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의 전쟁’ 30년 만에 어색한 악수
▲ 지난 12일 호텔 예식장에 모습을 드러낸 조양은씨. 이날 김태촌씨는 항상 수행원들을 대동하고 다녀 카메라에 모습을 담지 못했다. 특별취재팀 | ||
12월8일 서울의 S호텔에서는 한 기업의 송년 모임이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대부분 유명 조폭 보스 출신들이었다. 12월12일 서울 강남의 I호텔 예식홀은 그야말로 ‘조폭 보스’ 출신들의 총동원 대회를 보는 듯했다. 한국 조폭의 계보를 줄줄이 꿸 만한 인사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이튿날인 13일 서울 강남의 R호텔에서는 한 체육단체의 회장 취임식이 열리고 있었다. 이날 신임 회장으로 취임한 이는 과거 유명 조폭 보스였다.
김두한 이정재 이화룡 등 소위 ‘주먹 1세대’들이 모두 사라진 이후 조폭의 계보도에 여전히 남아 있는 이들이 지난 12월 한 달 동안 잇따라 모습을 나타냈다. 명동을 장악하며 1.5세대의 천하통일을 이뤘던 신상현씨(일명 신상사)에서부터 영남 조폭의 여전한 전설로 남아 있는 이강환씨, 그리고 80년대 조폭의 전성시대를 열었던 ‘3대 패밀리’ 보스 출신의 조양은씨와 김태촌씨 등이 그들이다.
<일요신문> 특별취재팀이 이들 행사에 대한 정보를 사전에 입수, 현장 취재에 나섰다. 행사장에 모습을 나타낸 초로의 보스들은 비록 나이는 들었지만 그 위세와 권위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과연 이들은 새로운 ‘조직 재건’을 꿈꾸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한 ‘추억 모임’을 주변에서 확대 해석한 것일까.
12월8일 S호텔의 행사장을 취재진은 직접 찾아갔다. 거기에서 일부 몇몇 조폭 보스 출신들이 행사장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기도 했으나 행사장 안에 들어가는 데에는 실패했다. 대신 호텔 관계자의 전언을 통해 행사의 성격과 참석 인사들의 성향에 대해서 간접적으로 전해들을 수 있었다.
13일 R호텔의 행사장은 대한씨름연맹 회장 취임식장이었다. 신임 회장에 과거 수원파 보스 출신인 최창식씨가 선임됐다. 이날 행사장은 경찰 관계자도 직접 찾은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최씨 측의 인사들로부터 “체육단체 회장 취임식에 경찰이 왜 나서느냐”는 강력한 항의를 받기도 했다.
반면 12월12일 I호텔에서 있은 행사는 결혼식이어서 취재진의 접근이 비교적 용이했다. 취재진은 손님을 가장한 채 실제 참석하기도 했다.
이날 오후 5시경. 평일 저녁인데도 호텔 내부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20~30대의 건장한 청년부터 50~60대의 초로의 신사들까지 그들의 행동과 절도는 예사롭지 않았다. 건장함을 잃지 않은 70대의 신사들도 간혹 눈에 띄었다. 일부 인사는 주변 수행원들의 부축 혹은 경호를 받는 듯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취재 확인 결과, 문아무개씨 아들의 결혼식이었다. 문씨는 전주 출신의 주류유통업을 하는 사업가로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인물이다. 하지만 호남 주먹들 사이에서 그는 ‘큰형님’으로 불릴 만큼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원래 행사는 6시부터 시작이었지만, 취재진이 도착한 5시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식장은 입구에서부터 수많은 주먹계의 원로들과 이들을 수행하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들로 가득했다. 주최 측은 결혼식을 위해 호텔의 3개 홀을 통째로 쓰고 있었다. 그 3개의 홀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비단 주먹계 인사들만 있는 것은 아닌 듯했다. 취재진이 얼굴을 알아볼 수 있는 인사들 가운데 확인한 이만 해도 전 서울중앙지검장 출신인 L씨와 연예인 A씨 등이 있었다. 홀의 입구에는 셀 수도 없을 만큼의 대형 화환들이 즐비했다. 거기에는 이름만 대면 알 만한 기업과 단체 그리고 유명인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날 취재진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참석한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끈 인사는 단연 조양은씨와 김태촌씨였다. 조양은씨는 50대 후반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청바지에 양복저고리를 입은 날렵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는 주변 사람들과 비교적 밝은 얼굴로 인사를 나누며 행사장을 돌고 있었다.
▲ 지난해 12월 당시 병원에 입원중이던 김태촌씨. | ||
취재진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듣기 위해 가까이 다가섰지만 아쉽게도 제대로 듣지는 못했다. 그만큼 주변이 시끄럽기도 했지만 두 사람의 운명적인 조우는 채 1~2분도 안될 만큼 짧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으로 볼 때 상당히 어색하면서도 형식적인 인사와 안부가 오가는 듯했다.
