 한 바 있습니다. 김용국은 치밀하게 살인을 계획하거나 실행할 만한 대담성이 없습니다. 그의 처나 친척을 통해 성격이나 살아온 행적을 살폈습니다. 친한 친구를 찾아가 만나 김용국, 그가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가도 알아봤습니다. 그는 우유부단하고 상황에 적당히 반응하는 성질입니다. 법정에서 검사나 상대방 변호사가 날카롭게 던지는 질문에 대항할 지능도 없습니다. 증인신문들을 통해 보신 그대로 그는 자기모순의 논리에 당황하고 대답을 못한 적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몰아치면 판단도 없이 그대로 긍정해 버리는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완벽한 논리 속에 진실은 없었다. 한 방울의 눈물 속에 분해서 더듬는 말 속에, 그리고 절망한 눈 속에 진실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으면 해보세요.”
재판장이 최후진술을 명령했다. 회장부인 김귀숙이 다리가 아픈 듯 얼굴을 찡그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환갑 나이에 살인죄에 연루되어 고모와 조카가 재판정에서 나란히 앉아 있습니다. 판사사위를 미행하다가 이렇게 나와 피고인이 됨으로써 판사 사위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법조계에 물의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저는 지금 제 옆에 있는 살인범 김용국과 마기룡 때문에 수감생활을 하느라고 병을 얻고 가족들까지 죄인 아닌 죄인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용서를 구해야 할지 어떨지 회한만 가슴에 사무칩니다. 저 또한 딸을 가진 부모로서 어떻게 사람을 죽이라는 저주받을 짓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 또한 제2의 피해자가 되어 이렇게 서 있습니다. 재판장님께서는 검사가 쓴 소설을 보지 마시고 현명한 판단으로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시기를 간청합니다.”
다음은 김용국 차례였다.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그냥 죄송하죠.”
김용국이 한마디로 끝냈다. 다음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마기룡이 종이 한 장을 품속에서 꺼내 읽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의 잘못이 꽃다운 생명을 없애고 그 가족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죽고 싶습니다. 저 역시 힘든 가정에서 태어나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고생하면서 자랐습니다. 남들처럼 평범한 가정을 꾸미고 행복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살아온 과거를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저는 죽는 것만이 속죄하는 길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절망만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희망을 가지고 싶습니다. 정말 뼈저린 반성으로 살고 싶습니다.”
결국 그는 재판장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있었다.
“그러면 2월25일 오후 2시에 판결을 선고하겠습니다.”
재판이 모두 끝났다. 판사들이 퇴정을 하자 회장부인이 고개를 돌려 방청석의 가족을 보며 말했다.
“내일 면회와.”
그녀는 사형구형을 받은 피고인의 얼굴이 아니었다. 이미 무죄를 약속받은 듯 미소 짓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다음호에 이어집니다.)
엄상익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