그런데 이날 두 사람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조씨가 혼자서만 다니는 데 비해 김씨 곁에는 항상 3명의 수행원이 함께 따라다니는 모습이었다. 취재진 역시 조씨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으나 수행원의 경호가 엄격했던 김씨의 모습은 카메라에 담기 어려웠다.
폐암 수술로 불편한 몸이어서인지 김씨는 거동도 조씨처럼 경쾌하거나 자유롭지 못한 모습이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인사를 한 김씨는 예식이 시작하기 전 일찍 자리를 뜨는 모습이었다. 반면 조씨는 예식이 진행되는 과정을 모두 지켜본 뒤 자리를 떴다.
두 사람의 이날 전격적인 만남은 이후 주먹계에서도 화제가 됐다. 주먹계 출신의 한 원로 인사는 “70년대 중반부터 김씨와 조씨는 서로 원수지간이었다.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그런 사이였다. 조씨도 두 사람의 대결을 ‘피의 전쟁’으로 부르지 않았나. 이후 두 사람은 서로의 앙금을 전혀 풀려고 하지 않았다. 원로들은 물론 정계와 검찰 고위인사들 사이에서도 두 사람을 화해시키려고 많은 중재 노력을 했으나 서로 거절해 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 두 사람이 실로 30년 만에 만나서 악수를 한 셈”이라고 전했다.
실제 <일요신문>에서도 지난해 12월 당시 병원에 입원중이던 김태촌씨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조씨와 만나서 화해할 용의가 있다”는 인터뷰 내용을 보도한 바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조씨가 “내가 그를 만나야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고 강한 불쾌감을 표시해 실제 두 사람의 만남이 성사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날 행사장에서 또 다른 주목을 받은 인사는 칠성파의 보스였던 이강환씨였다. 그는 1980년대 후반 현해탄을 건너가 일본 야쿠자 조직 두목과 의형제를 맺기도 한 전설적인 주먹으로 알려져 있다. 여전히 이 세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는 얘기들이 많다.
부산의 ‘통합20세기파’를 일망타진한 바 있던 부산지검의 권오성 검사는 “위계질서 측면에서 칠성파에 버금가는 조직은 없다. 파워 면에서도 다른 조직들은 아직 칠성파와는 게임이 안 된다”고 할 정도로 칠성파의 위력을 인정한 바 있다. 그 정도로 주먹계에서 이씨의 파워는 막강하다는 뜻이다.
현재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는 이씨는 일찌감치 식장에 자리를 잡고 앉은 듯 보였다. 그런데 이씨가 자리한 주변에는 많은 인사들이 모여들어 마치 그가 이날의 주인공인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의 주변에는 수행원 몇 명이 항상 함께하고 있어 그의 위세를 과시하는 듯했다.
▲ ‘칠성파’ 보스 이강환씨(가운데)와 ‘신상사’ 신상현씨(맨오른쪽). 취재진이 접근하자 주변에서 손을 들어 제지하고 있다. | ||
테이블의 한켠에는 얼마 전 사기 혐의로 구속됐다 풀려난 신상현씨(72)도 눈에 띄었다. ‘신상사’라는 별명을 가진 신씨는 명동일대의 주먹계를 장악했던 인물로 우리나라 주먹세계를 최초로 통일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75년 명동 사보이호텔에서 흉기로 무장한 범호남파에 의해 습격당한 뒤 몰락의 길을 걸었으며 이후 은퇴한 뒤 주먹계 ‘원로’ 대접을 받아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그를 급습했던 범호남파의 당시 행동대장은 조씨였다. 두 사람은 식장 안에 모두 입장했지만 따로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은 눈에 띄지 않았다.
또 식장 맨 뒷편에는 수행원으로 보이는 이들이 일렬로 길게 늘어서서 ‘보스’들 주변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들 중 하객들을 위해 마련된 의자에 앉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날 행사장을 지켜본 한 호텔 관계자는 “조폭이 역시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라며 “나이가 들었어도 원로들 자리에는 40~50대는 얼씬도 못하더라. 김태촌씨나 조양은씨도 어려워하는 것 같더라”라고 전했다. 그는 “수행원들로 보이는 20~30대의 청년들은 시종일관 부동자세와 삼엄한 경호 자세를 취해서 마치 보스들이 무슨 고급 VIP나 되는 듯이 보였다”고 이날의 분위기를 전했다.
‘양은이파’니 ‘서방파’니 혹은 ‘칠성파’니 하는 조폭 조직은 전설이 됐을지 몰라도 그들의 엄격한 위계질서는 여전히 남아 있는 셈이었다.
특별취재팀